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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아티스트 - 변홍섭]만상을 비추는 거울, 수면에 감춰진 잔상

지금 보이는 세계의 모습 속 이면을 보고자 하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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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05-406호 박영택 미술평론가·경기대교수⁄ 2014.11.27 08:43:59

▲변홍섭 작가는 물에 비친 일그러진 이미지를 통해 적나라한 욕망의 세계를 보여준다.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변홍섭은 걸었다. 양재천을 거쳐 탄천까지의 긴 거리를 쉬엄쉬엄 걸었다. 더러 안양천변 등도 걸었다. 서울과 그 주변에 자리한 물길을 따라 여러 날을 산책했다. 강남의 대표적인 생 태하천인 양재천과 한강의 제1지류인 탄천을 거닐다가 보았다.

문득 그의 눈에 들어온 피사체는 잔잔한 물 위에 어른거리는 주변의 고층건물들이었다. 대규모 아파트단지나 수직으로 직립한 고층건물들의 모습이 물결에 흔들리거나 또렷하게 역상으로 비춰진 것이다. 웅장한 위용과 화려함,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건물들이 물속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언제나 고개를 들어 앙시의 시점으로 바라봐야만 했던 것들이 지금 발아래 짐승처럼 엎드려 있다. 더구나 흔들림, 왜상을 지니면서 현실과는 다른 색상으로 다가오는 저 이미지는 아름답고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회화적인 사진이랄까. 작가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응시했고 이후 촬영을 했다. 그렇게 이번 연작이 시작됐다.

▲time #2, fineart baryta archival pigment print, 55x30cm, 2014


사진은 이미 있는 것, 존재하는 것에 기생한다. 그 사물의 표면에 다가가 렌즈를 갖다 댄다. 그런데 이 사진은 정작 대상은 부재하고 그 대상이 비춰진 수면에 초점을 맞췄다. 대상 없는 곳에서 대상이 보인다. 결국 이 사진은 허상, 환영을 찍고 있다. 그 이미지는 이른바 유령이고 귀신같은 이미지다. 있다고 하기도 어렵고 없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그림자, 잔영은 그런 것이다.

사실 모든 이미지는 환영이다. 최초의 이미지는 수면에 비친 누군가의 상이었다. 나르키소스는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를 발견한 사람, 최초의 화가이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수면에 매료됐다. 그리고 그 허상, 환영에 속아 표면 아래로 사라진다. 그렇게 수면은 최초의 거울, 최초의 화면이었다.

▲time #5, fineart baryta archival pigment print, 55x30cm, 2014


물은 주체에게 거대한 환영을 요구한다. 수면 밑바닥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그 표면에서 일어나는 환영만을 안겨준다. 그러나 물은 표면만이 아니라 표면에서 바닥까지 하나로 이뤄진 거대한 질료덩어리다. 질료덩어리의 흔들림과 뒤척임이 수면위에 흔들리고 굴절된 상을 만들어준다.

작가가 촬영한 것은, 결국 물이다. 그런데 물/수면은 비어있지 않아 주변의 것들을 담고 반사한다. 물은 거울처럼 비출 뿐이다. 그것은 기다린다. 존재가 다가오면 비춰주고 사라지면 닫는다. 그렇게 수면은 화면이 돼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time #8, fineart baryta archival pigment print, 55x30cm, 2014


물에 비친 하늘과 건물, 나무 등은 분명 현실계의 풍경이지만 동시에 그림자와 같은 반사된 상에 불과하다. 순간 실재와 가짜가 뒤섞이며 헷갈린다. 이런 사진은 ‘실재와 재현, 진짜와 가짜의 혼동에서 오는 인식론적 즐거움을 주는 작업’의 일종이기도 하다. 물에 비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자율적인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것 또한 실재 세계와 다른 또 다른 세계이다. 그러니까 이미지로서의 세계다. 그러나 이 이미지로서의 세계가 현실계를 다시 보게 해주는 한편 어떤 고리를 걸고 있다.

도심에 자리한 이 하천은 그간 수질생태계와 수질보호에 힘써 이전처럼 아주 더러운 물은 아니지만 여전히 오염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부유물이 떠다니는 탁한 물 위로 거대한 건물이 흔들리며 자리한다. 견고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기껏 오십 년도 못 버틸 건물들이 물결에 흔들리며 일그러지고 왜곡된 채 위태롭게 서 있다. 그 위로 작은 꽃잎과 알 수 없는 것들이 느릿하게 떠다닌다.

▲time #1, fineart baryta archival pigment print, 55x30cm, 2014


하늘과 구름, 나무와 풀들이 물살에 의해 밀려나면서 작게 출렁인다. 이내 사라질 것들과 영원할 것들이 공존한다. 수면에 어른거리는 이미지들은 불가피하게 굴절된다. 따라서 그 안에 담긴 이미지 또한 왜곡된다. 명확한 윤곽선이나 선명함을 대신해 애매함, 흔들림, 모호함을 안긴다. 이렇게 이미지를 포착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이른바 존재를 ‘유령의 속성을 갖도록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수면에 드리워진 이미지 카메라로 포착

더구나 물속에 잠긴 도시, 건물의 모습은 사뭇 묵시론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물에 익사한 도시, 수면 아래로 사라진 도시, 한때의 영화와 번성을 뒤로 하고 폐허와 절멸의 공간이 된 듯한 풍경이 차가운 침묵과 무거운 질료 속에 파묻혀 있다. 이는 그가 물가에서 느낀 소회이고 사진으로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이며 앞서 언급했던, 그가 걸었던 고리이기도 하다. 이 고리걸기가 예술의 알리바이다.

▲time #7, fineart baryta archival pigment print, 55x30cm, 2014


이전 작업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흔들어 피사체를 촬영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수면에 드리워진 이미지는 스스로 흔들리기에 굳이 카메라를 움직일 필요가 없어졌을 것이다. 이미지가 흔들린다는 것은 일종의 이미지 지우기, ‘이미지에 빗금을 치는 행위’일 수 있다. 정확성, 명료함, 선명함, 자명함, 진리, 재현 등에 의심을 하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 세계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세계의 표면적 질서를 흔들거나 그 이면에 있는 것들을 보고자 하는 욕망에 연유한다. 그러니까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세계의 질서(건물 풍경)에 오류를 발생시키고 오염시키는 일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와 그 정당성을 거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time #9, fineart baryta archival pigment print, 55x30cm, 2014


변홍섭의 사진은 선명한 이미지의 거부, 지금 보이는 세계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면을 보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한다. 그는 천변을 걷다 물에 비친 주변 풍경, 건물이미지를 보고 문득 깨달았다. 눈으로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상이 그 안에 ‘있었다’. 물이 만든 풍경, 수면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한 이미지는 현실계의 견고함과 정확성, 굳건함을 죄다 녹이고 굴절시키고 허물어지게 한다. 순간 현실의 이미지는 허상, 환영이 된다.

무서운 욕망으로 치솟은 건물들의 본질이 물에 비친 일그러진 이미지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역설적으로 저 수면에 비친 허상, 환영이 실재를 제대로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다. 환영의 주술성이 현실계를 제대로 응시하게 해주는 한편 사물의 이면을 보는 통로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더구나 아름다운 사진이다.

(CNB저널 = 글 박영택 미술평론가·경기대교수)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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