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 진각국사 입적한 창성사 터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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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華城)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옆 언덕에는 아담한 전각이 있고 그 안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이름 하여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인데 원명은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彰聖寺 眞覺國師 大覺圓照塔碑)라는 긴 이름이다. 보물 14호로 지정된 만만치 않은 비석이다. 본래는 광교산 기슭 창성사지에 서 있던 비석인데 연고가 없는 화성으로 옮겨 온 것은 아마도 훼손을 염려하여 그런 것 같다.
나의 친구 방태산 선생은 수원 사람인데 산 좋아하고 답사 좋아하여 곳곳을 다닌다. 특히 수원의 산은 샅샅이 다니는 사람이다. 방태산이란 이름은 본명은 아니고 산을 좋아하다 보니 20년 전 아예 방태산 골짜기에 오막살이 하나 세우고 여름 한 철은 그곳에 가서 살다가 오기에 예명이 방태산이 되었다. 그는 벌써 몇 번째 창성사지를 찾아 나섰다가 못 찾고 돌아왔다.
수원사람 산꾼으로 광교산에 있는 절터 하나 찾지 못한 그로서는 자존심이 상한듯하다. 예명을 광교산으로 붙여 줄 것을 그랬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등산개략도 이외에는 광교산 어디에도 창성사지를 알리는 안내판이나 아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방태산 선생과 함께 창성사지 답사에 나서기로 한다. 기왕이면 광교산과 백운산을 이어 산행을 하면서 창성사지, 미학사지(美鶴寺址), 백운사지(白雲寺址)를 거치기로 한다.
필자는 수원역 4번 출구를 나와 13번 시내버스로 환승한다. 버스는 수원 시내 팔달문 장안문을 지나 광교산 상광교로 향한다. 도중 장안문에서 잠시 내려 화성 방화수류정 위 언덕 진각국사탑비를 다시 살펴본다.
‘국사님 이제 당신이 만년을 지냈던 그 절터를 찾아 갑니다. 언젠가는 이 비석이 제 자리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라며 오늘은 우리만 절터로 갑니다’.
버스정류장으로 다시 내려와 13번 종점 상광교로 향한다. 경기대학행 버스를 이용하는 이들은 대학 후문 쪽에서 환승하면 같은 코스를 향할 수 있다.
상광교 종점은 쾌적하게 정비되어 있다. ‘다슬기화장실’이라는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남쪽 등산로 입구에 있는 ‘반딧불이화장실’과 함께 화장실 문화를 대표할 만한 화장실이다. 산행길 화장실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곳만 하여라’ (加也勿 減夜勿 但願長似是所)
화장실 옆쪽 길로 50m 올라가면 아담한 절이 하나 나타난다. 신기하게도 절집 문에는 ‘광교산창성사(光敎山彰聖寺)’라고 이름을 붙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절 이름은 법성사(法性寺)였다. 오늘 찾아가려는 산기슭 창성사지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절은 작은데 아담하다. 마당에는 아쉽게도 제 짝을 잃어버린 오층석탑을 여러 부재를 모아 다시 세워 놓았고 한편으로는 부재들을 망실한 항아리형 부도(浮屠) 한 기가 놓여 있다.
어느 스님의 흔적이었을까? 16개의 희미한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미어진 글씨는 어렴풋이 ‘天啓五年 乙丑三月 日 門人法然OOO 門O后 大師OOO’라고 써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천계는 명나라 희종(喜宗)의 연호인데 이때는 조선 인조 3년(1625년)에 해당한다. 법명은 지워져 알 수 없는 스승(大師)이 열반하자 제자 법연이 스승의 부도를 세웠다. 이들은 모두 잊혀졌고 몇 개의 지워진 글자로만 남았다.
절 주위 밭에는 많은 기와편과 자기편들이 아직도 이곳이 옛 절터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지금 창성사라 이름 붙인 절이 있기 전 이름을 알 수 없는 고려시대 절터였음을 생생히 말하고 있다. 주위 밭뿐만 아니라 이미 모두 파헤친 버스종점 부근과 사유지 주차장 주변을 살펴도 세월에 씻긴 공깃돌만한 기와편들이 보인다.
밭 한 쪽에는 자연암반을 배열한 큰 초석들도 눈에 띈다. 그렝이공법(자연암반을 그대로 살려 초석으로 쓰는 공법인데 기둥의 높이를 조정하고 암반과 맞물리는 곳에 암반에 맞게 요철을 파서 기둥을 세우는 전통기법)으로 건물을 지었던 것이다. 종루 자리라고도 하는데 아름다웠을 것이다.
“창성사지는 비석 있는 자리 아닌 창성사(법성사) 주변”
지난 해 ‘文化史學’ 誌에는 엄기표(嚴基杓) 교수의 글이 올라 왔는데 필자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글이었다. 요지는 수원 창성사지를 진각국사비가 서 있던 광교산 기슭이 아니라 현재 13번 버스종점 주변 현 창성사(과거 법성사) 주변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주장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 쉽게 비석이 서 있던 절터를 창성사지로 단정한 면이 있다. 그것은 주변 지리적 위치나 고승(高僧)들의 열반 전에 머무는 곳(下山所)와 암자, 그리고 열반 후 승탑이나 탑비가 세워지는 장소를 편협하게 해석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현재 13번 종점(현 창성사 주변)은 말굽형으로 둘러싸인 광교산 골짜기의 자궁(子宮)과 같은 위치이다. 말을 그대로 믿을 수야 없지만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에 기록한 ‘옛말에 광교산에는 89개 암자가 세워졌다(光敎山 舊說山中刱八十九菴)’란 말의 취지를 따른다면 당연히 암자들은 본사(本寺)를 중심으로 주변에 자리 잡게 된다. 지금의 가야산 해인사, 덕숭산 수덕사, 조계산 송광사만 보아도 사정을 어림할 수 있다. 아마도 옛 창성사는 13번 종점 주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야 암자들이 주위에 자리할 수 있다.
또한 우리 시대의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이 그러하듯 큰 어른스님들은 본절에 자리잡지 않고 산중암자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았다. 진각국사도 아마 창성사 암자 중 하나였던 종루봉 기슭 암자(현 창성사지로 단정하는 곳)에 자리 잡았다가 열반한 것은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이 분들이 열반하면 그 부도와 탑비는 본절에 세워지기보다는 그들과 관계 깊었던 암자나 그들의 일생 중 인연이 깊었던 절에 세워지게 된다. 16국사를 배출했던 승보사찰 송광사도 이들 국사들의 부도나 비석은 암자나 다른 절에 세워졌다. 북한산 삼천사에 가도 대지국사탑비는 본절 자리가 아닌 윗절에 모셔졌고, 태고 보우의 부도나 비석도 5군데에 나뉘어 세워졌다.
동국여지승람 수원도호부 불우조(佛宇條)에는 수원에 3개의 절이 소개되어 있다. 지금은 화성시가 된 무봉산 만의사(萬義寺), 광교산 창성사(彰聖寺), 그리고 시내인 도호부 객사 남쪽에 있는 반룡사(盤龍寺)이다.
한편 태종 실록에는(7년 1407년)에는 수원을 대표하는 절(資福寺)로 창성사를 정하였으니 이 지역 대표 사찰이 창성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길도 외진 곳의 규모 작은 절보다는 지역 중심지 넓은 곳의 절이 적당할 것이다.
발굴자료나 연구가 부족한 현재로서는 무어라 단정할 수는 없는데 엄 교수의 추정대로 현 창성사 주변이 고려시대 창성사 터로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진각국사 비에 적힌 홍무(명 태조 주원장의 연호) 19년
이제 진각국사비가 서 있던 절터를 찾아 가자. 버스 종점에서 잠시 찻길로 내려오면 좌측으로 ‘폭포농원’이란 음식점이 있다. 음식점 안을 통과하여 개울에 놓인 간이다리를 건너면 잘 다듬어진 등산로가 이어진다. 몇 번 이 음식점을 지나갔는데 한 번도 다시 상광교동으로 하산하는 일이 없어 이 음식점 손님이 되어주질 못했으니 ‘나중 들리겠다’ 한 말은 지금껏 공수표가 되었다.
오르는 산행길 옆으로는 평탄지가 이어져 있다. 발밑에는 기와편과 도기, 자기편이 이어서 밟힌다. 절터임이 분명하다. 수원군읍지 말대로 89개 암자는 아니더라도 많은 암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 등산로가 좌우로 갈라진다. 우측 길을 택하자. 곧 능선길에 닿는다. 이 능선길은 종점 전정류장(새마을주택)에서 내려 광교마을길(광교산로 518번길)로 오르는 능선길이다.
이 길을 택하여 오르면 비교적 긴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오르는 능선길 바닥에는 간간히 검은 색 케이블선이 드러나 있다. 용도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통신선으로 쓰이던 선 같다. 잠시 오르다 보면 드러난 케이블선이 끝나는 지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등산로는 좌측으로 평탄하게 가지를 치고 있다. 이 좌측 등산로로 대략 500m 비스듬히 오르면 진각국사비가 서 있던 창성사지(상광교동 산41)에 이른다. 비로소 이제야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사지는 남쪽을 바라보며 약간 서쪽으로 비꼈는데 3단의 축대가 잘 보존되어 있다. 샘물자리도 3군데나 되는데 샘을 덮은 석재(石材)는 아쉽게도 그 옛날 탑의 재료였던 것 같다. 광교산 너머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용인의 자복사였던 서봉사(瑞峰寺)터와 비교하면 한 지역을 대표하는 자복사(資福寺)로서 이 절터는 많이 왜소하며 암자로 치면 규모 있는 암자인 셈이다.
고려 말 1382년(우왕 8년) 6월 16일 여름 진각국사 천희(眞覺國師 千熙)는 창성사에서 입적하였다. 고려 말을 대표하는 국사가 하산소(下山所)로 창성사를 정하고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입적하였다면 당시로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대찰이었던 것이다. 진각국사가 입적하자 우왕은 당대 대문장가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비문(碑文)을 짓게 한다. 비문이 완성되자 대사의 문도들은 1386년 1월 이곳에 대사의 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碑)가 바로 화성 방화수류정 옆 언덕에 있는 진각국사비인 것이다. 이 비에는 국사의 일생 행장이 기록되어 있다.
국사의 일생에 대한 기록과 함께 흥미를 끄는 것은 비석의 건립시기를 기록한 홍무 19년(1386년, 우왕 12년)이란 연호이다. 홍무(洪武)는 명 태조 주원장의 연호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년) 2년 전이다. 홍건적이라는 도둑떼 괴수가 세운 나라 명(明)은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중국 영토 밖으로 몰아냈는데 중국 영토 밖 몽골 땅에서 원나라는 북원(北元)이란 이름으로 후금 누루하치에게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이런 변동의 시기에 국사의 비명에 적힌 명나라 연호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힘센 자에게 순종함이 삶의 법칙인가 보다. 불가(佛家)도 여기에서는 예외일 수 없었던 것인가.
광교산 비로봉(종루봉) 팔각정에 걸린 편액
비석에 기록된 긴 내용은 약하고 큰 줄거리만 택하면, 국사는 경상북도 흥해(興海:지금의 포항시 북구)에서 태어나 13세에 반룡사(盤龍寺)로 출가하였다. 19세에 승과에 합격하였고 김생사, 덕천사, 부인사, 개태사 등 10여 사찰에서 수행하였다. 58세에는 중국유학길에 올라 성안사(聖安寺) 만봉화상으로부터 가사(袈裟)와 선봉(禪棒)을 전해 받고 귀국하였다. 61세에는 공민왕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추대되었고 66세가 되는 공민왕 21년(1372년)부터는 부석사(浮石寺)에 주석하면서 퇴락한 부석사 복구에 온 힘을 쏟았다.
무량수전을 수리할 때는 1376년(고려 우왕 2년)의 묵서명(墨書銘)이 나왔고 조사당에서는 1377년(우왕 3년) 묵서명이 나왔으니 이 시기는 국사가 부석사를 대대적으로 복구하던 시기였다. 선대의 원융국사가 이루어 놓은 기반이 퇴락해지자 국사는 대대적 불사를 행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부석사에서 만나는 많은 유적은 아마도 진각국사 천희 화상의 손길이 미친 것이리라.
한편 진각국사 천희의 흔적은 오히려 그의 고향 흥해에 많이 남아 있다 한다. 진각국사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무덤이 흥해 양백리 마을 뒷산에 남아 있다 하며 옛 재실과 사당도 남아 있고 속가(俗家)의 성(姓) 배(裵)씨 가문에서 새로 세운 사당도 남아 있다 한다. 대사가 국사로 승격하자 고향땅 흥해 땅은 지군사(知郡事)로 행정단위가 승격하였다. 이는 고을의 영광이자 가문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의 창성사는 은둔의 절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자주 찾았던 절이었던 것 같다. 훈민정음이 반포되던 해인 1446년(세종 28년) 겨울에는 강희맹(姜希孟) 선생이 친구 김겸광 등과 광교산 창성사를 찾아 글을 읽었다(讀書於光敎山昌盛寺)는 기록이 선생의 문집 사숙재집(私淑齋集)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선비들이 찾아와 책 읽는 절로서의 기능도 충분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절에 들어가 책 읽으며 심신을 편안히 하는 일이 많았다.
둔촌동(遁村洞)이라는 지명을 남긴 고려 말 문신 이집(李集) 선생도 그의 문집 둔촌잡영(遁村雜詠: 보물 1218호)에서 규헌(葵軒) 오방우(吳邦祐)를 창성사로 찾아 갔는데 권주(權鑄)는 만나지 못했다(訪葵軒於彰聖寺不遇權鑄 )는 칠언배율(七言排律)의 시를 남기고 있다. 오방우나 권주는 고려 말 문신들인데 아마도 창성사에 머물고 있었던 듯하다.
이제 절터를 뒤로 하고 갈려 나왔던 능선길 등산로로 되돌아온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능선길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이 능선길 끝은 비로봉(毘盧峰)이다. 일명 종루봉(鐘樓峰)인데 수원군읍지에는 ‘종루가 광교산에 있다(鐘樓 在光敎山)’에 있다 했으니 민간에 전해지기를 이 봉우리에 종루가 지어졌고 삼천대천세계에 불음을 전하는 종이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종루는 이름만 종루봉으로 남았는데 근래에 세운 팔각정이 그나마 서운한 마음을 달래준다. 팔각정 안에는 누군가가 써 놓았다.
‘山中好友林間鳥 世外淸音石上泉 (산 속 좋은 친구는 숲 속 새요, 세상 밖 맑은 소리는 돌 위로 떨어지는 샘물이라네)’ 얼쑤~추임새 한 번 넣고 봉우리를 내려온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종루봉에서 우측 양지재 방향으로 100m 내려가 보자. 거기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장수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 전라병사 김준용 장군의 전승지임을 기록한 암각이 있다.
정조 때 화성 건설을 총지휘하던 번암 채제공 선생이 전승사실을 알고 기록케 한 글이다. 때는 병자호란 시점이었다. 임금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8도에서 근왕병이 밀어 닥쳤다. 전라근왕병은 감사 이시방, 병사 김준용이 이끄는 6000명과 승통 각성이 이끄는 2000명이었다. 전라병사 김준용 장군은 병사 2000을 이끌고 광교산에 진을 쳤는데 누루하치의 사위 양고리(楊古利) 등 3명의 적장을 전사시켰다. 이 때 일은 1637년 1월 5일자 실록에도 그 기록이 있다. (全羅兵使金俊龍, 領兵入援軍光敎山, 馳啓戰勝前進之狀) (상세한 내용은 졸고 옛절터 가는 길 25 참조)
종루봉에서 내려가는 길엔 병자호란 때 전승지 알리는 암각
이제 길을 북으로 잡아 종루봉을 우회하면 나타나는 고개, 토끼재에 이른다. 이곳에서 좌로 내려가면 출발지 상광교 버스종점으로 향하는 길이다. 많은 이들이 광교산 등산 후 하산코스로 사랑하는 길이다. 이곳에서 광교산 최고봉 시루봉(582m)까지는 1km의 평탄한 오르막 흙길이다. 가는 길에는 수원둘레길 안내판이 서 있다. 광교산 주능선은 수원을 걷는 둘레길의 주요구간이다. 잠시 후 시루봉 갈림길에 이른다. 우측 시루봉까지는 미처 100m가 되지 않는 가까운 길이다. 정상에는 ‘광교산(光敎山) 582m’라고 쓴 정상석이 서 있다.
경기도 지명유래집(地名由來集)에는 ‘먼 옛날 수도를 많이 한 도사가 이 산에 머무르면서 제자들을 올바르게 가르쳐서 후세에 빛이 되었다고 해서 광교산이라 하였다.’ 했다. 민간에 전해지기는 고려 태조 왕건이 광악산(光岳山)을 광교산(光敎山)으로 고쳤다 한다.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에도 광교산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광교산으로 불리던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교산은 예전에도 상당히 숲이 우거지고 깊었던 모양이다. 성종실록(1473년, 성종4년)에는 광교산 도둑들이 관군에게 항거했는데 이들을 퇴치하지 못하여 장수를 보내 추포(追捕)토록 하라는 왕명이 기록돼 있다. 살기 어려운 백성들이 이 산으로 들어와 도둑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종 13년에도 종적이 수상한 자가 광교산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으니 아 광교산은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춥고 배고픈 백성이 도둑 되어 의지한 품속 같은 산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상 시루봉은 광교산만의 봉우리 이름은 아니다. 전국에 많은 시루봉이 있다. 우리 옛말에 산이나 봉우리를 뜻하는 말에 살(맞춤법은 ㅅㆍㄹ)이라는 말이 있었다 한다. 이것이 변하여 된 말이 수리, 시리, 시루, 솔, 술 등이라 한다. 북한산이나 황장산의 수리봉, 지리산의 왕시리봉, 전국에 무수히 많은 시루봉, 대암산의 솔봉 등은 모두 같은 말이라 한다. 이런 말들이 한자로 표현되면서 수리는 鷲(취)로, 시루는 甑(증)으로, 솔은 松(송)으로 변신을 했으니 鷲 자가 붙은 산에는 수리나 독수리의 전설이 생겨나고, 甑 자가 붙은 산은 시루 모양의 산이라는 엉뚱한 해설도 붙었다. 松도 예외는 아니어서 있지도 않은 소나무가 등장하기도 한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런 말에 넘어가기 십상이다.
모처럼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시루봉을 떠난다. 시루봉 갈림길에서 노루목까지는 400m, 억새밭까지는 1.1km의 평탄한 길이다. (계속)
- 교통편
수원역 4번 출구 ~ 13번 시내버스 환승 ~ 종점 상광교 하차
다른 지역에서 출발할 경우 수원시내 구간에서 13번 환승
- 걷기 코스
상광교 버스종점 ~ 창성사 ~ 옛창성사지 ~ 종루봉(비로봉) ~김준용장관 승전지암각 ~ 광교산(시루봉) ~ 억새밭 ~ 미학사지(절터약수터) ~ 백운산 ~ 옛백운사지 ~ 백운사 ~ 마을버스 정류장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이한성 동국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