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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아티스트 - 구자동]색다른 온기와 정감, 기존의 재현 뛰어넘다

구상화단의 활력, 리얼리즘의 본 고장 러시아서 5년간 기량 닦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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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88호 이재언 미술평론가⁄ 2014.07.24 11:24:23

▲구자동 작가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구자동(46)은 구상화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이다. 무언가 대상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재현 그 자체를 넘어선, 또 다른 부가 요소를 요구하는 잣대에 비교적 부합되는 작가로 소양을 갖췄다고 조심스럽게 소개하고 싶다.

작가는 이미 타고난 재능으로 인정을 받아온 터이다. 그랬던 작가가 리얼리즘의 본고장 러시아에서 5년간 최고 수준의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기량을 갈고 닦아 돌아왔다. 그러나 기량 면에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경지에 접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작가는 생생한 묘사력, 안정감과 조화가 돋보이는 색채감각, 화면의 조율 능력 등에서 나무랄 데 없는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작가의 등장이야말로 침체 일로에 처해 있다는 위기의식과 우려가 팽배해 있는 우리의 구상화단에 활력소가 될 만한 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하라와 체리, 72.7x60.6cm, Oil on canvas, 2014


작가의 화폭에서는 무언가 따스한 온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화면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도 결국은 색이나 필치에서 오는 물리적 조건이다. 그러나 관념적으로 유추해본다면 무엇보다 대상의 선정에 있어 작가 스스로가 갖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는 주관적 문제를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내면적 동기가 먼저 그림의 이면에 설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그의 경우 유난히 두드러진다.

▲체리, 27.3X53cm, Oil on canvas, 2013


사진을 능가하는 것 같은 지독한 재현적 묘사력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어떤 온기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인물화로 말하자면 대상들이 체온을 가진 것으로 느껴지는 무엇인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인물화는 대상의 체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 한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또한 어디서 본 듯한 선남선녀의 모습들을 잔잔하게 담아내고 있는 데서 포근한 정감을 느낄 수가 있다.

베나민이 말하는 아우라 와도 같은 것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인물들을 마치 스냅사진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반짝거리는 인화지에 새겨진 포토 이미지의 격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있는 아우라 일 것이다.

▲체리, 90.9x50.0cm, Oil on Canvas, 2013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자기만의 독특한 화면성의 조형적 툴을 설정하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조를 위한 모정의 틀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대체로 대상 인물에 비해 넓은 배경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 배경은 어떤 묵상의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음을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회화적 성숙도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관객이 작품에 경험적으로 참여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지이기도 하다.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듯 한 것, 어딘가 모르게 묽은 듯 한 톤의 처리는 바로 작가가 회화적 성숙도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체리, 53.0x45.5cm, Oil on canvas, 2013


관객이 작품에 경험적으로 참여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지이기도 하다.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듯 한 것, 어딘지 모르게 묽은 듯 한 톤의 처리는 바로 작가가 회화적 시야를 보다 넓게 가지면서 터득한 내용일 것이다.

묘사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작가가 보다 따듯한 휴머니즘의 산포를 위해 조율하고 정제한 결과라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더욱 과감한 화면상의 변화를 도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화면이 여전히 형태와 이미지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쉬운 대목으로 자각하고 있는 터이기에 말이다. 작가의 화면을 뵐플린이 기술하였다면 ‘조각적’이라 했을 법한 화면이다. 따라서 보다 ‘회화적’이기 위한 유연하고 리드미컬한 톤의 조절이 예상된다.


따듯한 휴머니즘의 조율과 정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은 역시 정밀하고 탄탄한 재현의 능력이라는 점이다. 재현의 능력 그것은 그저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따지고 보면 현대미술을 풍미한 많은 거장들에게 있어 사소해 보이는 요소들이 과장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작가들이 오랫동안 갈고 닦은 재현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리 눈높이가 높아졌다 하더라도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많은 비평이론가들이 재현능력은 그저 기교이기 이전에 가수의 목소리나 다름없는 조형의 주요한 요소이자 근간이다. 정말이지 오늘날 잘 그리는 작가들이 너무 많고 흔해서 재현의 능력 자체를 폄하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재현이 부당하게 폄하된다면 오히려 머지않아 재현의 능력은 퇴보하게 되고, 나아가 그것이 무형문화재로서 보존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체리, 33.4X45.5cm, Oil on canvas, 2013


오히려 작가는 자신의 재현능력 자체를 의식적으로 억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의 어떤 편견들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적절히 조절하고 억제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 또한 역량이 아닐까.

사실 내면의 문제로 진입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식적인 노력은 다름 아닌 ‘무기교의 기교’라는 우리의 전통적 미의식 명제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작가의 등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체리, 116.7x80cm, Oil on Canvas, 2013


작가의 타고난 재능에다 진지하고 성실한 창작 열정은 주변에 큰 기쁨을 주고 있다. 최근 작가 외에도 기량이 뛰어난 젊은 작가들이 가세한 우리의 구상화단은 보다 활력적인 미래를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진지한 우리 미술의 미래가 바로 그들의 필촉에 달려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 글·이재언 미술평론가 (정리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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