제332호 박현준⁄ 2013.06.24 14:08:29
광해군 2년(1610년), 어느 봄 공성왕후를 추숭(追崇)해 봉자전에 봉안했다. 이것이 성릉(成陵)인데 광해군 7년(1615년)에 태묘에 모셨다. 광해조 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광해군은 후궁인 어머니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숭하고 종묘에 모셨다. 추숭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제왕의 칭호를 올리는 것이다. 광해군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스물다섯 살에 사망한 공빈을 ‘자숙단인공성왕후’로, 추존 시호는 ‘공성’, 휘호는 ‘자숙단인’, 혼전은 ‘봉자전’, 능호는 ‘성릉’으로 높였다. 이와 함께 공성왕후가 된 공빈은 정전 제7실에서 선조 그리고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와 함께 모셔졌다. 광해군은 후궁인 어머니를 왕후로 높이고 종묘에 부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좌의정 이정귀의 행장을 쓴 장유의 계곡집에는 그 내용이 상세히 소개돼 있다. 광해군은 2년에 선조와 의인왕후 신주를 종묘에 모셨다. 이에 좌의정 이정귀가 “종묘에 부묘를 한 뒤에는 으레 원로대신과 유생들의 가요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군더더기에 불과하고 아직도 슬픔이 다 가시지 않은 때이니 모두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즐거워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머릿속으로 생모인 공빈 김씨의 추존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얼마 후 유학자들에게 널리 고전(古典)에서 후궁을 왕비로 추숭하는 사례를 찾도록 지시했다. 신하들이 명나라 효종이 기태후를 추존하면서 별묘에 모셨던 예를 아뢰었다. 그러나 이정귀는 한나라, 당나라 이후로 추존했던 일은 예제(禮制)에 어긋남을 주장했다. 그는 “의인왕후가 아들이 없어 임금을 후사로 삼은 만큼 생모는 등급을 낮출 것”을 고했다. 광해군은 생모인 공빈 김씨의 아들이 아닌 의인왕후의 아들이라는 논리다. 이정귀는 또 “명나라 효종이 생모를 추존해 봉자전에서 별도로 제사를 올린 전례가 있어 논의할 수 있지만 두 어머니(의인왕후와 공빈 김씨)를 모두 어머니로 높여 모시는 모순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조선에서의 호칭을 생각했다. 임금의 생모 생존 때에는 비(妃)라고 칭했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후(后)라고 일컬음을 들어, 지금 추존하되 비(妃)라고 하고 별묘(別廟)에서 향사(享祀)를 올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광해군은 “종묘에 옮겨 모시는 일을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다면, 그 일은 서서히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겠다. 다만, 후(后)의 위호를 써서 추존한 다음 별묘를 세워 책보를 올리고 의전(儀典)을 갖추어 봉릉하는 일만은 지금 해야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영의정 이덕형이 해당 관청에서 의논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별묘에서 제사 드리는 것만도 이미 차별을 두었다고 할 것인데, 비(妃)의 위호만 올린다면 너무나도 흠이 되는 일이다. 후(后)의 위호를 올리는 일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 후세에 준열한 논의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가 책임질 것”이라며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결국 광해군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종묘에 부묘하는 명분을 얻어냈다. 광해군이 생모의 추숭에 크게 신경 쓴 것은 어머니에 대한 정을 넘어 왕권강화와 정통성 확보라는 이유도 있었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후궁 소생이었다. 임금의 아들에게는 사가와는 달리 서자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왕비에게서 난 대군이나 후궁에서 난 군이나 모두 왕자일 뿐이다. 그러나 왕비의 아들이 아닌 후궁의 아들인 왕자로서 콤플렉스를 지녔던 선조는 적자에게 대통을 잇고자 하는 의욕이 강했다. 남양주에 어머니 공빈 옆에 묻힌 광해군 정비인 의인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뒤, 임진왜란이라는 특수상황으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지만 선조는 적자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광해군은 정비 의인왕후 박씨의 양자가 돼 표면상 세자로서의 위치를 굳혔지만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위치가 흔들리고 있었다. 광해군은 생모가 왕후가 되면 자연스럽게 적통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계산했다. 그러나 공빈의 사후 영광은 짧았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출되자 다시 공빈으로 추삭(追削)되었다. 공빈에게 바쳐졌던 명나라 황제의 임명장인 고명(誥命)·관복(冠服)·책보(冊寶)는 불태워졌다. 성릉의 능호를 거둬들였고, 왕후에 걸맞게 세워진 석물(石物)도 모두 헐렸다. 특히 종묘에서도 신주가 퇴출됐다. 인조실록에 그 내용이 전한다. 인조 1년(1623년) 3월 18일 예조에서 임금에게 아뢴다. 폐주의 생모로 선조 대왕의 후궁 김씨는 명나라에 주청하여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하였습니다. 이제 위호(僞號)를 이미 삭제하였으니 그 신주는 의당 김가의 자손에게로 돌려보내야 하고, 고명, 면복, 책보, 의장(儀仗) 등의 물건은 종묘에 고유한 다음 모두 내다가 불태워 없애야 할 것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이에 대해 임금은 그대로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신주의 형식이 사가의 목주(木主)와 다르니 태워 없앤 뒤 개조하고, 또 성릉의 호를 혁파하소서” 하였다. 인조 8년(1630년)에는 공빈의 묘소에 법에 어긋나게 세운 석물들이 모두 헐렸다. 공빈 김씨는 후궁으로 애초 종묘에 부묘될 수 없었다. 그러나 왕이 된 아들이 무리하게 종묘에 신주를 모셨으나 폐위가 되면서 종묘에서 퇴출되는 비운을 맛봤다. 경기도 남양주에 공빈의 묘와 광해군의 묘가 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읜 광해군은 어머니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 공빈의 묘가 보이는 곳에 광해군의 묘가 있다. 폐위된 임금과 종묘에서 쫓겨난 어머니는 깊은 잠으로 회한을 달래고 있지 않을까.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