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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공모 당선 ⑨ 김봉경] 1천번 흔들려도 버틸 주체성을 위해

니힐리즘 딛고 서는 과정을 그림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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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86호 김금영 기자⁄ 2016.06.10 14:51:48

▲김봉경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2008년. 김봉경 작가에게는 매우 잔혹한 해였다. 기자를 꿈꿨던 그는 2006년 큰 낙상 사고를 당하고 2008년 심각한 후유증을 앓으며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꾸준한 관심을 가졌다. 잘 걸을 수 없어 치료 기간 동안 집에서 신문과 책, TV로 세상을 바라보고 접했다.


그런데 이때 그의 개인사뿐 아니라 세상도 잔혹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벌어졌고, 한국 사회도 총체적인 경제 위기를 겪었다. 뉴스엔 자살, 사기, 범죄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다. 자본주의의 파도에 휩쓸려가는 모습이 작가의 눈에 수도 없이 밟혔다. 두 다리가 멀쩡해도 스스로 서지 못하고 절망하는 모습이었다. 작가가 한탄에서 벗어나 삶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주목한 계기다.


“우리는 주변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해요. ‘옆집 애는 몇 등 했다던데’ ‘옆집 남편은 얼마 벌어왔다던데’…. 비교도 흔하죠. 특히 자본 논리에 따라 돈이 많아야, 좋은 직장을 가져야, 명문대에 들어가야 목이 뻣뻣해지는 측면이 있어요. 성공의 기준이 된 겁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의 주체성과 삶의 목표를 세우기보다 주변 환경에 휩쓸리기 바빠요. 그래서 더 절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살, 사기, 범죄도 여기서 비롯된 결과죠. 정신적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의 범람이에요. 스스로 주체성이 명확해야 거센 파도에도 꿋꿋히 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봉경, '줄리아'. 비단에 채색, 152 x 67cm. 2013.

작가는 글 대신 그림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엔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여성, 여린 화초, 순수한 눈망울로 서로를 껴안은 고슴도치, 강렬한 이미지의 뱀 같은 동물,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근육질의 남자 등 다양한 이미지가 등장한다. 고전적인 느낌을 풍기는 이 그림엔 ‘삶의 허무함을 딛고 주체적이고 충만한 삶을 살려는 인간’이란 주제 의식이 녹아 있다.


온라인 이미지만 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직접 몸으로 접한 작가의 ‘모정’은 따뜻한 느낌이 가득했다. 아기 고슴도치를 품은 어미 고슴도치의 모습이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투사’에선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고 뱀을 집어 삼키며 온몸에 휘감은 남자의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다. 무언가 경고하는 것 같고, 앞선 ‘모정’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엔 사람들의 인생사가 담겨 있다.


“인간의 주체성과 삶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고전, 신화, 철학 분야의 책을 찾아봤어요. 현재 우리가 어려움을 겪듯 우리의 시초인 과거를 산 사람들도 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었겠죠. 그 이야기에서 우리 고통의 원천, 그리고 본성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의 고비에서 그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받아들이려 노력했는지 쫓아가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를 현실에 맞게 적용시켜 화면에 재구성하고, 신화적 메타포를 차용하기도 했죠. 실제 역사에 존재했던 인물을 소재로 취하거나 동물, 곤충 등의 은유를 통해 표현했습니다.”


비단에 견본 채색으로 고전·신화·철학 바탕 이야기


▲김봉경, '투사'. 비단에 채색, 110 x 47cm. 2013.

고전, 신화, 철학 등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그림은 고대 문헌의 한 페이지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비단에 견본 채색한 양식이다. 화면의 전체적인 틀을 맞추고, 비단을 끊어 와 그 틀에 붙인 다음 아교를 앞뒤로 바른다. 그 뒤 스케치를 한 스티로폼을 비단 뒤에 반투명하게 비치게 한다. 그리고 선을 긋고 물감을 칠하는 과정까지 일반 종이보다 방식이 까다롭다. 하지만 그 결과 탄생한 채색은 은은하고 묘한 매력으로 눈길을 끈다.


사회가 정해주는 것이 아닌,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휴머니즘, 그리고 고난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의지까지. 과거 고전, 신화에는 힘을 합쳐 고난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지금은 길을 걷다가 그냥 화가 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다.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타인을 배척하고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휴머니즘에 대한 그리움이 작가의 마음에 계속 싹텄다.


“옛 시절에는 다 같이 못 살았기 때문에 더욱 함께 힘내자고 으쌰으쌰 살았죠. 하지만 이젠 빈부격차가 발생하면서 갈등이 생겼어요. 서양의 근대에서 시작된 고민이 한국에선 이제야 쏟아지기 시작한 거죠. 자본 논리에서는 돈이 최고니, 이걸로 사람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이 안타까웠어요. 경계해야 하는 현상임을 일깨워 주고 싶었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은 게 ‘투사’예요.”


‘투사’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그리스-로마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를 모티브로 탄생한 작품이다. 니체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적 철인 짜라투스트라를 모델로 그의 언행을 담았다. 근대에 들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고, 2000년 동안 유럽 문명을 이끈 기독교가 붕괴하면서 사람들은 삶의 방향을 잃고 허무함에 빠지면서 니힐리즘과 직면하게 된다. 니체는 이 현상에 주목했다. 책 속에서 짜라투스트라는 10년간 은둔하던 산에서 나와 거리의 대중에게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자신이 터득한 새로운 복음, 즉 모든 고뇌와 죽음을 넘어선 초인, 영원회귀 등의 사상을 전한다.


‘투사’ 그림 속 몸 전체를 휘감은 거대한 뱀은 사람을 억압하는 운명, 고난을 상징한다. 머리엔 사자 가죽을 뒤집어썼는데 신에 도전한, 즉 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강인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어떤 존재에 의지하거나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려는 주체적 인간의 모습을 강하게 전달하는 작품이다.


▲김봉경, '고사인물도(孤事人物圖)'. 비단에 채색, 117 x 90cm. 2013.

‘고사인물도(孤事人物圖)’도 짜라투스트라가 모티브다. 책에서 뱀과 독수리를 마주하는 짜라투스트라의 모습이 펼쳐지는데, 그림에서도 이 장면이 슬쩍 엿보인다. 뱀과 독수리는 짜라투스트라가 사랑한 동물로, 독수리와 뱀은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 뱀은 독수리의 먹이가 아니라 친구처럼 독수리의 목에 감겨 몸을 가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 모습에 기뻐한다. 주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상대방을 전적으로 믿으며, 자신의 몸을 스스럼없이 기대어의지하는 것. 작가는 그리워 하는 삶 아닐까.


멘토가 필요한 사회? 아니, 스스로 일어서는 사회!


▲김봉경, '나그네쥐들'. 비단에 채색, 212 x 60cm. 2013.

‘나그네쥐들’엔 안타까움이 강하게 표현된다. 리더를 따라 무작정 앞만 보고 따라가다가 절벽에 떨어져서 죽는 듯한 나그네쥐들의 모양새다. 짜라투스트라의 “이것이 지금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 있는가?”라는 문구가 강하게 떠오른다.


“카페가 인기 있다 하면 카페가 골목 가득 생겼다가, PC방이 유행이라면 또 PC방이 미친듯 몰려오죠. 뭐가 유행이라면 다 무작정 따라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 현상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과정이라고 느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멸과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주체적으로 일하기보다 유행의 흐름만 따라가다 망해 절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니까요. 안타까운 동시에 경계의 의미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하지만 작가는 이런 삭막한 사회에서 가능성도 엿본 것 같다. ‘모정’이 그렇다. 사실 작품의 시작은 가슴 아픈 사건에서 비롯됐다. 몇 년 전 모범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다. 자식에게 거는 기대만큼 집착이 컸던 어머니는 전교 10등의 좋은 성적에도 등수가 떨어졌다며 아들을 구타했다. 구타가 빈번하게 이어지던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를 식칼로 난도질하고 멀쩡히 등교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김봉경, '모정Ⅱ'. 비단에 채색, 14 x 17cm. 2015.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어머니는 자식을 1등으로 만들어 주는 게 최고의 사랑이라고 믿었고, 서로 간 오해가 생겨 끔찍한 결과를 낳은 게 아니었을까요. ‘왜 우리는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인가’라는 괴로운 의문이 들었어요.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고 하잖아요? 서로를 꼭 안은 어미 고슴도치와 새끼 고슴도치를 통해 인간적인 삶, 사랑, 신뢰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림 속 고슴도치들은 서로에 대한 의심 없이 꼭 붙어서 자리를 지킨다. 그 모습은 점점 잃어가고 또 잊어가는 인간의 주체적 본능, 그리고 여기에 함께 자리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한다. 이렇듯 작가의 그림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원천은 사회에 대한 관심, 더 세밀하게 들어가서는 그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사, 또 거기에 존재하는 니힐리즘의 고난, 사랑, 갈등, 극복까지 다루는 데 있다. 사람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다. 스스로도 작가로서 끊임없이 의지를 다지는 과정이다.


“지금 현 시대의 사람들은 멘토를 강력히 원하는 것 같아요. 지쳐서 의지하고픈 대상을 찾고 싶은 거죠. 그러면 당장은 고비를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스스로 주체성을 기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 어떤 파도에 휩쓸려도 버틸 수 있게요. 건강한 몸뿐 아니라 건강한 정신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죠. 저는 세상이 돌아가는 걸 많이 보고 접하고 느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말하는 과정에 앞으로도 주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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