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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 사람]탈북여성 1호 박사 이애란 “통일은 밥상에서 나온다”

식품영양학 교수+북한음식점 사장, ‘통일 약과’ 대량생산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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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48호 정의식⁄ 2013.10.14 14:00:40

1964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애란 원장의 북한 생활은 ‘출신성분’에 의해 처음부터 가시밭길로 점철됐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월남했다는 이유로 11살 때 일가족은 양강도 산간지대로 추방당해 갖가지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암담한 것은 앞으로의 미래마저 출신성분에 의해 한계가 그어졌다는 점이다. “헐벗고 못사는 북한이지만 그래도 과거에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그럭저럭 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90년대 위기를 겪으면서 대부분이 못사는 사회로 전락했지요. 어린 시절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가면 좀 더 나아질 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전국 수학경시대회에서 4등을 하기도 했는데, 애초에 대학 추천을 안 해주니 갈 수가 없었습니다.” 미 국무부 ‘용기있는 여성지도자상’ 수상 원하는 대학도 갈 수 없고, 좋은 직업도 가질 수 없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따돌림 당해야 하는 현실에서 그녀는 자살도 여러 번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농약을 마시기도 했지요. 목숨이 질겨서 못 죽고 살았습니다.” 북한 당국이 출신성분이 나쁜 이들에게도 이공계 대학 입학을 허가한 이후에야 식품공학 전공으로 대학을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럭저럭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살던 1997년 갑작스레 탈북을 결행하게 된다. 미국에 살던 할머니와 연락이 닿았는데, 때마침 사촌동생이 비극적 가족사를 적은 책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덕분에 아버지가 청년 시절 김일성 반대 피켓을 들고 싸운 사실이 북한당국에 알려지면서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갈 위기에 처한 그녀는 4개월 된 아들을 포함한 일가족 9명과 함께 탈북을 시도, 중국과 베트남을 오가는 천신만고의 역경 끝에 한국에 입국했다. 하지만, 탈북의 성공은 시작에 불과했다. “탈북 과정은 상당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단기적 어려움이고, 정작 어려운 것은 정착해 제대로 사는 것이더군요.” 1997년은 탈북자가 많지 않아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았고, 정부도 민간도 IMF의 긴 겨울을 겪는 와중이었다. “처음엔 어려운 줄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살면서 더 어려워지더군요. 자본주의 국가에서 산다는 것은 자기 책임이 많이 따르는 것이라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특히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유지해야 되니 더 어려웠습니다. 물론, 북에 있을 때보다는 정말 행복하지요.”

처음엔 지원도 없고, 정착금도 적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탈북자들의 많은 의견 제기로 시스템이 서서히 개선돼 가는 것을 보며, 민주주의의 장점을 체득하게 됐다. “확 바뀌진 않아도 조금씩 조금씩 바뀌는 걸 보니 ‘참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선거에 참여하면서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그녀는 먹고살기 위해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화장실 청소원에서 보험회사 외판원을 거쳐 이화여대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게 되고, 탈북여성으로는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고, 경인여대 식품영양조리학과 교수로 임용된다. 숨 가쁘게 한국에 적응하면서 자신뿐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 탈북, 정착이 더 어려워 “처음엔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 아이 잘 키울 생각만 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받고 성장하면서 깨달은 것은 개인이 잘 되는 것과 나라가 잘 되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제 아이가 탈북자라는 카테고리에 묶여 모든 것이 제한되는 것, 콤플렉스 갖는 것을 없애고 싶었습니다. 결국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죠.” 나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다른 탈북자들도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 활동들이 이어지면서 이 원장은 어느 사이엔가 탈북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고, 미국 국무부로부터 ‘용기있는 국제 여성상’을 수상받기에 이른다. “탈북 여성들의 일자리를 알아보고, 탈북자 가정의 아이들 공부를 도와주고, 이런 일들을 한 것 뿐인데, 꿈도 꾸지 않던 큰 상을 받게 됐습니다. 미안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의 전공을 살려 식품영양학 교수가 된 이 원장은 남북한의 음식문화를 연구함으로써 통일을 앞당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을 열고, 북한음식점 ‘능라밥상’을 종로에 열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북한은 배급제를 채택하다보니 전통문화가 남아 있을래야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식재료로 다양한 음식문화를 유지할 수 없지요. 다만 국가가 관리하다보니 서류적으로 남겨놓은 건 많은 것 같습니다.” 북한 개인들은 북한 전통음식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한다. 심지어 이 원장의 모친도 북한에서 요리사로 일했지만, 모르는 음식이 더 많다고. 그래서 북한 각 지방의 음식을 조사하고, 문헌과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잊혀진 북한 음식을 현대에 재현하고 있다. 잊혀진 북한 전통음식 현대에 맞게 되살려 남한에서 유명한 평양냉면, 함흥냉면도 정작 북한에서는 사라진지 오래라고 한다. 메밀로 만드는 냉면 자체가 많지 않고, 대부분 옥수수국수로 바뀌었다. 이 원장이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북한에서 메밀냉면을 먹어본 사람은 0.7%에 불과했다고.

남한의 전통음식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너무 손이 많이 가고 돈이 많이 드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궁중요리는 과거 왕 혼자 먹기 위해 수십 명의 상궁들이 동원되어 만들던 음식인데, 현대에 이를 재현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통음식을 하되 현대에 맞게, 새로운 요리법과 식자재를 사용해서 하는 게 좋다는 얘기다. 냉동, 냉장, 조리기계 등 새로운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이 원장의 지론이다. 특히, 합성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천연재료만 사용하면 끓일수록 맛이 납니다. 반면, 조미료를 많이 쓰면 계속 끓일 경우 맛이 이상해지지요.” ‘능라밥상’은 간장과 고추장, 육수, 마늘, 양파, 태양초고추 등 천연재료만 써서 맛을 내는데, 충분히 채산성을 맞출 수 있다고 한다. 남한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음식도 많다. 낙지와 사과,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전골 ‘낙사돈’과 평양식 닭고기국밥인 ‘평양온반’, 닭가슴살을 얹어 고추장이 아닌 간장으로 비벼먹는 ‘해주비빔밥’, 암소어복살로 만든 전골요리 ‘어복쟁반’, 갈아 만든 감자로 만들어 질감이 남다른 ‘감자만두’ 등이 능라밥상이 자랑하는 대표적 북한 요리다. 기자가 방문한 때는 오후 5시경이라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손님들이 오가며 북한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손님이 충분히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점심과 저녁 시간에는 테이블이 가득 찬다고 한다. 식품영양학과 교수와 북한음식점 사장을 겸하고 있는 이 원장이 당면한 가장 큰 현안은 ‘통일약과’다. ‘통일약과’는 약과의 원조랄 수 있는 ‘개성식 약과’의 전통제조기법을 이용해 만드는 제품으로, 올 초부터 백령도 해병대에 기증되는 등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대량생산의 어려움으로 벽에 부딪힌 상태다. “약과를 생산한지 3년 됐습니다. 인지도가 많이 높아져서 이번에 유명 마트에서 추석 기획상품으로 내고 싶다고 제안을 받았는데, 공장이 없어서 공급을 못했습니다. 기계를 살 돈이 있다면 공장을 세워서 제대로 공급하고 싶습니다.” 기존의 약과와 맛과 품질 면에서 차별성을 가진 제품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대로 사업화하기 위해서는 투자나 정부지원이 필요한 상태라는 얘기다.

공장을 세워 기계화 시스템을 통해 생산량을 늘리고, 많은 탈북자를 고용해 그들에게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이 원장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탈북자 기업의 모습이다. 그런 이 원장에게 지금의 탈북자 지원정책은 문제가 많다. “탈북자들이 정상적으로 한국 기업과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탈북자 정책이 시행되야 하는데, 지금은 지원에만 의존하는 불평불만자로 남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탈북자에게 개인적으로 지원하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같은 탈북자 기업을 많이 만들어 탈북자들을 많이 고용시켜야 탈북자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같은 탈북자 기업을 도와야 할 돈이 엉뚱하게 탈북자들을 도와준다는 단체들에게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탈북자기업 지원만이 탈북자문제 해결 정부의 탈북자 기업 지원정책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춰야만 지원이 되는 모양이다. 그간 수차례 신청을 했지만 매번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재무구조가 어느 정도 돼야 지원해준다고 하는데, 재무구조가 좋으면 왜 지원을 신청하겠습니까? 우리같이 열악한 기업을 지원해야지 자리잡은 기업을 왜 지원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살벌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탈북자들로만 이뤄진 기업이 살아남기가 쉽지 않습니다.” 탈북자 기업에 대한 제대로 된 지원이 시급하다는 이 원장의 외침이다. “사실 탈북자들도 문제가 많습니다. 오늘 아침만 해도 탈북자 직원 한 명이 출근하고 점심도 안 되서 그냥 퇴근했습니다. 일반 회사에서 그렇게 하면 바로 해고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경우에도 몇 번 더 지켜보고 용납해줍니다. 차근차근 한국 문화에 적응하게 도와주는 것이죠.” 탈북자들을 제대로 관리하고 도와줄 수 있는 건 탈북자 기업밖에 없다는 얘기다. 미국의 경우 난민 문제는 난민 단체에 해결을 맡기고 있다고 한다. 이민 역시 차이나타운, 코리아타운 같은 현지의 이민자 커뮤니티를 통해 이뤄진다. 그런 상황을 감안하면 탈북자들도 이제 탈북자단체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 놀란 사실인데, 난민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알고 보니 난민 출신이더군요. 우리도 탈북자 출신이 탈북자 정책을 총괄하는 체제로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은 통일부에서 은퇴한 공무원들이 산하단체에서 한자리씩 맡아서 하고 있더군요” 천신만고 끝에 넘어온 한국에서 여전히 힘겨운 도전을 계속하면서도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애란 원장의 바램대로, 탈북자 기업을 통해 탈북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보다 쉽게 정착하고, 남북한의 밥상에서 시작하는 통일의 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기대해본다. -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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