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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인 필자에게, 어느 누가 어떤 상황에서 집필이 제일 잘되느냐고 묻는다. 필자는 ‘집필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에서’라고 대답한다. 예고도 없이 울리는 전화벨, 수취인 본인에게 기어코 쥐어주겠다며 현관문을 열심히 두드리는 등기우편 배달부, 심지어는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빗소리, 덜 잠긴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열린 창문으로 허락 없이 들어와 책장을 때리며 노는 바람, 짜증나게 앵앵거리는 모기 한 마리 등도 없는 환경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말에게 당근을 제공하듯, 좋은 환경을 제공하면 신이 나서 잘 달릴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골프는 언제 제일 잘될까. ‘골프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일까. 프로골퍼 박세리 선수는 ‘몸이 나른하고 졸릴 때’ 공이 잘 맞는다고 했다. 그리고 필자가 잘 아는, 한때는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나이든 한 골퍼는 “시합 전날 숙면을 취할 수 있다면…”이라며 말끝을 흐리기도 했다.
지인이 이러저러한 피하지 못할 까닭으로 시합 전날 밤을 거의 샜다. 18홀을 완주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며 비몽사몽 겨루었는데, 의외로 좋은 점수를 얻어서 챔피언 조에 편성됐다. 다음날엔 전날 못잔 잠과 다음날의 휴식까지 당겨서 취하고 라운드에 임했지만, 그는 무참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전날은 최악의 육체적 조건으로도 챔피언 조에 들 만한 성적을 냈는데, 다음날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생의 최고기록을 내 보겠다는 욕심이 컸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몸이 나른하고 졸릴 때’ 공이 잘 맞을까? 따지고 보면 나른하고 졸리는 신체의 상태는 어쩌면 공을 잘 치겠다는 욕심을 버린, 몸의 긴장이 오히려 풀린 상태랄 수 있다. 그렇게 부담 없이 유유자적 노닐다보면 가끔은 좋은 기록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여태껏 치른 라운드 중에서 육체적인 연습과 정신적인 휴식이 충분했던 라운드와, 나른하고 졸린 채로 돌았던 18홀을 모두 비교 분석한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면 집필이 잘 될까? 대개는 방해요인이 적은 한밤중이 낮보다는 글발이 잘 받고, 24시간 가사와 집필을 병행해야하는 집에서보다는 도서관이나 따로 마련된 집필실에서 글발이 잘 선다.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중독자였다. 도박은 그를 극한의 빈곤 속으로 몰아넣었고, 빚에 쪼들려 출판사와 무리한 계약을 맺었다. 그가 마감시각에 쫓겨 구술필기식으로 집필한 작품 중에 ‘죄와 벌’, ‘도박꾼’ 등의 걸작이 탄생했다.
작가들은 대체로 약속한 마감시각까지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빈둥거리곤 한다. 아무리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줘도 집필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감시각의 시계발자국 소리가 뒷목을 콱 쥐어 잡는 느낌이 오면, 그때서야 보이지 않는 손이 작가의 손을 이끌어서 원고지 칸을 열심히 글자로 메운다.
지난 2005년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췌장암에 걸려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으나, 극적으로 회생한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 한다.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미련할 정도로 자기 길을 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충고했다.
잡스의 말이 맞다. 헝그리 정신은 행동을 이끌어내는 채찍이다. 각고로 연습하고, 오늘의 게임이 인생의 마지막 게임인양 최선을 다한다면, 오늘이 ‘골프가 제일 잘되는 날’이 되지 않을까?
- 김영두 골프칼럼니스트협회 이사 (소설가) (정리 = 이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