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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관점에서 본 추사체의 진면목, '토요일 오후, 인문학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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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왕진오⁄ 2014.07.23 17:12:51

▲김정희,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비각 현판 글씨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CNB=왕진오 기자) "모화(慕華)의 산물인가, 동아시아 서예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革新)인가"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 해서체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이상하고 둔탁해 보이는 글씨. 이 글씨는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함경도 북청 유배시절에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비각(碑閣) 현판에 쓴 글씨, 즉 추사체이다.

추사체는 중국 고래(古來)의 서체 등 김정희가 익힌 모든 서체를 최대한 아울러 담아낸 것으로 그의 학문적 깊이가 녹아 있는 서체이다. 그러나 김정희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양분된다.

“걸출한 절충론자”, “중국 서예 지상주의적 관점으로 조선의 서예를 비판한 자”로 보는 견해가 있는 반면, 추사체는 “동아시아 서예의 독자적 미학”이라는 견해도 있다.   

7월 26일 토요일 오후 2시,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리는 ‘토요일 오후, 인문학 정원’에서는 이동국 서예부장(예술의 전당)이 추사체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관점을 살펴본다.

▲이한철 필, '김정희 초상화'. 1857년, 보물 547호, 개인소장.(이미지=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중국에서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 고증학이 꽃을 피운다. 24세(1810년)가 되던 해, 김정희는 북경으로 사행길에 오르면서 청(淸)의 고증학을 접하게 되고 그 인연은 평생 동안 이어진다. 당시 중국에서 그에 대한 학문적 평가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19세기 중국 최고의 석학이었던 옹방강(翁方綱,1733∼1818)은 추사의 비범함에 “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 극찬한다. 그의 학문과 추사체는 뛰어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중국의 학자, 옹방강을 스승으로 모신 점, 여러 차례 사신과 역관을 통해 청나라 문사들과 교류한 점은 그가 모화주의자라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김정희는 단순한 모화주의자였을까? 아니면 중국과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서예 패러다임을 평정한 지식인이었을까? 7월의 ‘토요일 오후, 인문학 정원’에서는 김정희와 그의 추사체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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