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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아티스트 - 사이몬 고]죽음의 공포까지 유머로 승화

‘뉴욕의 이방인’으로 정체성 눈뜨며 전통 꼭두에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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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15호 윤진섭 미술평론가⁄ 2015.01.29 09:04:30

▲사이몬 고(본명 고종혁) 작가.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글·윤진섭 미술평론가) 여덟 살에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사이몬 고(본명 고종혁)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쿠퍼유니온 대학에 진학했을 때 교수들과 친구들이 자신을 동양인 취급을 하며 타자화하는 것에 불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으며 비로소 자신의 신분이 미국 시민이지만 여전히 ‘동양인이고 한국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가 한국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즈음이었다. 최근 한국에 돌아온 그는 서울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에게서 편안함을 느끼며 생활하고 있다.

▲싸이클(Cycle), 캔버스에 오일, 53x63cm, 2014


2010년부터 현재까지 사이몬 고가 제작한 작품들에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던’ 미국에서의 삶과, 성년이 돼 자율적 결정에 의해 이뤄진 귀국 이후에 느낀 감정의 편린들이 녹아 있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들은 그가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에 미국에서 겪었을 듯싶은 다양한 경험들의 총화인 셈이다.

그는 작품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경향이 짙다. 가령, ‘분갈이(Houseplants)’ 시리즈는 죽은 식물을 살리기 위해 분갈이를 해주는 처지가 이민자인 자신의 삶과 같다고 느껴 제작한 것이다. 33x38cm 크기의 캔버스 연작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연한 파스텔 톤의 중성색 유성 물감으로 칠해져 있다.

연한 난색조와 연한 한색조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형태(figure)와 배경(ground) 간의 구분이 거의 안 될 정도로 화면 속의 식물은 실루엣으로 엷게 처리돼 있다. 유성 물감을 사용해 붓으로 제작한 이 연작은 숙련된 솜씨에 의해 깔끔하게 정제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헤드 투 니(Head To Knee), 캔버스에 오일, 65x53cm, 2014


유년·청년의 삶 집합체로서의 그림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2012) 시리즈는 사이몬 고가 뉴욕의 한 허름한 잡지사에서 우연히 접한 라이프지에 실린 한국전쟁 보도사진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사진의 이미지를 찢은 뒤 다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패널 위에 잉크젯 프린트를 한 이 연작들 역시 희미한 톤의 중성색으로 처리돼 있어서 회고적인 분위기를 나타내 준다. 마치 한국전쟁이 한국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남긴 것처럼, 갈가리 찢긴 사진의 흔적은 치유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2012년에 제작된 ‘불확실(Doubt)’은 낙서처럼 손으로 쓴 영어 문장을 확대한 것인데, 사이몬 고는 이 시리즈부터 언어를 비롯해 숫자, 기호, 상징을 화면에 도입하기 시작한다. 이 시리즈는 캔버스에 도입된 문장들을 임의로 분절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시지적 측면보다는 일종의 오브제로 읽힐 여지가 있다.

▲힐러즈(Healers), 캔버스에 오일, 53x45cm, 2014


2013~2014년 사이에 제작한 ‘마상의 군인(Soldier on Horse)’, ‘가면을 쓴 음악가(Masked Musician)’, ‘물구나무 서기(Handstand)’, ‘미소짓는 호랑이(Smiling Tiger)’, ‘음악가(Musician)’ 등은 다 같이 가면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회갈색을 주조로 그려진 이 작품들을 통해 사이몬 고는 인간의 양면성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때로는 호랑이를 의인화시켜 동물을 통해 인간을 풍자하고 있기도 하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노래를 부르지만 속으로는 비탄에 잠겨 있을지도 모를 음악가의 내면과,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곡예를 해야만 하는 광대의 슬픔이 단순화된 화면과 색채를 통해 잘 드러나 있다.

사이몬 고는 고국에서 꼭두를 만나 슬픔과 죽음조차 승화시켜 해학적으로 표현하는 역설의 미학을 알았다고 술회한다. 한국의 독특한 장례문화의 산물인 꼭두는 상여에 붙어 망자(亡者)가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갈 때 편히 갈 수 있도록 길 안내를 하는 인형을 이른다. 역할에 따라 여러 종류의 꼭두가 있지만 생김새가 해학적으로 표현돼 있어서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느껴진다.

▲헤드 러쉬(Head Rush), 캔버스에 오일, 130x162cm, 2014


병을 치유하는 과정을 작품으로 승화

사이몬 고가 꼭두에 매료된 것은 건강이 나빠진 이후였다. 그는 이때부터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영국의 철학자 사이먼 크리치의 ‘끝없는 욕망(Infinitely Demanding)’이란 책을 접하며 죽음조차 유머로 받아들이는 슬기를 배웠다. 병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그는 한국의 꼭두를 접하고 ‘죽음에 관한 사유’를 통해 마침내 작품의 소재를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운동에서 이끌어내기 시작한다.

가령, ‘스트레칭’ 연작은 요가와 스트레칭 등 운동과 관련된 포즈들로 구성됐다. 신체와 사물의 윤곽선을 굵고 투박한 검정색으로 표현한 것이 공통적인 특징인 이들 연작은 단순화된 신체의 모습을 통해 해학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작품의 배경에는 시간을 암시하는 숫자들이 나열돼 있거나 한계상황 혹은 ‘갇힘’을 암시하는 창살들이 굵은 검정색 선으로 그려져 있다. 자전거를 타거나 팔 운동하는 모습, 빨리 걷기, 스트레칭 등 건강 회복을 위한 다양한 신체 운동은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처럼 묘사돼 있으나, 그 이면에는 잔잔한 웃음이 일 정도로 해학적인 분위기가 깔려 있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음악가(Musician), 캔버스에 오일, 53x45cm, 2013


가벼운 캐리커처 풍의 분위기를 풍기는 단순화된 인물묘사는 그러나 사실적인 묘사보다 오히려 작중인물이 지니고 있을 비장감과 심리적 절박감을 관객에게 잘 전달해준다. 예술가로서 사이몬 고의 재능이 집중적으로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이 ‘스트레칭’ 시리즈가 아닌가 한다.

한색과 난색 간의 적절한 조화, 굵고 투박해 보이지만 실은 섬세한 감정의 기복을 잘 전달해 주는 검정색 윤곽선, 여러 겹으로 중첩돼 형성된 물감의 두껍고 거친 텍스처 등은 주제와 관련된 자신의 감정을 잘 전달해 주는 회화적 장치들이다. 모두 화면의 구성이 탄탄해 밀도 높은 박진감이 느껴진다.

사이몬 고는 구성의 단순화를 위해 신체를 통나무처럼 굵은 원통과 완만한 곡면으로 처리하고 배경에 굵은 검정색 숫자들을 병치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에 대한 단서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일종의 생활 일기와도 같은 이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사이몬 고는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의 소통의 장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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