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 아픔 서린 철원들판엔 세계중심 꿈꿨던 궁예의 눈물이…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가을이 깊었다. 이런 날에는 영화 만추(晩秋)가 생각난다. 문정숙, 김혜자, 탕웨이(湯唯) 등 늦가을 분위기를 풍기는 주인공들이 오랜 감방 생활 끝에 만추에 단 며칠의 휴가를 맞는다. 문득 이 가을 만추를 느낄 어딘가로 가 보아야겠다. 그래 그 화사한 명산의 단풍보다는 넓게 펼쳐진 평야, 철원 땅을 찾아가 보자. 철원 들판을 보기 좋은 곳은 금학산(金鶴山, 琴鶴山)과 도피안사의 화개산(花蓋山, 華蓋山, 花開山)이다.
철원으로 가는 버스 편은 여러 곳에 있는데 가장 무난한 방법은 동서울터미날, 강남터미날, 4호선 수유역, 의정부터미날이다. 오늘은 수유역에서 가기로 한다. 수유역 4번 출구를 나오면 던킨도너츠 앞에 철원(동송)으로 가는 3001번 버스가 있다. 버스시간은 06:00, 06:40, 07:30, 08:30, 09:30, 10:20… 인데 하루 일정을 생각하여 09:30분 이전 편을 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버스는 의정부, 포천, 운천을 지나 동송(철원 동송면)에 도착한다. 남북이 분단된 후 철원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터미널을 나서 건물을 끼고 우측으로 돌면 바로 우측 2차선 도로에 금학체육공원, 금학여중고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이 길 약 500m 위가 철원여고 앞이다. 은행나무 노란 잎이 가을을 듬뿍 담고 있다. 그 예전 머리속에 남아 있던 군사도시 철원의 느낌은 전혀 없다. 공기 맑고 깨끗한 전원도시로 변해 있다.
좌측으로 200m라 쓴 금학정(金鶴亭) 안내판 방향으로 나아가면 약수터가 있는 갈림길이다. 좌측은 국궁장(國弓場) 금학정길이며 우측은 금학체육공원길이다. 오늘 갈 길은 우측 체육공원 방향이다. 약수도 한 바가지 마시고 빈병에도 가득 담는다. 물맛은 신선하다. 그 곳에는 금학산에 대한 내력을 설명한 안내판과 등산지도가 서 있다.
높이 947.3m이며 광주산맥에 속한다고 한다. 학(鶴)이 내려앉은 형국이라 금학산(金鶴山)이 되었다 한다. 이른바 풍수하는 이들이 말하는 금계포란(金鷄抱卵)이라든지 금학포란(金鶴抱卵)의 지형과는 무관한 이름인가 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정상에서 본 철원평야. 저 넘어가 궁예의 터전
금학산은 철원 벌판에서 보면 평원에 삼각뿔처럼 우뚝 솟아서 보개산, 고대산으로 이어지는 형세의 산이다. 북쪽 담터계곡이나 안양골이라면 몰라도 알을 품기에는 너무 우뚝하다.여러 자료에 산 이름은 쇠금 자 금(金)으로 쓰는데 1672년 임자년 이 산의 남쪽 관북대로를 따라 금강산 유람길에 이 산을 바라본 송시열의 정적 백호 윤휴는 풍악록(楓岳錄)에서 이 산을 금학산(琴鶴山)이라 적었다. 그것도 운치 있는 이름이다. “28일(신축) 맑음. 아침에 주수가 와서 함께 북관정에 오르는데 펑퍼짐한 넓은 평야가 백 리 멀리 뻗쳐 있고,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금학산(琴鶴山)인데 그것이 벋어 가서 보개산(寶蓋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들 가운데 서너 개 옹기종기 언덕이 있는데 그것은 보개산이 뻗어 나온 종적이라”고 하였다.
학(鶴)이 내려앉은 금학산은 보개산 내 최고봉
이어서 안내문에는 금학산이 “보개산(寶蓋山) 내에서 최고봉”이라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금학산 정상에 올라 주변 산세를 보며 이 말의 의미를 짚어 보아야겠다.
우측 체육공원길 포장도로 약 1km 오르면 ‘금학체육공원’을 알리는 바위판이 보이고 그 앞으로 산으로 오르는 흙길이 나타난다. 팔각정 금학산정 지나 잠시 오르면 산자락을 에둘러 돌아가게 만든 임도를 만난다. 이 길의 이름은 ‘비상도로’이다. 예전에는 이 길이 군사용도로였던 것 같다. 비상시에 원활한 이동을 위해 개설했던가 보다. 이제는 이 길을 걷는 주민들이 여럿 보인다. 대부분 날씬하고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
이윽고 안내판이 나타나는데 철원소방서 119 안내판 제1지점이다. 좌로 가면 마애불 1.5km, 우로 가면 담터계곡 2km, 앞으로 가면 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우선 마애불부터 만나러 간다. 일반적으로 금학산을 오르는 이들이 택하는 등산로와 반대방향으로 출발이다. 약 4 시간 뒤에는 다시 이 지점으로 회귀할 것이니 방향은 무관하다. 금학산에는 철원소방서가 세워 놓은 119 안내판이 5개 있다. 1번이 출발지점, 2번이 매바위 근처, 3번이 정승바위 근처, 4번이 정상, 5번이 마애불 갈림길 능선이다. 만일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즉시 알리라는 위치 표지판이다. 안전을 보장 받고 있는 것이다.
임도길 1km 여 지나면 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오고 마애불 1.5km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잠시 후 갈림길에 닿는데 좌로 마애불 400m, 직진방향으로 능선 500m라 쓰여 있다. 마애불 방향길로 잠시 돌아가면 다시 나무로 된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그 곳에는 마애불 260m라고 적혀 있다. 거리가 줄어 고맙기는 하지만 고쳤으면 좋겠다. 마애불까지 도착한 후 필자의 느낌은 400m는 실제 발로 걷는 거리이고, 260m는 지도상에서 평지로 본 도상거리(圖上距離)가 아닐까 구차한 해석을 해 본다. 산길을 걷다 보면 표지판을 세운 주최 측이 달라 같은 구간의 거리가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 관리 부서에서는 조금 더 신경 써 주면 좋을 것이다.
이윽고 마애불능선길에 올라서면 119표지 5번이 서 있고 이정표에 좌측으로 마애불(세제당 방향)을 알리고 있다. 좌측 방향 잠시 아래 바위에 철원평야를 바라보는 4.5m 높이의 마애불이 정좌해 계신다. 문화재 자료 33호라 한다. 자연석에 선각(線刻)으로 새긴 고려의 마애불이다. 동남향을 하고 있는 불상은 전체 높이 576㎝, 불신 높이 450㎝, 머리 높이 134㎝이다. 몸 부분은 바위 면에 직접 새기고 머리 부분은 다른 돌로 만들어 몸통에 꽂아 결합시켰다 한다.
삼도(부처 목에 가로로 그어진 세 줄)가 뚜렷한 원통형의 굵고 긴 목이 함께 붙어 있는데 머리는 나발 없이 민민한 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높직한 머리묶음이 표현되었다. 얼굴은 사각 느낌이 나는 타원형으로 편안한 얼굴이다. 오른손은 손등을 밖으로 하여 아래로 내려뜨린 채 가운데 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구부려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있다. 왼손은 가슴 앞에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가운데 약지와 중지를 구부리고 있다.
철원평야 바라보며 정좌한 고려시대 마애불
솜씨로 보아 동네 석수(石手)의 솜씨는 아니고 이 지역 최고의 석수가 새긴 것 같다. 옷자락, 손의 흐름 모든 곡선이 유려하고 매끄럽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석수가 너무 본 것이 적었으리라. 신라 말의 그 유려한 불상들을 보았다면 그 솜씨로 멋진 선각을 남겼으련만 눈높이가 솜씨를 따르지 못한듯하여 아쉽구나.
절터에는 기와편이 흩어져 있고, 어느 스님의 이승 마지막 흔적인 사리를 봉안했을 부도의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연화문의 솜씨도 훌륭하고 그 크기도 만만치 않다. 참고로 모자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 둔다. 아래쪽 평탄지 숲에는 무너져 내린 석탑의 잔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땅에 묻혀 있을 나머지 부재들을 거두면 부족하나마 석탑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 너럭바위에서 내려다보는 동송(철원)읍과 평야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제 정상을 향해 능선길을 오른다. 정상까지는 1km가 넘는 만만치 않은 오르막의 연속이다. 혹시 산행이 힘들다면 마애불에서 온 길을 회귀하여 다음 여정길로 들어서는 것도 괜찮다. 등정길 중간지점에 쉼터가 있는데 오르막길 잠시 멈춘 조그만 평탄지가 쉼터이다. 다시 오름이 시작되고 정상에 주둔한 국가시설에 물품을 올리는 리프트를 만난다.
등정 내내 돌아보면 동송읍과 철원평야가 보인다. 등성이를 오르는 산길이다 보니 내리막 안에 감춰진 계곡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한식경 올라 드디어 정상 앞 이정표에 도착한다. 마애불에서 1.2km의 오르막을 오른 것이다. 우측으로는 담터(고대산 방향), 하산 길 매바위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국가시설을 돌아 정상으로 간다.
북동쪽으로는 이어지는 산길 수정산(499m), 숙향봉(473m)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담터계곡, 안양골 계곡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좌측으로는 산길이 이어지는데 요즈음 종주코스로 심심치 않게 떠오르는 보개봉(寶蓋峰, 모가봉)~고대산 길이다. 종주산행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곳 철원 금학산에서 보개봉, 고대산 지나 연천의 신탄리역으로 내려가는 산행을 즐기고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이 산길이 금학산~ 보개산~ 수정산(水晶山)으로 그려져 있다. 경원선 신탄리역을 통해 쉽게 오를 수 있어 널리 알려진 고대산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산을 오르기 전 금학산 안내문에 씌여 있던 “금학산이 보개산(寶蓋山) 내에서 최고봉”이라는 말은 요즈음에는 나누어 말하는 금학산, 보개산, 수정산(고대산)을 예전에는 보개산이라는 큰 틀에서 보았던 것이다. 요즈음 개념에서 생각해 보면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 설악산의 내설악, 내설악, 남설악 등을 설악산이라 부르듯이 보개산이라 했던 것이다. 예전 이 곳 보개산(계)는 상당히 유명했던 곳이다.
고려 때 목은 이색(李穡)의 시에는 보개산지장사(寶盖山地藏寺)란 오언율시(五言律詩)가 전해진다.
遊山如啖蔗(유산여담자) 산에 노닐음은 맛좋은 음식 먹는 듯하니,
最愛入淨境(최애입정경) 정토의 경계에 들어감을 무엇보다 좋아해.
雲望共無心(운망공무심) 구름 바라보면 함께 무심해지고,
溪行獨携影(계행독휴영) 시내 거닐면 그림자만이 친구가 되는구나.
(중략) (기존 번역 전재)
아들 태종의 쿠데타(왕자의 난)에 신물이 난 태조 이성계는 이 곳 보개산에 행차하였다. 아마도 심원사(원 심원사)와 그 부속 암자(지장암 등)였으리라. 실록 태종 1년 (1401년) 3월17일 기록에는 ‘태상왕이 보개산에 행차했다(太上王幸寶蓋山)라 하였고, 이듬해는 태상왕이 보개산(寶蓋山)의 심원사(深源寺)로 향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로 향하려고 하였다.’고 하였다.
숙종 때 김창협(金昌協)도 ‘겨울을 철원 보개산 대승암(大乘菴)에 머물었다’는 기록을 삼연집에 남겨 놓았으며 미수 허목도 1663년에 보개산을 유람했다고 미수기언에 적어 놓았으니 보개산은 인기가 있었던 산이었다. 남북이 분단되면서 우리의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 안타까운 산인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철원은 당당히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였으며 보개산에는 지장사, 심원사, 성주암, 지족암, 용화사, 운은사가 기록되어 있다. 금학산 마애불 절터도 이 곳 중 하나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상념을 떨치고 산을 돌아 매바위 능선으로 원점 회귀한다. 붉은 단풍이 길을 맞는다.
이제 도피안사(到彼岸寺) 행이다. 버스터미널에서 길을 건너면 전통시장이 있고 이곳 30m 앞에 정한약국이 있는데 이 약국 앞이 버스정류장이다. 도피안사는 이곳에서 버스로 10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문민정부 이전까지만 해도 민간인이 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신탄리로 가는 15번 버스를 기다린다. 9시부터 오후3시까지는 매시 5분에 버스가 있고 그 후로는 4:30분, 5:30분, 6:05분, 8:20분에 버스가 떠난다. 혹시 시간이 맞지 않으면 택시를 이용해도 6000원을 넘지 않는다. 도피안사 앞에서 하차하여 도피안교를 건너면 나지막한 화개산 자락에 도피안사는 살짝 숨어 있다. 다리에서 500m 정도의 짧은 거리이다.
피안(彼岸)의 세계에 도착(到)하니 가을 단풍 속에 절은 고요히 앉아 있다. 절 앞에는 간단한 사적기가 적혀 있는데, 신라 경문왕 5년(865)에 창건되어 법맥이 이어지다가 1898년(광무 2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한다. 주지스님 법운이 다시 재건하고 1941년에 개수했는데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한다. 이후 절은 폐허로 남아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 되었는데 15사단 연대장 고주찬 대령이 절터에서 극적으로 철불을 발굴해 냈다고 한다. 이후 15사단이 복원 관리해 오다가 1988년 종단으로 이관되었다 한다.
태조 이성계가 행차했던 보개산 심원사…
그러면 이 철불(鐵造毘盧舍那佛, 국보 63호)은 도피안사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일까? 안내문에 따르면,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도선이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고 하였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았더니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으므로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모셨다“는 것이다. 이 철불께서 당신 앉을 자리를 스스로 정하셨던 것이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안양사는 금학산 북쪽 안양골 계곡에 터만 남아 있지만 도피안사는 다행히 철불의 인연으로 다시 법등을 이었던 것이다. 도피안사는 지금은 설악산 신흥사의 말사인데 1930년대에 석문의범(釋門儀範)에 기록된 것을 보면 보개산 심원사, 보개산 안양사, 화개산 도피안사는 모두 금강산 유점사의 말사였다.
이 철불 등에는 139자(140자?)의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향도(香徒)라고 불리우는 민간 신자들의 보시로 이 부처가 이루어진 것이다.
“香徒佛銘文幷序夫釋迦佛, 晦影歸眞, 遷儀越世, 紀世掩色, 不鏡三千光歸,
一千八百六載耳, 慨斯怪斯彫此金容,口,口來哲, 因立願之, 唯願卑姓室,
遂棨椎自擊, 口,口覺長昏, 換庸鄙志, 契眞源, 恕以色莫朴口見,
唐天子咸通六年乙酉正月日, 新羅國漢州北界, 鐵原郡到彼岸寺, 成佛之時,
士口龍岳堅淸, 于時口覓居士, 結緣一千五百餘人, 堅金石志, 勤不覺勞因
향도불의 명문과 서
석가불이 그림자를 흐려 眞源에 돌아가고
儀禮를 옮겨 세간을 넘으며 세상에 기록하여 형상을 가려 삼천대천세계에
빛을 비추지 않고 돌아가신지 1806년이 되었다 이를 슬퍼하여
이 금상을 만들고자…인하여 誓願을 세웠다.
오직 바라건대 비천한 사람들이 마침내 창과 방망이를 스스로 쳐
긴 어둠에서 깨쳐 날 것이며 게으르고 추한 뜻을 바꾸어 진리의 근원에
부합하며 바라건대…당나라 함통 6년(신라 경문왕 5년 865) 을유년 정월 일에 신라국 한주 북쪽지방 철원군의도피안사에서 불상을 이룰 때에…
이때에 거사를 찾아 1500여 명이 인연을 맺으니 금석과 같은
굳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힘써 힘드는 줄을 몰랐다.”(역주한국고대금석문)
여러 사람의 열망이 세월의 벽도 전쟁의 벽도 넘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 시대에는 당나라 유학승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화엄종이 유행하던 시기로 화엄종의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것이다. 이 시기 이렇게 모셔진 철불이 40여 분되는데 이곳의 철불은 명문이 새겨진 3개의 철불 중 하나로 시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되는 중요한 유산이다. 철불이 모셔진 대적광전에는 철불을 발굴한 고주찬 대령의 사진이 보관되어 있어 감회가 새롭다. 대적광전 앞마당에는 노란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고졸한 삼층석탑이 있다. 철불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보물 223호이다.
피안의 세계 단풍 속에 내려앉은 도피안사
이제 잠시 나지막한 화개산으로 간다. 뉘엿뉘엿 햇볕 속에 넉넉한 철원평야가 펼쳐진다. 이곳이 오대쌀이란 브랜드의 쌀이 나오는 곳이구나. 이리 넉넉하니 철새도 많이 오겠지.
절을 나서 도피안교를 건넌다. 읍내 버스시간에 약 5분 뒤로 맞추어야 낭패하지 않는다. 버스는 신탄리 역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한국전쟁 이전 북녘 땅이었기에 공산당사(근대문화유산 22호) 건물의 뼈대가 남아 있다. 버스는 백마고지 입구도 지난다. 나지막한 고지가 보인다.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8군이 24번에 걸쳐 빼고 빼앗긴 역사의 고지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알까?
이윽고 버스는 백마고지역에 닿는다. 무인역인데 ‘철마는 달리고 싶다’ 한다. 저 넘어 북녘 땅 월정리역 지나면 궁예(弓裔)의 태봉국 도성이 남북분단선에 걸쳐 나뉘어져 있다. 궁예, 왕권(王權)을 강화하려다 아랫것들에게 당한 슬픈 궁예,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칭제건원(稱帝建元)했던 이. 부하들에 의해 철저히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민중들은 두고두고 못 잊어 땅이름에 연민의 정을 담아 전설로 남은 이단아 궁예의 궁터가 있다.
백마고지역에서 기차는 가을 속 남으로 떠난다. 표 값은 달랑 1000원이다.
교통편 - 수유역 4번 출구(강남터미날/동서울터미날/의정부터미날 외) ~ 동송(철원) 행
걷기 코스 - 동송터미날 ~ 철원여중고 ~ 금학체육공원 ~ 매애불 ~ 금학산 정상 ~ 매바위 ~ 하산 (버스 15번 환승) ~ 도피안사 ~ 버스로 (공산당사 ~ 백마고지 입구. 시간이 있으면 하차 ~ 백마고지역)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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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이한성 동국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