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 왕위계승 편치 않았던 세종 “자식 믿고 재산 많이 남기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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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정 김소희(金素姬) 명창이 자진모리로 몰아가던 판소리 춘향가의 어사출행 노정기 대목은 언제 들어도 신바람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장원급제하여 그리던 님도 보고 어사의 위엄도 보일 노정(路程)길이니 어찌 신바람나지 않았겠는가?
“남대문 밖 썩 내달아 칠패팔패(七牌八牌) 철패(鐵牌) 배다리 동작(銅雀) 월강(越江) 과천(果川)들어 중화(中火)허고 수원(水原)들어 숙소(宿所)허고 천안삼거리 지내여 도리치(道理峙) 등기(燈基) 영말(永未) 원터고개를 넘은 후 팔풍성(八豊亭)을 당도허니…”
이 길을 조금 보충하면 남대문 나서서 염천교 앞 칠패시장 지나 갈월동 뒷길, 청파동 지나고 삼각지 경유하여 동작나루 건넌 후 이어서 승방평(사당동) 통과하여 외진 길 남태령 넘으면 과천이었다. 과천에서 숨 돌리고 가자우물(찬우물)에서 나지막한 갈현(葛峴)을 넘으면 바로 인덕원(仁德院)이었는데 이곳이 교통의 요지였다.
평촌신도시길을 통과하여 갈뫼(葛山) 지나 47번 도로를 버리고 효성초교 지나고 오전초교 지나면 1번 국도길에 닿는다. 길은 남으로 이어지는데 고천동주민센터 자리가 옛 지명 골사그네로 사근행궁이 있던 지역이다. 이어서 지지대고개 넘으면 수원에 닿게 된다.
이 길은 서울에서 해남, 강진, 제주로 가는 삼남대로길이며 정조의 원행(園幸: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顯隆園)길이었다. 정조는 시흥을 통해가는 새 길이 놓일 때까지 6번을 이 길을 통해 원행에 올랐다 한다.
이 길은 또한 분통터지는 길이기도 하였다. 충무공 이순신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서울로 송환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 결과 계급장 모두 떼이고 백의종군(白衣從軍 요새 말로 하면 사령관이 이등병으로 강등된 경우라 할까?)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난중일기 기록에 의하면 그 고초를 겪고 돌아가는 이른 바 ‘백의종군길’에 인덕원에서 쉬어 가셨다. 그 날의 기록을 보자.
“정유(1597) 4월초 3일 조 (계해) 맑음. 일찍 남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민,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도착하였다. 나는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면서 조용히 누워 쉬다가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 경기관찰사 수하에서 심부름하는 이름도 모르는 군사의 집에서 잤다. 신복용이 우연히 왔다가 내 행색을 보고 술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부사 유영건이 나와 보았다.” (안양시지)
이 역사의 삼남대로길을 필자는 4호선 전철을 타고 지하로 통과하여 인덕원역에 내린다. 6번 출구를 나서면 ‘하롯섬 꽃꽂이’란 간판을 건 원예점이 있는데 골목길 20m 지점 작은 공원 마당에 인덕원 터를 알리는 표석을 앉혀 놓았다. 원(院)은 국립여관이었다. 자연히 원이 있는 곳은 교통의 요지가 되고 민간인들도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점(店: 주막)이 번창하게 되었다.
삼남에서 과거 길에 오르는 선비나 장삿길에 오르는 부보상(負褓商) 등 민간인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인덕원은 이 지역 중심지가 되어 갔던 것이다.
정조의 원행과 이순신의 백의종군 회한 서린 인덕원
표지석 앞으로는 삼남길이라는 나무 말뚝을 세웠는데 거기에 백운호수까지 거리가 3.51km임을 알리고 있다. 학의천(인덕원천)을 따라 가면 3.51km 뒤에 백운호수에 닿게 된다. 그런데 이 길은 삼남대로 길은 아니다. 근년에 삼남대로 길에 있는 경기도 지자체들은 이미 길이 끊기고 자동차길이 되어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삼남대로 구간을 걷기 좋은 산길, 들길로 대체하여 ‘삼남길’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걷기코스를 개발하였다. 걷기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인덕원길도 삼남대로 상 이미 걸을 의미가 없어진 인덕원과 사근행궁 터 구간 약 15km를 모락산 동편 산길로 대체하여 걷는 즐거움을 준 길이다.
오늘의 목표 코스는 임영대군(臨瀛大君)묘소와 사당, 그리고 모락산 정상부에 있는 경일암(擎日庵)터이다. 목표코스는 백운호수에서 출발이다.
백운호수로 가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이 곳에서 삼남길 말뚝이 가리키는 대로 학의천을 걸어 백운호수 능안(마을)입구까지 가는 길이다. 학의천을 말끔히 정리해 놓아 경쾌하다. 그러나 햇볕 강한 하절기에 권할만한 방법은 아니다.
두 번째 방법은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인덕원역 2번 출구에서 05, 05-1, 06 세 노선이 있는데 대략 20분에 한 대 정도 운행된다. 버스를 타면 10여 분 뒤에 능안입구에 닿는다.
능안 입구 이정표에는 안쪽 마을 방향 500m에 임영대군 묘가 있음을 알리고 있다. 황토장어라는 음식점 앞을 지나 약 100m 전방에 누룽지백숙이라는 또 다른 음식점이 있다. 백숙집 앞을 지나면 의왕 -과천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게 된다. 바로 앞에는 손골마을 집 몇 채가 있고 안내판에 좌측 100m에 임영대군묘, 우측 140m에 임영대군 사당을 알리고 있다.
대군의 묘소는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조선 초기 전형적인 왕자묘소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곳에 잠든 임영대군 그는 누구일까?
부부 금슬이 좋았던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는 8명의 왕자가 있었다. 첫째가 문종, 둘째가 수양대군, 셋째가 안평대군, 넷째가 임영대군, 다섯째가 광평대군, 여섯째가 금성대군, 일곱째가 평원대군, 여덟째가 영응대군이었다.
이 8왕자는 어떤 사이였을까? 성군인 세종과 자애로운 왕비 소헌왕후라면 당연히 8형제는 사이가 좋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였다. 첫째형 문종이 죽자 12살의 조카 단종이 즉위하고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를 중심으로 한 의정부의 권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른 바 황표정사(黃票政事)라 하여 벼슬자리를 임명할 때 어린 단종은 신하들과 상의하여 해당 인물에 노란표(黃票)를 했는데 이 때 신하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것이다.
셋째 안평대군은 이들과 사이가 가까웠으나 둘째 수양대군은 이들과 대척관계에 있었다. 드디어 수양은 1453년 (단종1년) 계유정란(癸酉靖難)이란 이름의 쿠데타를 단행하여 황보인과 김종서를 살해하였다. 이 때 8형제 중 첫째 문종과 다섯째 광평, 일곱째 평원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으니 형제는 5명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수양대군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두 아우를 몰아내었다. 셋째 아우 안평은 교동에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하였고, 여섯째 아우 금성대군도 순흥으로 유배시킨 뒤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하여 처형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은 형제는 3명뿐이었다. 수양은 스스로 임금(세조)이 되었고, 넷째 임영은 세조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세조실록 곳곳에는 세조가 임영에게 내린 혜택이 기록되어 있다. 임영의 사저에도 가끔 방문하였고 심지어 몸이 불편하다 하자 중궁(中宮)과 왕자를 대동하고 방문하기도 했으니 임영대군은 세조의 측근 중 측근이었다.
8째 영응대군은 어떠했을까? 그도 세조의 보살핌을 받았다. 실록에는 그의 노비가 물경 일만 명이 넘는다 했으니 그의 부(富)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아마도 세종대왕 내외께서는 지금도 편히 잠들지 못하실 것이다. 그렇게 애지중지 무릎 위에서 키운 손자(단종)가 믿었던 둘째 아들 수양에게 비명에 갔고, 또 그 손에 두 아들도 목숨을 빼앗겼으니 생각이나 하신 일이겠는가?
우리 세대에도 이런 일은 변함이 없다. 공연히 자식 믿고 재산 많이 남겨 형제간 원수 만들지 말 일이다. 더더욱 당부나 부탁의 말씀 남겨 죽은 후 자식에게 배신당하지 말 일이다. 세종대왕도 이렇게 당했거늘…
클로버와 박석이 반겨주는 임영대군 사당 오르는 길
묘소를 떠나 사당으로 향한다. 마을 앞 밭모서리에 장난감 모형집을 만들어 놓았다. 삼남길 ‘스탬프 찍는 곳’이라 썼는데 문을 열면 코스지도와 스탬프가 비치되어 있다. 세심한 배려에 감사한다.
앞 언덕에 사당을 깔끔하게 가꾸어 놓았다. 오르는 언덕길에는 클로버가 활짝 꽃을 피웠다. 사당 문은 잠겨 있어 위패나 영정은 볼 수가 없다. 사당을 떠나 리본을 따라 고갯길 방향으로 나아가면 비오는 날에도 진흙길 되지 말라고 고갯길에 박석(薄石)을 깔아 놓았다. 옛사람 방식이다.
우리 땅 박석고개란 이름이 붙은 고갯길은 진흙탕 되지 말라고, 아니면 고갯길 흙 패어나가지 말라고 얇은 돌을 깔아 놓은 고갯길이다.
고개 오르다가 좌측으로 난 산길로 접어든다. 모락산(慕洛山) 등산로이다. 만약 고개를 넘으면 포장도로 길을 만난다. 백운호수에서 계원예술대로 이어지는 한글둘레길(과거 문화예술로)이다.
등산로는 모락산 서북쪽 봉우리 제2호봉을 에둘러 가는 길이다. 숲이 우거지고 고도 변화가 없는 명상의 숲길이다. 이렇게 1km여 산을 에돌아가면 드디어 4거리 안부에 닿는다. 우측은 제2호봉, 좌측은 모락산 정상, 앞쪽 고개 너머로는 계원예대길이다. 모락산 정상(국기봉)까지는 1430m를 알리고 있다.
나지막한 정상(385m)을 향해 출발이다. 길은 평탄하게 오르고 가파른 곳에는 철 계단도 설치해 놓았다. 700여m 오르니 비교적 평탄지에 닿는데 큰 바위를 만난다. 사인암(舍人岩)이다. 이곳에서 하산길은 매우 가파르다. 이정표에 산령각(山靈閣)으로 내려가는 길임을 표시하고 있다. 의왕시 자료에 조선 초 임영대군이 자주 찾았던 바위라고만 했지 그 이름의 유래는 기록이 없다.
봉은본말사지(奉銀本末寺誌) 경일암(擎日岩) 편에는 인봉(金+刃, 峰)이라 부르고 있다. 날카로워서 붙인 이름일 것이다. 또한 인봉에는 옥관자송(玉冠子松, 별명 當選松)이 있는데 정조가 현륭원을 행차하다가 고송(孤松)이 우뚝한 것을 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봉하고 옥관자를 내렸다 한다. 아쉽게도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 후손들인가, 크지 않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니 언젠가는 뒤를 이을 것이다.
사인암에서 잠시 오르면 좌측 바윗길로 절터약수를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하산 길에 들리기로 하고 정상으로 오른다. 산은 낮되 정상에는 큰 평탄지가 자리잡고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4~5c 백제시대에 평탄지를 에워싸고 성(城)을 쌓았다고 한다. 퇴메식 산성으로 길이가 878m나 된다고 한다. 발굴해 보니 문이 있던 자리 2개소, 공격하기 좋게 삐죽 나오게 쌓은 치성(雉城) 4개소, 망대 2개소, 건물지 6개소가 나타났고 백제시대 경질토기파편이 많이 나왔다 한다. 한성백제 시대 하남위례성의 배후를 지키는 주요한 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이곳에 일병들이 진을 쳤다 해서 아마장터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곳이 군사상 요충임은 백제시대나 임진란 때나 현세에도 변함이 없었다. 정상에는 모락산 전승기념물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을 무찌름으로써 아군의 서울 탈환을 가능케 했던 모락산 전투를 잊지 않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또한 정상 평탄지에는 여러 형태의 바위들이 있어 그 특징에 따라 이름도 붙였다.
터만 남은 경일암, 지금도 두 개의 샘 마르지 않고 흘러
이 산의 이름 모락산은 그 유래가 분명치 못하다. 흔히 이야기처럼 회자되는 유래가 세조의 왕위 찬탈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임영대군이 은거하여 이 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여 모락산(慕洛山: 洛은 洛陽을 뜻하는 말로 長安과 함께 중국의 수도, 따라서 수도를 일반화하여 부르기도 함)이라 했다는 이야기 인데 실록에 나타난 임영대군의 성향으로 보면 잘 부합되지 않는 말이다.
한편 취기산(就其山), 몰압산(沒壓山), 몰악산(沒惡山), 모락산(帽落山)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는데 가장 힘을 얻는 산명은 역시 모락산(慕洛山)이다. 정조의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비롯하여 권상하의 한수재집(寒水齋集) 등 문집에도 한결같이 모락산이다. 사도세자의 원(園)을 옮기고 산천(山川)에 제(祭)지냈던 제문(祭文)을 보자. 역시 모락산이다.
모락산이 사방으로 둘렀으니(洛山周遭 )
매우 높이 치솟았네(巖巖其峙 )
잡귀를 꾸짖어 보살피길 길이 비오니(永祈呵護 )
이로써 밝은 제사를 드리네(用享明祀 )
이제 남쪽 뾰족한 봉 국기봉을 둘러본다. 높이 383m로 평평한 지역 정상 385m보다 낮은데 우뚝한 암봉에 태극기가 날려 정상처럼 여겨진다. 이곳 암봉들은 마그마가 끓어오를 때 자갈들이 많았던 지역으로 솟아올랐는지 바위마다 잔 돌이 잔득 박혀 있다. 지질학 공부하는 이들이 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다시 모락산전투 기념비 앞으로 돌아온다. 좌측(동북) 100여m 아래 절터약수터로 향한다. 우뚝한 바위 절벽 아래 몇 곳의 자그마한 평탄지가 있다. 석축도 남아 있고 무수히 많은 기와편도 밟힌다. 경일암(擎日庵)터다. 연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영대군의 원찰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국전쟁 이전까지 존속했으니 500년 도량(道場)이 빈터로 남은 것이다. 지금도 두 개의 샘이 마르지 않고 흐른다.
1940년 봉은본말사지 경일암 편을 작성할 때까지도 절은 온전히 존속했었다. 약사여래, 지장보살, 독성상이 석상으로 온전히 남아 있었고, 1866년 (同治 5년) 대모산 불국사에서 제작한 신중탱화를 비롯하여 탱화도 여러 점 있었다. 게다가 석두사(石頭寺)에서 발행한 1547년(가정 26년) 능엄경 전5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 찾기만 한다면 아마도 보물급일 것이다.
그밖에 1700년대 불경들도 여럿 남아 있었다. 아쉽다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빈 경일암터에서 읽어 보는 법당중건기(慕洛山 擎日庵 法宇重建記)는 가슴을 싸하게 한다.
“成住壞空(만물은 만들어지고 머물다가 부서져 공으로 간다)은 자연의 이치요 생로병사는 인간세상 본래 그런 것. 물리가 그런 걸 어찌 이 암자만 유독 그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흥망성쇠가 번갈아 바뀌거늘 암자가 기울었는데도 사람들이 이를 다시 지을 계획이 없다면 제 시절을 만나지 못한 것인가 인물을 만나지 못한 것인가? (夫壞空成住 天地之常道 生老病死 人世之固然也 物理如此 何獨斯庵之不然乎 興亡盛衰 遞互相對則 庵有傾覆 人無建構之計 然而不遇其時 不逢其人而然耶?)”
이렇게 발원한 선기화상(善基和尙)은 인근부락에서는 드물게 임종에 처한 최중손(崔重孫)이란 분의 50금(金) 시주를 받아 경일암을 중건할 수 있었다. 이 때가 1839년의 일이다. 그렇게 중건하고 지켜 나가던 절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터만 남았다. 成住壞空이구나. 흥망성쇠가 번갈아 바뀐다 했으니 경일암이 아담하게 다시 자리잡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모락산은 갑자기 생명력이 넘치는 산이 될 것인데…
이제 경일암 터를 떠나 능안고개로 내려간다. 안내판에는 백운산 방향이다. 능안고개 0.94km, 백운동산 1.82km, 백운산 4.2km를 알리고 있다. 편안한 숲길 내려오면 능안고개에 닿는다. 삼남길이 이 고개로 이어진다. 이정표에 임영대군 묘역과 반대방향 오메기마을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삼남길 리본을 따라 원점회귀 임영대군 묘역길로 방향을 잡는다.
잠시 후 능안마을을 지난다. 한 때는 효종능의 후보지로 임영대군 묘역이 검토되었기에 능안마을이라 불렀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아닐 것이다. 일반인 묘에 비해 큰 무덤이 있던 동네는 대체로 능골, 능안 등으로 불렸다. 월산대군묘역이 있는 마을도 능골이며 고 강빈의 영회원 마을도 능골이며, 사도세자 장남 의소세손의 무덤이 있던 북아현동은 아직도 능안이다.
능안마을을 지나면 이내 출발했던 백운호수에 닿는다. 1953년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만든 저수지가 이제는 카페촌의 명물이 되었다. 커피 한 잔 하고 가련다.
교통편 - 4호선 인덕원역 6번 출구 ~ (2번 출구 ~ 환승 마을버스: 05, 05-1, 06)
걷기 코스 - 인덕원터 ~ 임영대군 묘/사당 ~ 명상의 숲길 ~ 모락산 정상/모락산성 ~ 깃대봉 ~ 경일암터 ~ 능안고개 ~ 능안마을 ~ 백운호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이한성 동국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