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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큐레이터 다이어리]“어린아이 처럼 그리련다”

독보적인 수채화 작가 정우범 전시를 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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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89-390호 김재훈 선화랑 큐레이터⁄ 2014.08.04 14:36:01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정우범 선생은 독보적인 수채화 작가이다. 그는 수채화 고유의 투명성, 우연성을 절묘하게 작품에 표현한다. 그뿐만 아니라 유화보다 밀도가 낮다는 수채를 극복하는 기법과 도구를 직접 고안해 냈다.

그는 주로 대작을 그리는 것을 고집한다. 큰 작품은 보통 100호 이상으로 작품 한 변의 길이가 160cm 이상이다. ‘수채화로 큰 작품을 하기는 힘들다.’라는 한국미술계의 지배적인 생각에 맞서는 것도 그가 대작을 고집하는 이유로 한 몫하고 있다. 그의 손끝에 감각적 터치로 넓은 화면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작품은 감상자의 정신을 아찔하게 해놓는다.

필자는 올해 선화랑에서의 열릴 정우범 선생의 작품전 준비를 위해 작업실에 가보는 기회를 얻었다. 작업실은 서대문구청 맞은편 한 건물 3층에 꽤 넓게 자리하고 있다. 연한 핑크로 칠해진 작업실 입구의 철문이 투박하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평상이 눈에 보이고, 그 주변으로 작품과 액자를 놓을 수 있는 튼튼한 선반이 벽을 따라 둘러 있다.

공간 한쪽에는 방금 막 작업을 끝낸 80호 이상 크기의 ‘환타지아’ 작품이 든든해 보이는 이젤 위에 놓여 있었다. 환타지아는 환상적인 꽃의 향연을 보는 듯하다. “선생님, 새롭게 작업하신 거예요?” “응 그라지.”라고 선생은 정감 어린 전라도 사투리로 답했다. “반추상이지,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거니까. 난 꽃이 좋아서 전국과 외국을 섬으로, 들로, 바다로 죄다 돌아다녔어. 특히 작은 야생의 꽃들에 관심이 있지.”

환타지아는 정우범 선생의 독특한 감각적인 형과 색으로 꽃과 잎이 화면 가득 그려진 작품이다. 색은 종이의 결을 따라 부드럽게 번져나가기도, 거칠게 종이에 묻기도, 예리하게 긁혀 표현되기도 한다.

“잎은 꽃을 피우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 꽃을 돋보이게 하고··· 아주 멋지지. 잎은 생김새, 모양, 색등이 다양해, 보고 있으면 참 재미있지. 옛날에는 잎을 중요시 생각하지 않았어. 잎을 뺀 꽃 위주의 작품을 했는데, 잎의 중요성을 알았어. 그래서 최근에는 꽃과 잎을 함께 그려.”

▲정우범 작가 작업실. 사진 = 김재훈


2006년에 발행한 정우범 화집을 보면 2005년에 그려진 환타지아(Fantasia) 작품을 볼 수 있다. 그 작품에는 어두운 배경에 극적으로 강렬한 원색의 가지가지 꽃들이 그려져 있다. “색이 매우 다양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어요.”라고 필자가 말하자.

“일제강점기에 큰 형님께선 전주사범을 나오셔서 교편을 잡으셨고, 수학여행으로 일본에 자주 가셨는데, 당시 일본에서 꼭 사온 것이 컬러로 만들어진 책이야. 내가 초등학교 때인가, 우리나라에는 순 흑백 출판물밖에 없었지. 종이도 질이 좋지 않고, 근데, 일본에서 가져온 책, 종이가 반질반질하면서 색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 책에는 자동차, 꽃, 그림 등의 사진이 있었어. 특히, 일본 시골에 감나무가 있는데, 감을 따서 먹지 않고 그대로 놔두어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 인상적이었어. 일찍이 컬러인쇄가 된 책을 본 나는 어릴 적에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색에 대한 감각을 빨리 키울 수 있었어. 또한, 아버지께서 산골의 훈장으로 계셨지. 그래서 어려서부터 나는 지필묵을 끼고 살았던 거야.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매일 그림 그리며 놀던 것이지.”

선생은 일찍이 먹의 농담을 느끼며 그림을 그렸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그러므로 종이와 물의 특성을 어릴 적에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생은 “당시 족보를 찢어 거기에 그림을 그렸어. 아버지께 엄청나게 혼이 났던 적이 있지”라며 잊지 못할 일화도 들려주었다.

정우범 선생은 한 작가의 화실에 들어가서 배운 적이 있는데, 매일 같은 석고상만 데생하는 것이 자신과도 맞지 않았다고 한다. “보이는 그대로 스케치하고 예쁜 색으로 칠하는 그림을 보고 이 사람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 이렇게 며칠 못 지냈다고 하며, “내 마음대로 그려야지”라는 마음을 먹고 화실에서 나왔다고 한다.

▲정우범, Fantasia, 250x124cm, Aqua, Acryl, Arches, 2014


꽃만 고집하다 잎까지 그리는 이유는?

“나 혼자서 연필, 먹, 붓으로 모든 것을 그리기 시작했어. 소묘만 했어. 소묘를 많이 하면 제일 중요한 힘이 생기는데, 바로 변형력이야. 다양하게 모양 형과 색을 바꿀 수 있어. 내가 자유분방한 변형이 이루어지도록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또 한 가지는 소묘를 많이 했다는 점이야” 이처럼 어린아이처럼 자유롭고 무궁무진변화를 작품에 표현하는 수채화 작가가 정우범이다.
 
정우범 선생은 1991년 고베 산찌카 화랑에서 ‘한국청년작가 10인전’을 시작으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1992년, 올란도 시장의 초대로 올란도 시티 갤러리에서 ‘제주해경’, ‘가을꽃’ 등 20점을 전시해 동양인 처음으로 1994년에는 워싱턴 미셀갤러리에 초대되어 전시하였으며, 전속작가의 제의를 받아 현재까지 전속작가이다.

국내외 손꼽힌 전시에서 두각을 나타낸 정우범 선생은 1997년 선화랑 초대전을 계기로 더욱 수채화 작가로의 위상을 탄탄하게 굳혔다.

2000년, 서울 연희동 작업실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올해 열릴 정우범 작품전은 선화랑에서 9년 만에 열리는 전시이다. 선생은 많은 수채화 수작들을 남겨오고 있다. 금번 전시는 좀 더 깊이 있는 작품, 특히 아크릴과 함께 혼용되는 그림이 출품되어 기대를 모을 것이라고 믿는다.

- 김재훈 선화랑 큐레이터 (정리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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