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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㊾ 영국]노예무역의 어두움과 약탈문화재의 찬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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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49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5.09.24 08:48:10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9일차 (런던)

날씨의 앙갚음


인도 사람이 경영하는 호텔의 아침 식사는 소박하지만 오늘 많은 일정을 생각해 꾹꾹 챙겨 먹었다. 부지런한 인도 사람 전 가족이 매달려서 호텔 일을 거든다. 오늘은 보슬비가 내린다. 바르샤바에서처럼 후회하지 않으려면 성가시더라도 무조건 우산을 챙겨야 한다. 해가 나고 30도까지 올라서 더웠던 어제 날씨가 오히려 런던에서는 예외적인 여름 날씨였던 것이다. 뉴스에서는 “어제까지 반짝 더위가 미워 날씨가 기어코 앙갚음(vengeance)한다”고 표현한다. 비가 오더라도 선선한 것이 여행자를 덜 지치게 하므로 차라리 낫다.

솔로 여행자의 도시 내 이동을 위한 팁

낯선 대도시를 탐방할 때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는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패스를 구입하는 것이고, 둘째는 효율적으로 동선을 계획해 이동을 위한 시간과 수고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동선을 연구하기 위해 한 시간을 투자하면 결국 몇 시간 시간과 수고를 덜어준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나는 런던 1일 패스를 6.6파운드(1만 3000원)에 구입했고, 어젯밤 늦게까지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지하철 노선도와 씨름했다. 결론은 오늘 아침 가장 멀리 있는 그리니치(Greenwich) 천문대부터 방문하는 것이다.

▲대영박물관엔 이집트 컬렉션, 그리스 섹션 등 세계 각국의 보물이 모였다. 사진 = 김현주


▲그리스 신전은 아테네가 아니라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다. 영화배우 멜리나 메르쿠리가 1960년대 초 영화 촬영차 런던을 방문했다가 그리스 신전 장식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진 = 김현주

본초자오선 위에 서다

출근 시간 빅토리아 역은 붐빈다. 교외에서 열차로 도착한 승객이 튜브로 갈아타는 지점이다. 이름 그대로 런던 지하철은 동그란 생김새까지도 튜브를 닮았다. 지하철과 외곽 전철 (DLR)을 바꿔 타며 그리니치로 향한다. 비가 오니 짙은 벽돌의 집들이 영국 분위기를 더 낸다. 뱅크(Bank) 역에서 그리니치로 가는 DLR 국철은 주택가와 빌딩가를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비집고 간다. 느린 롤러코스터 같아 재미있다.

그리니치 역은 시내 타운 센터에 있으므로 그리니치 역 전 정거장인 커티삭에 내렸다. 역에서 한참을 걸어 마침내 언덕 위 천문대에 닿는다. 멀리 템스 강 너머 이스트 런던의 런던 올림픽 주경기장 모습이 보인다. 천문대 언덕 위는 본초자오선(prime meridian)이 지나는 지점이다. 나는 지금 동경 0도, 서경 0도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비는 더 많이 와 신발, 양말까지 모두 젖어 질척거린다.

병 주고 약 준 노예무역

같은 공원 단지 안에 국립 해양 박물관이 있다. 영국과 바다의 관계가 콘셉트다. 영국이 바다를 이용해 대영제국, 해양제국으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대서양 무역, 노예무역, 서구 각국들이 자국 영토를 늘려 나가는 과정도 기록됐다.

각종 선박과 탐험가, 항해가에 관한 기록들도 있다. 박물관의 규모는 매우 커서 세계에서 가장 큰 해양 박물관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옳은 것 같다. 노예무역에 관한 기록을 꼼꼼히 살폈다. 1807년 영국 의회가 노예무역을 금지할 때까지 150년 동안 12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대서양을 건넜는데, 그 중 340만 명이 영국 선박을 이용했으니 영국이 노예무역을 주도한 셈이다.

비참한 노예선 내부, 카리브해 플랜테이션, 1807년 아이티(Haiti) 독립으로 절정을 맞은 카리브해 노예들의 반란 같은 기록들이 가감 없이 서술됐다. 노예 송출에는 당시 아프리카 족장의 도움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노예를 잡아다 준 대가로 노예 상인들이 족장들에게 무기를 대주고, 그 무기로 족장들은 자기 세력을 강화해 나가는 악의 고리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영국이 노예무역 금지를 주도했다는 사실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이런 것을 두고 병 주고 약 준다고 해야 하나? 커티삭 역 앞 재래시장은 작지만 둘러볼 만하다. 한쪽에 한국음식 스낵코너도 있다.

▲웨스트 엔드 코벤트 가든 부근. 젊은이들로 가득 찬 또 다른 런던이 펼쳐진다. 사진 = 김현주


▲그리니치 역에서 한참을 걸어 언덕 위 천문대에서 그리니치 본초자오선을 마주했다. 가운데 굵은 수직선이 눈길을 끈다. 사진 = 김현주

앨버트 기념관 앞에서

다시 시내로 나와 모뉴먼트 역에 내리니 바로 앞에 기념비가 있다. 사흘 낮밤으로 불탔다는 1666년 런던 대화재를 기억하려고 1677년 완성했다. 기둥은 단순하지만 단일 원주 기둥으로서는 세계 최대 높이인 61m다. 내부 311개 좁은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이스트 런던 전망을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비 오는 날 시야가 빈약해 입장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오르지는 않았다.

시내 웨스트 엔드(West End) 지역 켄싱턴 궁 부근에 있는 앨버트 기념관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앨버트 공을 기리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매우 화려한 기념비다. 아무리 대영제국 최전성기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와 권위가 하늘을 찔렀다고 하지만, 한 사람을 위한 기념비가 이렇게 크고 화려해도 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관광지마다 중국 관광객 말고도 초-중생 정도로 보이는 아시아 학생이 많이 단체로 찾는다. 같은 모자와 티셔츠를 입은 것을 보면 여름방학을 맞아 런던에 단기 어학연수를 온 것이 틀림없다. 거리와 유명 관광지엔 한국 어린이도 많이 보인다. 덕분에 영국은 영어 교육이 중요한 산업이 되지 않았는가? 제국은 쇠락해가지만 영어는 아직 남아 후손들에게 몇 개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대영박물관의 세계 각국 보물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은 역시 대단했다. 게다가 무료입장이니 고맙기까지 하다. 이집트 컬렉션은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보다 낫고, 그리스 섹션 또한 아테네에 있는 어느 박물관보다 낫다. 파르테논 신전 장식을 몽땅 여기에 옮겨 놓았으니 그럴 법도 하다.

훗날 그리스 문화부 장관이 된 영화배우 멜리나 메르쿠리는 1960년대 초 영화 촬영차 런던을 방문했다가 그리스 신전 장식이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그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획득 경위야 어쨌든 세계 각국의 보물이 모인 곳이다. 로제타석 또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여기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국립 해양 박물관은 영국과 바다의 관계가 콘셉트다. 영국이 바다를 이용해 대영제국, 해양제국으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 김현주


▲커티삭 재래시장 풍경. 작지만 둘러볼 만하다. 한쪽에서 한국음식 스낵코너도 발견했다. 사진 = 김현주

초라한 한국 섹션

박물관 한 귀퉁이에 한-중-일 아시아 섹션이 있으나 전시물은 초라하다. 한국 섹션은 한쪽 구석(67번 룸)에 중국 섹션과 나란히 있다. 한국 국제 교류 재단(Korea Foundation)이 기증한 한국관은 사랑방을 재연해 ‘한영실(韓英室)’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솔직히 빈약하다. 중세 이후 기독교의 영향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운 서양 문화에 비하면 한국 문화는 통일신라 이후로 와서는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인다. 특히 회화, 조형물, 건축물 같은 유형(有形) 공간 예술은 비교가 안 된다.

서구 문명은 이집트 문명에 뿌리를 두고 그리스 로마를 거쳐 기독교를 만난 뒤 벽화와 성당을 경쟁적으로 치장하면서 화려함의 극치를 이뤘다면, 아시아 문화는 힌두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나는 약간의 역동성을 빼고는 이렇다 할 것이 없어 보인다. 대영박물관은 여러 문화의 동시 비교 현장이기에 더욱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된다.

▲앨버트 기념관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앨버트 공을 기리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기념비로, 화려함이 특징이다. 사진 = 김현주


▲이탈리아 로마의 성피에트로 대성당과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과 더불어 세계 3대 성당으로 꼽히는 세인트폴 대성당. 사진 = 김현주

공연 예술의 천국 웨스트 엔드

레스터 광장 가는 길에 들른 세인트폴 대성당은 역시 세계 3대 성당답다(나머지 두 개는 이탈리아 로마의 성피에트로 대성당과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이다). 이제 드디어 마지막 방문지다. 튜브 레스터광장 역에 내려 밖으로 나오니 젊은이들로 가득 찬 또 다른 런던이 펼쳐진다. 웨스트 엔드의 중심이다. 멀리는 트라팔가 광장과 가까이는 코벤트 가든, 피카딜리 서커스로 이어지는 거리는 생동감이 넘친다.

음식점과 가게가 전부이기는 하지만 차이나타운도 여러 블록에 걸쳐 있을 만큼 규모가 크다. 온갖 뮤지컬을 비롯한 공연 예술이 어디에서나 열리고 있다. 풍성하고 다양한 무대, 그리고 호응하는 관객들이 있기에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가 세대를 이어 등장하는 곳이다. 대중문화 콘텐츠가 막강한 영국은 이런 식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공연의 도시 런던. 온갖 뮤지컬을 비롯한 공연이 어디에서나 열리고 있다. 사진 = 김현주

퇴근 시간을 맞은 튜브는 발 디딜 틈이 없다. 땅 좁고 기후 조건이 불량한데 인구는 많은 영국에서 맬서스의 인구론이 나온 것은 당연해 보인다. 유럽에서 북미로 이민 간 사람들이 대부분 영국인이었던 것을 보면, 좁은 국토와 열악한 자연 환경이 오히려 세계 대제국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면 지나친 역설일까?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던 만큼 런던을 샅샅이 누비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지루하게 보였던 런던이 갈수록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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