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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57)]수리산길: 대야미 ~ 수리사 ~ 최경환 성지

천년의 절터 주변 기와편, 천주교박해 눈물 서려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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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01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4.10.23 09:16:36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4호선 전철은 수리산역을 지나자 이내 대야미(大夜味)역에 닿는다. 흔히 수리산(修理山)을 오를 때는 접근성이 좋은 수리산역을 이용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의 답사길은 한적한 시골마을에 숨어 있는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東萊君派 宗宅)을 들려 가는 길로 잡는다.

대야미역 2번 출구를 나오면 코스모스가 바람에 한들거리는 한적한 도로를 만난다. 한순간 먼 시골역에 내렸나 하는 착각이 든다. 햇빛도 맑고 공기도 쾌적하다. 코스모스 보도(步道)를 따라 좌측길로 잠시 걸어 내려가면 ‘군포 수릿길’ 팻말이 보이고 도로표지판은 우측길이 동래정씨 종택으로 가는 방향임을 알리고 있다.

큰 도로를 버리고 앞쪽 초등학교 앞쪽 작은 길로 들어서면 둔대초등학교 예쁜 교정이 보인다. 좌측(서쪽) 시골포장길로 나아가니 작은 건물에서 흥겨운 농악소리가 들려 나온다.

에이여라~ 방아~ 오호 (후렴: 에이여라~ 방아~오오)
한톨 심어 가꾼농사 (후렴) / 만곡중에 열매맺어 (후렴)
신비로운 이농사는 (후렴) / 우리들의 일이로다 (후렴)
여보시오 농군님네 (후렴) / 이내말씀 들어보소 (후렴)
한섬지기 논배미가 (후렴) / 반달만큼 남았구려 (후렴)

이것이 둔대농삿소리구나. 이곳 둔대동 지역에는 사라져 가는 이 지역 농요를 보존하고 있다. 가사 중에는 ‘한섬지기 논배미’라는 구절이 들린다.

예전 숫자에 밝지 않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논의 넓이를 말할 때 한 마지기, 두 마지기, 한 섬지기, 두 섬지기(한자로 斗落)처럼 썼다. 시간 기준으로 셈하면 아침나절 갈면 되는 땅은 아침갈이(朝耕), 하루 품이면 하루갈이(日耕)라 했다. 그도 저도 아니게 논둑 기준으로 퉁쳐서 논둑 하나로 묶은 논을 ‘배미’라고 했는데 큰 배미의 논을 ‘한배미’ 논이라 했다.

▲갈치저수지


이 한배미를 구차하게 한자(漢字)로 옮기려니 ‘한’은 ‘크다’이니 대(大)라 썼고 배미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그 뜻을 알 수 없으니 아마도 ‘배미’는 ‘뱀이’<-- ‘밤이’겠지 이렇게 머리를 써서 밤 야(夜)자로 썼으니 야미(夜味)가 되었다.

그래서 ‘한배미’는 졸지에 근본없는 지명 대야미(大夜味)가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배미를 뱀 사(蛇)로 쓰지 않은 게 다행이다. 사미(蛇味, 蛇尾)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섬짓했겠는가. 이 넌센스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새만금에 ‘한배미섬’은 대야미도가 되고 ‘작은배미섬’은 소야미도가 되었다. 전국에는 이렇게 야미(夜味)가 된 지명이 산재한다. 이제라도 대야미역이 ‘한배미역’이 되면 아름답지 않을까.


정승 13명 배출한 동래군파 종택, 역장(倒葬)의 대표적 형태

잠시 후 차도(속달로)를 만나 동래정씨 종택 방향 길로 접어들면 이내 갈치저수지를 만난다. 한적하고 깔끔한 저수지가 펼쳐진다. 그런데 저수지 이름치고는 특이하다. 갈치처럼 형상이 구불구불한 것도 아니고, 갈치음식과도 관련이 없다. 안내판에 한자(漢字) 한 자 적혀 있으면 좋았을 것을. 나름대로 상상하며 저수지길을 지난다. 고개에 칡이 많아 갈치(葛峙)이거나, 아니면 예전에 갈대가 무성해서 갈치(蘆峙)이겠지.

▲동래정씨 묘역


저수지 북단(北端)에서 우측길(속달로 110번지길)로 100여m 들어가면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이 있다. 앞 언덕에 영면한 동래부원군 정난종(鄭蘭宗) 선생의 장남 정광보(鄭光輔:1457~1524년) 선생이 입향하면서 종택이 자리잡게 되었다 한다. 안채, 2개의 사랑채, 광, 사당, 마방 이렇게 6채의 건물로 지어진 견실한 살림집이다.

지금도 종가댁 둘째 아드님 내외가 사시는 집이다. 서울에서 공부도 하고 고향으로 오신 분이라서 고택, 역사, 세상사에 지식도 풍부한 분들이시다. 툇마루에 앉아 한 나절 옛이야기 나누면 세상 시름을 잊을 수 있게 하는 작은 아버님 내외 같은 분들이시다.

욕심도 내려놓은 후손들이라서 종택과 부속 토지 모두를 한국문화신탁에 기부하였다. 우리 시대 명문가 후예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일 듯하다. 이곳에 들르시거든 집만 보지 말고 말씀도 한 마디 나누고 오시기를 권한다.

대문을 나서면 앞산 자락에 동래군파 옛분들이 영면한 묘소가 있다. 마을길로 해서 그 곳으로 간다. 입구에는 사당인 성달재(省達齋)가 있다. 묘역에는 몇몇 기(基)의 묘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동래군파의 중시조인 동래부원군 정난종(鄭蘭宗) 선생의 묘가 맨 앞줄에 자리하고 있다.

그 뒤로는 큰 아드님 광보(光輔), 그 뒤에 작은 아드님 영의정 광필(光弼) 선생의 묘소가 있고 다시 뒤로는 광필 선생의 아들 복겸, 또 그 뒤에 복겸의 아들 유신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른바 풍수(風水)하는 이들이 난장(亂葬)이라고 꺼린다는 역장(逆葬, 倒葬)의 대표적 형태인 것이다. 그런데 이 동래군파에서 13명의 정승이 나왔으니 풍수 공부하는 이들의 딜레마(dilemma)가 되었다.

▲최경환 성지


역장(逆葬)의 사례는 예학의 종조 사계 김장생 선생도, 명유 율곡 선생댁 묘소에서도 보이니 반드시 조상이 맨 뒷줄에 묻혀야 한다는 생각도 앎이 부족해서 생긴 생각의 틀인가 보다. 어떤 이는 그 곳이 도장(刀藏: 보검이 칼집에 든 모양)의 명당이라 그렇다고 하던데 설명이 몹시 궁색하구나.

또한 이 묘소에는 눈여겨 볼 두 개의 신도비가 있다. 정난종 선생의 묘비는 정암 조광조를 탄핵했다가 후에 사림파 세력이 강해지자 또한 보복당한 훈구파 남곤(南袞)이 지은 비문이다. 그는 글로 일세(一世)에 알려진 사람인데 또한 철저히 흔적이 지워진 사람이다. 사림파가 득세한 조선조 내내 그가 설 땅은 없었다. 또 하나의 비명(碑銘)은 차남 광필(光弼) 선생의 비인데 소세양이 글을 짓고 퇴계 이황이 글씨를 썼으니 대학자의 글씨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이제 묘소를 뒤로 하고 다시 갈치저수지로 돌아온다. 저수지 북쪽 길을 따라 돌면 덕고개에 도착한다. 이 곳 덕고개에서는 우측으로 수리산으로 이어지는 임도길이 시작된다. 길은 평탄하고 아름답다. 노약자라도 걷기에 좋은 넓은 숲길이다. 이 길 2.15km 즐겁게 걸어 도착한 곳이 임도5거리이다.

우리가 온 임도길, 용진사로 가는 길, 수리산역 가는 길, 슬기봉(瑟基峰) 오르는 길, 수리사(修理寺)로 가는 길이 나뉘어지는 이른바 교통의 요충지이다. 쉼터도 있으니 참시 쉬어가자.

▲수리사


수리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평탄한 임도길이다. 갈림길까지는 1.47km라고 안내판이 알려 준다. 갈림길에 도착하면 수리사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수와 만나고 이내 500여m 오르면 푸른 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수리사가 나타난다.

구전으로는 신라 때 절이라 하는데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리사가 ‘수리산에 있다(在修理山)’ 했으니 적어도 조선 초에는 이미 창건되었고 지금도 절터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들은 적어도 고려 때에는 이곳에 자리했던 절임을 짐작케 한다.

성종의 5세손(五世孫)으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수리산 남녘에 낙향해 농사짓고 살던 옥담(玉潭) 이응회(李應禧:1579~1651)는 수리사를 자주 찾은 듯하다. 어느 해 초여름 그는 이곳에 와서 칠언절구 한 수를 읊었다.

扶笻攝屩上招提 (죽장 짚고 짚신 신고 가람에 올라)
喜見禪堂綠樹低 (푸른 나무 밑 불당을 기쁘게 보지)
山鳥亦知琴酒樂 (산새도 술과 음악 즐거움 아는지)
晴林終日和相啼 (맑은 숲에서 종일토록 화답하며 짹짹)

임진란 후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곳에서 절을 재건하고 만년을 마음 닦으며 있었다는 입소문도 전해진다. 1931년 발행된 석문의범(釋門儀範)에는 용주사 말사로 견불산 수리사(見佛山 修理寺: 수원군 반월면 속달리 329)가 등재되어 있으니 수리사의 법등은 힘들었던 조선말에도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한국전쟁으로 수리사는 빈터만 남고 사라져 버렸다. 다행히 불탄 빈터에 다시 가람을 이루어 법등을 밝히고 있다. 5층 석탑도 있었다고 하건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이 작지 않았던 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옛 수리사의 흔적


이제 수리산 등정을 위해 좌측으로 등성이 길을 오른다. 등성이 길에도 여기저기 기와편이 흩어져 있다. 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줄기이다. 능선에 오르면 아쉽게도 철 펜스가 둘러져 있다. 펜스를 좌로 끼고 능선길을 간다.

펜스 안 쪽에는 원당사지(元堂寺址: 상록구 수암동 산13)가 있다.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범우고에는 원당사의 기록이 전해진다. 석탑도 있고 석불도 있다고 한다. 이제는 국가시설물이 있어 출입이 막혀 있다. 석탑과 석불은 잘 있는지 모르겠다.

잠시 후 수암봉갈림길에 닿는다. 수암봉까지 1.77km 라고 이정표는 알려 준다. 수암봉 아래에는 용화약수터가 있는데 그 곳은 이제는 사라진 수암사터이다. 그 약수는 수암사의 샘물이었는데 절은 없어지고 절터도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수암사는 산봉우리에 수암봉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으니 영영 잊혀진 것은 아니다.


푸른 산 등지고 자리잡은 수리사, 신라 때 창건 기록

수리산은 4개의 봉우리로 이어진 산이다. 안산 쪽 수암봉에서 산줄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수암봉 갈림길에 닿고 이어서 동으로 능선길 잡아 슬기봉을 지나고 다시 북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을 타면 수리산 정상 태을봉(太乙峰)에 닿는다. 여기에서 북쪽 너머에 관모봉이 있으니 이 4 봉우리를 이어 걷는 것이 진정한 수리산 종주길이다. 아쉽게도 오늘은 수리사에서 슬기봉~태을봉을 돌아 최경환 성지로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태을봉 능선길


수암봉 갈림길에서 슬기봉까지는 1.63km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간은 한남정맥(漢南正脈)에 포함되는 구간이다. 능선길을 잠시 걸으면 또 하나의 국가시설물이 능선길을 막는다. 서울외곽순환도로를 지나거나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보면 수리산 능선에 공처럼 보이는 시설물이 있다. 이 시설물은 주요 방위시설물 같은데 아쉽게도 능선길을 막아 잠시 하산길로 돌아가야 한다. 평탄지에는 이 시설물로 오르는 포장도로가 있고 안양(3산림욕장) 1.44km, 슬기봉 0.33km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제 슬기봉으로 오르자. 포장길 잠시 지나 가파른 길 들어서면 편하게 나무데크로 길을 이었다. 이내 슬기봉 도착. 아쉽게도 슬기봉 정상(432m)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슬기봉 앞 나무데크는 최고의 전망대이다. 태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오후 햇빛 속에서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눈 아래로 이어지는 성지(聖地)길과 병목안길도 숲길로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정상 태을봉을 향해 출발이다. 이 구간은 2km의 능선길로 수리산 등산에 백미이다. 한남정맥길과는 이제 이별이다. 한남정맥길은 슬기봉에서 하산하여 임도5거리로 내려가 감투봉 넘어 목감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병풍바위


이 능선길에는 전망을 즐길 수 있는 툭 트인 지대도 많고 밧줄바위, 칼바위, 병풍바위처럼 기암(奇巖)도 많다. 드디어 2km 능선길 지나 수리산 정상 태을봉(太乙峰: 489.2m)에 도착한다. 정상은 평탄한데 헬기장도 있고 태을봉이라는 정상석도 세워 놓았다. 태을봉에 대한 설명도 있는데 설명이 쉽지가 않다.

동양 별자리로 보면 온 하늘에 중심이 되는 별이 북극성이다. 북극성을 달리 불러 태을성(太乙星), 또는 태일성(太一星)이라 부른는데 이 별은 하늘의 신성한 영역인 자미원(紫微垣)에 자리하고 있다. 또 이 별의 다른 이름은 자미대제(紫微大帝)이기도 하다. 별들의 우두머리이기고 하고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개념을 태을, 태일이라는 말로 풀어나갔다. 그러니 태을봉은 쉽게 말하면 ‘봉우리 중에 봉우리’ ‘봉우리의 근원’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수리산은 달리 견불산(見佛山), 태을산(太乙山), 취암봉(鷲岩峰, 鷲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세종실록지리지 안산조에는 취산(鷲山)이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수리산(修理山), 견불산(見佛山), 취암(鷲岩)이라 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견불산(見佛山), 태을산(太乙山), 취암봉(鷲岩峰)이라 했다. 그럼 이런 이름들이 모두 다 지금의 수리산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마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과천군읍지(果川郡邑誌)에는 태을산을 설명하면서 군남쪽 20리(太乙山: 郡南二十里)라 했고, 수리산은 별도로 군남쪽 25리에 있는데 일명 견불산(修理山:郡南二十五里 一名見佛山)이라 했다. 현재 태을봉 쪽(태을봉, 관모봉)은 태을산으로, 슬기봉, 수암봉 쪽은 수리산, 견불산, (鷲岩 포함)이라 한 것 같다.

▲담배촌 옛모습


단종의 사냥터 수리산, 곽재우 장군이 만년을 보낸 수리사

수리산은 그 기반이 되는 바위가 변성의 화강암과 편마암이라 한다. 바위에 결이 있고 금이 간 바위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장마철에는 붕괴 위험도 높다. 연전에도 봉우리 바위가 붕괴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다. 그 옛날 태종 8년(1408년) 겨울에 바위가 무너져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5년 뒤(1413년) 장마철에는 산이 무너져 내려 비구승 3인과 비구니승 1인이 흙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果州修理山頹, 僧三尼一壓死) 이 위험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 우기에는 조심하여야 한다.

한편 수리산은 사냥터이기도 했다. 단종은 안산에 있던 어머니 현덕왕후의 묘소 소릉(昭陵)에 제를 지내고 귀경하는 길에 이곳 수리산에서 사냥을 하였다. (祭昭陵, 還, 沿途打獵, 晝停于甫川里, 驅獵修理山)

이제 하산길이다. 온 길 100m 되돌아가면 ‘수5-6 병풍바위정상’이라는 위치표시목이 있다. 이곳에는 급격히 고도를 낮추며 내려가는 하산길이 있다.

이 길 약 1km 내려가면 계곡에 닿으면서 최경환 성인의 묘소가 있는 최경환 성지에 도착한다. 최경환 성인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30세 손으로 기해박해 (1839년)때 이곳에서 신도 40여 명과 함께 서울로 끌려와 순교하였다.


최치원 30세손 최경환 성인, 수리산서 눈물겨운 신앙생활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믿음이 깊은 천주교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와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곳 수리산 병목안 담배촌에도 이렇게 모인 신도들이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한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 이곳 수리산공소(公所) 회장으로 임명되어 신앙공동체를 이끌어 나갔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담배농사를 지었기에 이 곳은 담배촌이라 불렀다 한다. 1839년 기해년, 이곳이 발각되어 서울로 끌려갔다. 최경환은 끝내 배교하라는 회유를 거부하다가 태장(笞杖) 340대, 곤장(棍杖) 110대를 맞고 9월 12일 38세 나이로 옥사하였다 한다.

그의 아내 이성례 마리아도 젖먹이 자식을 버릴 수 없어 배교하려 했으나 끝내 배교하지 않고 1840년 1월 31일 39세 나이로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당하였다. 최경환은 1925년 시복(諡福)되고 1984년 시성(諡聖)되었으며, 아내 이성례도 2014년 시복(諡福)되었다 한다. 이 부부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의 부모이기도 하다. 이곳 성지에는 최경환 성인의 묘소가 있고, 옛집터에 성당이 세워지고 순례자들을 위한 성당도 세워져 있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주요 성지 중 하나이다.

한편 임진란 후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담배는 1800년대에는 이미 전국에 퍼져 있었다. 용도는 기호품이라 하기보다는 약초에 가까운 용도로 쓰여 수요가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호사설에는 담배의 효능이 기록되어 있는데 가래가 목에 걸릴 때, 소화가 안될 때, 한겨울 찬기운 방지에 효능이 있다 했으니 약초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피운 담배가 몸에 배어 골초가 된 이도 있었다. 정조는 골초였다 하며 고종 순종 명성황후도 애연가였다 한다. 담배(痰排: 담을 물리침)란 이름을 처음 붙인 장유도 어지간한 골초였다. 정조 때 문신 이옥(李鈺)은 담배 글을 연경(烟經)이라 이름 붙여 경전의 경지로 끌어 올렸으니 아마도 지독한 골초였던 모양이다.

이름도 다양했다. 남초(南草), 남령초(南靈草), 망우초(忘憂草), 연초(煙草)라 했고 청장관전서에는 담바고(淡波古, 淡芭菰), 연주화(烟酒和), 상사초(相思草)라는 이름도 보인다. 이 정도로 담배는 대중적인 상품이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상하 가리는 물건이 아니라서 훈장과 학동, 할아버지와 손자가 맞담배를 했고 조정 임금님 앞에서도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성지 담배촌을 뒤로 하고 병목안 마을로 내려온다. 중간에 문둥바위가 있는데 교우촌이 발각될까봐 문둥이마을이라고 헛소문을 낸 경계가 되는 바위였다는 설(說)도 있다. 구불구불 길 돌아 내려오면 버스정류장에 닿는다. 안양, 명학, 금정, 평촌으로 나가는 버스노선이 많다. 안양역 앞 골목은 각종 먹거리가 많아 목을 적시기에 불편함이 없는 곳이니 잠시 발걸음 멈추고 갈 일이다.

교통편 - 4호선 대야미역 2번 출구

걷기 코스 - 대야미역 ~ 갈치저수지 ~ 동래정씨종택 ~ 정난종 선생 묘역 ~ 수리산임도 ~ 수리사 ~ 수암봉 갈림길 ~ 슬기봉 ~ 태을봉 ~ 최경환 성지 ~ 병목안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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