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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33]한국 천주교 발상지 - 천진암 길

절두산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315년 된 ‘해운당대사의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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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33호 박현준⁄ 2013.07.01 11:35:51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한강 방향으로 나아가면 절두산순교성지(截頭山殉敎聖地)가 있고 그 옆으로 외국인선교사 묘역이 있다. 우리가 익히 그 이름을 기억하는 아펜젤러, 언더우드, 베델 등 이 땅을 사랑하며 헌신하다 잠드신 분들이 계시는 곳이다. 그런데 이 묘역 동쪽 조그만 영역에는 몇몇 비석 가운데 이곳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비석 한 기(基)가 서 있다. ‘海雲堂大師義澄之碑’ (堂號는 해운당, 法號는 의징 대사의 비) 뒷면에는 ‘崇禎紀元後 戊寅 五月 日 立, 上佐 守堅 天心’ (숭정 기원 후 무인년 5월 일 세움, 상좌 수견 천심). 숭정 기원후 무인년은 언제이며 이 비석은 무슨 연유로 이곳에 서 있는 것일까? 비석엔 왜 멸망한 명나라 연호를 썼을까? 숭정(崇禎)이란 연호는 명나라 마지막 임금 의종(毅宗)의 연호인데 숭정기원후 무인년은 1698년 즉 숙종 24년, 청나라 강희제 37년에 해당된다. 남의 나라 연호(年號)를 쓸 것 같으면 왜 청나라 연호인 강희 37년을 쓰지 않고 54년 전(1644년)에 이미 망한 명나라 마지막 임금의 이름을 들어 연호를 만들어 쓴 것일까? 여기에는 조선의 아픈 과거가 있다.

1636년 병자년, 인조는 치욕의 삼전도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큰 절 한 번 올리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리는 예를 3회 거듭하는 인사법)를 올리고 청 태종 앞에 항복했다. 그 뒤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의 선비들은 이 세상에 이제 중화(中華)가 없다는 허탈감에 빠졌으며 우리라도 소중화(小中華)로 남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그러니 어찌 없어진 명나라를 잊을 수 있겠는가. 청나라 눈에 띌 곳에는 청나라 연호를 썼으나 은밀한 곳에서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심지어는 근래까지도 상량문에 ‘숭정기원후 몇 갑자(甲子)’라는 방법으로 연호를 기록한 이들이 이 땅에는 있었던 것이다. 그 흐름은 깊은 절간에까지 미쳐 해운당대사비에도 연호가 ‘숭정기원후 무인’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제 이 비석이 본래 있었던 곳으로 찾아가 보련다. 다행히 이 비석에 관한 실마리가 천진암 관련 자료에 보인다. ‘해운당 대사 의징지비(주어사) -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천진암 주어사를 순례하던 중 발견한 주어사 터 표지 비석으로, 海雲堂大師義澄之碑(해운당대사의징지비)라 새겨져 있다. 1960년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프란치스코)에 의해 발견됐다. 이 비가 새워진 연대는 1698년이며, 비신 높이는 91cm, 폭은 33cm이다.’ 그렇구나. 주어사라는 절터에 남아 있던 비석이었구나. 옛 문헌 지리지(地理誌)나 군지(郡誌) 어디에도 ‘주어사’라는 사찰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해운당 대사에 대한 기록도 없다. 다행히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여유당 전서에 선생께서 쓰신 묘지명(墓誌銘)이 있는데 거기에 주어사(走魚寺)란 절 이름이 보인다. 흑산도 유배 길에서 돌아오지 못한 둘째형 정약전(丁若銓)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권철신은 일찍이 주어사에 머물면서 학문을 강했다. 모인 이는 김원성, 권상학, 이용억 등 여러 사람. 녹암(권철신의 호)은 스스로 규정을 정했다. 새벽에 일어나 얼음물에 세수하고 이 닦고 숙야 잠을 독송하며, 해 뜨면 경재 잠을, 정오에는 사물 잠을, 해지면 사명을 독송했다.’ 學, 李寵億等數人。鹿菴自授規程。令晨起掬氷泉盥漱。誦夙夜箴。日出誦敬齋箴。正午誦四勿箴。日入誦西銘)。 녹암 권철신은 양촌 권근의 후손으로 양근(양평)에 자리잡고 있던 이 지역 대학자였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흔히 절에 들어가 한 철 글 읽거나 과거공부 하는 일이 잦았는데 녹암도 집 가까운 앵자봉 아래 주어사에서 마음 맞는 이들과 강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석은 천주교 성지 천진암 주어사 터에서 유래 이제 주어사 터를 찾아 나선다. 다행히 조계종단에서 발행한 ‘한국사지총람’에 주어사 터가 소개되어 있다.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 산 106일원. 곤지암에서는 대략 한 시간 간격으로 양평 가는 버스가 있다. 강변역이나 천호동에서 상일동 사이 천호대로에서 1113-1번 버스를 이용하면 쉽게 곤지암까지 갈 수가 있다. 곤지암에서 양평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상품리에서 내린다. 반대로 양평터미날에서 곤지암으로 회차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날 필자는 곤지암에서 택시를 이용해 산행 출발지인 윗주어(하품2리 마을회관)까지 이동했다. 택시요금은 1만6000 원 내외. 4인이 이동한다면 그리 큰 부담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품리 버스정류장에서 산행기점까지는 한적하기는 하지만 3~4km 재미없는 포장길이기 때문이다. 윗 주어에서 주어사까지는 5km의 임도가 기다리고 있다. 지프차나 승합차라면 충분히 임도를 이용해 주어사지 아래까지 이동할 수도 있다. 그만큼 임도는 잘 가꾸어져 있다. 여주군에서는 친절하게 안내판을 세워 놓았고 임도는 달리 분기점이 없어 주어사지 입구까지 무리없이 갈 수 있다. 등산객에게도 잘 알려진 코스가 아니기에 길은 한없이 한적하다.

1시간 임도길을 걸은 후 시원한 계곡수를 만나는데 주어사 100m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계곡을 따라 100m를 오른다. 오래 전 절터는 무너지고 숲은 뒤덮여 기와편과 도기, 자기편이 아니라면 쉽게 절터임을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5군데의 작은 건물지가 남아 있다. 누군가가 ‘천주교 강학회 장소 주어사’라고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이곳이 1700년대 말 녹암 권철신을 비롯한 선비들이 강학하던 절터라니 감회가 새롭다. 근래까지 찾는 이 없던 이 절터를 지키던 해운당대사비는 이런 인연으로 절두산 성지에 옮겨진 것이리라. 해운당대사 같은 분들이 주어사를 지키고 가꾸지 않았다면 강학도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 아닌가. 다산의 ‘녹암(권철신) 묘비명’에도 주어사와 천진암에서의 강학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돌아가신 형님 정약전은 예를 갖추고 와 공(녹암)의 문하에 들어 공을 섬겼다. 지나간 기해년 겨울(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이 열렸는데 눈 속에 이벽이 밤에 도착해 오랫동안 불을 밝히고 경을 담론했다. 그 7년 후에 비방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이른바 성대한 잔치는 거듭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공이 돌아가신지 수개월이 지났다. (先兄若銓執贄以事公。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其後七年而謗生。此所謂盛筵難再也。公旣死有月。)’ 1779년 기해년은 다산 17세, 정약종 19세, 정약전 21세, 이벽 25세, 권철신 43세로 새로운 정신에 불타는 젊은 학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보면 이날 이벽이 도착한 절이 천진암인지 주어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기록이 있다.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해 21년간 활약하다가 1866년 순교한 성 Daveluy주교가 남긴 ‘조선순교사 비망기’인데 다산의 기록과 같이 이벽은 눈쌓인 겨울밤 한 절에 도착했다. 강학이 열리고 있는 곳이 산 반대편임을 알고는 스님들을 깨워 어둠을 뚫고 산을 넘었다는 것이다. (조선천주교회 창립사 참조)

이 글에서도 이벽이 먼저 도착한 절이 주어사인지 천진암 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한 밤중에 한 절에 도착했다가 산 넘어 절로 넘어 갔던 것이다. 권철신은 양근 감호 대감마을(양평읍내 양근리, 갈산리)에 살고 있었으며 다산의 형제들은 현재도 다산 유적지가 있는 조안면 마재에, 이벽은 광주 출신에다가 누님이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처(妻)였음으로 이 날은 누님이 계신 마재에서 출발했다. 불교가 자리했던 앵자봉에서 천주교도 함께 꽃피워 ‘조선천주교회 창립사‘에서는 이벽이 먼저 도착한 절을 주어사로 산 넘어 도착한 절을 천진암으로 해석하고 있다. 주어사에는 다산의 묘비명에서 언급한 이 닦고 세수하던 빙천(氷泉)도 메워져 찾을 길이 없다. 금당이 자리했을 자리에는 후세의 가난한 백성이 만들어 놓은 숯가마의 흔적이 세월을 말해 주고 있다. 흐르는 계곡물에 세수를 하고 이벽이 잠자는 승려들을 깨워 넘었던 고갯길을 오른다. 고갯길은 계곡을 끼고 오르는데 많이 가파르다. 눈 쌓인 한겨울밤 이 고갯길을 넘었을 이들은 쉽지 않은 길을 넘었을 것이다. 오르기를 30여 분, 이윽고 능선에 도착한다. 앵자봉(鶯子峰)과 양자산(楊子山)을 잇는 능선길이다. 이 고개(앵자현)에서 곧바로 내려가면 천진암터로 이어진다. 이벽도 그날 밤 이 길로 내려갔을 것이며 예전에는 흔히 오가던 길이었건만 이제는 천진암성지 보호를 위해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이벽의 길을 걸어 보려 한 뜻이 좌절되어 아쉬운 일인데 어찌 하랴, 천진암을 성지로 삼아 보호하기 위함이니. 내친 김에 잠시 좌로 방향을 틀어 앵자봉에 오른다. 667m의 정상에는 근래에 세운 한글 정상석과 앵자봉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꾀꼬리가 알을 품은 산세라서 예전에는 꾀꼬리봉이라 했다는데 한자화해 앵자봉(鶯子峰, 앵자산)이 됐다고 한다. 일명 각씨봉이라고도 하는데 옆 양자산을 남편으로 여기고 앵자봉을 아내로 여기기에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그래서 이 산은 부부가 함께 오르면 금슬이 좋아진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사실 앵자봉은 산줄기를 타는 이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가로로는 광주의 무갑산이나 관산에서부터 앵자봉, 양자산 지나 양평의 백병봉으로 이어지는 긴 산줄기를 타는 재미가 있다. 세로로는 한남정맥의 문수산에서 분기한 앵자지맥의 중심 산이기 때문이다.

또한 천주교의 성지가 된 천진암 터도 앵자봉 품에 있으며 주어사 터도 앵자봉의 반대편 품에 있으니 불교가 자리했던 앵자봉 품에 천주교의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이제 온 길을 되돌아 앵자현으로 내려선다. 양자산 가는 능선길인데 평탄한 숲길이다. 북녘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뺨에 맺힌 땀을 닦는다. 헬기장을 포함해 세 번째 공터에 이르면 좌측으로 ‘정암산, 해협산, 염치고개’로 분기하는 능선길을 만난다. 앵자봉에서 0.78km 되는 지점이다. 참으로 고약한 안내판이다. 이곳을 지나치면 천진암으로는 내려 갈 수가 없다. 적어도 ‘천진암 주차장’으로 갈 수 있는 길임을 표시해야 할 위치이다. 능선 길에는 천진암으로 내려 가지 못하게 분기점마다 출입금지 시그널이 펄럭인다. 예전에 자유롭게 다니던 등산로가 막히니 많히 불편하다. 등산로도 새로 닦아 돌아가게 한 구역이 생겼다. 이렇게 능선길을 내려가면 천진암 주차장이다. 관리인이 배낭을 메고 나타난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성지는 참배가 목적인데 단정한 복장과 경건한 자세와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그런가 보다. 성지(聖地) 안으로 향한다.

가우디성당은 150년, 천진암 성당은 100년 기약 건립 중 대성당 터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100년을 기약하며 대성당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에 가우디 성당이 150년이 넘도록 건설되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그들의 지긋함에 고개 숙여졌던 날이 생각난다. 100년을 목표로 한다면 후세에 길이 남을 훌륭한 기념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천진암 터를 향하여 방향을 잡는다. 성지가 자리 잡기 전 여름이면 가끔은 찾아 왔던 천진암 계곡을 생각하면서 길을 찾는다. 창립 성현 5위의 묘가 있는 강학로 가는 길이다. 드디어 계곡길이 나타나면서 길은 다소 비탈길로 바뀐다. 예전 이 곳 어디 쯤 철분이 섞인 탄산수가 있었는데… 찾을 수가 없다. 70년대쯤이었던가, 천진암 골자기에 오면 폐천(廢泉)이 된 탄산수 위로 쓰러져가는 절 건물이 하나 남아 있었다. 다산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보면 형님들과 천진암(天眞庵)에 와서 놀며 공부하며 지내던 일을 기록한 수십여 편의 시(詩)가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에 남아 있다.

천진암상풍(天眞菴賞楓: 천진암 단풍 감상)이란 시 한 편 보자. 買酒花郞坊裏 (매주화랑방리: 화랑방 안에서 술을 사서) 停車鶯子峰陰 (정거앵자봉음: 앵자봉 뒤에다 수레 멈추니) 一夜纖纖白雨 (일야섬섬백우: 하룻밤 가는 가을비에) 雨厓欇欇紅林 (우애섭섭홍림: 양 절벽 온통 불타는 숲) 초여름 천진암 숲은 푸르다. 가을이 오면 이 골자기가 다산이 보았던 홍림(紅林)으로 가득할 것이다. 옛절 천진암터는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다행히 숲속에 세워놓은 ‘천진암 강학회터’라는 푯말이 보인다. 이 곳이 천진암터이리라. 천진암은 어떤 절이었을까? 정확한 연혁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에 얽힌 사료에서 찾은 천지암 기록 다산의 여유당전서를 비롯하여 여지도서, 가람고, 범우고, 중정남한지 등에 간단한 기록만이 남아 있다. 1872년 제작된 광주 군현지도에도 앵자산과 우산(牛山: 양자산) 아래 천진암이 그려져 있다. 1846년(헌종 12년) 광주 선비 관암 홍경모(洪敬謨)의 중정남한지 불우(佛宇)조 기록을 보자. ‘천진암: 앵자산에 있는 오래된 사찰로 종이를 만들며 지금은 사옹원에 속해 있다(天眞庵: 在鶯子山 爲古寺 造紙物 今屬司饔院)’. 중앙정부에서 사용하는 종이는 조지서(造紙署)에서 만들어 썼는데 각 사찰에서는 경전을 찍을 목판과 종이가 필요했으므로 스스로 판각과 종이를 만들 수 있는 사찰이 많았던 것이다. 지금도 앵자봉에는 뽕나무가 많은데 아마도 종이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또한 광주에는 사옹원의 분원이 있었는데 천진암도 종이와 관련해 이곳의 관리를 받은 듯하다. 지금도 광주에는 분원(分院)이란 지명이 남아 있으니 세상은 바뀌어도 옛일은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강학 터에서 계곡을 건너면 성현 5위의 묘역이 있다. 천진암에서 강학을 통해 서학(西學: 천주교)을 자생적으로 꽃피우는데 앞장섰던 5분 성현의 묘를 이장하여 이곳에 모셨다. 광암 이벽, 만천 이승훈, 선암 정약종, 직암 권일신, 녹암 권철신. 이 중 광암 이벽은 한국천주교를 태동시킨 성조로 모셔지고 있다. 묘역 우측 숲 속에는 ‘이벽 성조 독서처 터’라 하여 신성시하는 장소가 있다. 다산은 35세가 되던 1797년 두 형님들을 모시고 천진암에 와서 머물며 단오 날을 즐겼는데 그 때 남긴 시(詩) 20수 중에 ‘단오날 두 형님을 모시고 천진암에서 보낸 기록(端午日 陪二兄 游天眞庵記)’이란 시가 있다. 그 첫구(句)는 이렇게 시작한다. 李檗讀書猶有處(이벽독서유유처: 이벽이 책 읽은 자리는 아직도 있는데) 이때는 광암 이벽 순교 12년 후이니 평소 이벽을 존경했던 다산으로서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 자리를 찾아 ‘이벽 성조 독서처 터’라고 푯말을 붙여 놓은 것이리라. 이제 온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주어사 터와 천진암 터을 이어서 광암 이벽 선생의 길을 걸은 날이다. 성지 정문 앞에는 퇴촌이나 광주로 나가는 버스편이 있다. 교통편 강변역/천호대로에서 좌석버스 1113-1 곤지암 환승 ~ 광주지역 버스 양평행 상품리 하차 걷기 코스 상품리(98번 지방도) ~ 하품2리 마을회관(333번 도로) ~ 윗주어 마을 ~ 임도 ~ 주어사터 ~ 앵자현 ~ 앵자봉~(회귀) ~ 정암산쪽 갈림길 ~ 능선길 ~ 천진암 주차장 ~ 천진암터(5위성현묘역/ 이벽 성조 독서터) ~(회귀) ~ 천진암 주차장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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