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주목전시] "호랑이 담배피운 시절 이야기하는 게 작가?"

김구림, '삶과 죽음의 흔적'전서 현대인 존엄성 이야기

  •  

cnbnews 제499호 김금영 기자⁄ 2016.08.31 16:07:37

▲'현대판 노예'를 고발하는 '음과 양 16-s. 45' 작품 옆에 선 김구림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사람들이 나보고 그래요. 왜 이렇게 작업에 일관성이 없냐고. 그런데 시대가 변하는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만 이야기하는 게 진정한 작가가 맞나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팬티차림의 벗은 몸으로 사람 키 높이의 높은 통나무 위에 올라가 행위 예술 퍼포먼스를 벌였던 김구림. 이번엔 ‘삶과 죽음의 흔적’전에서 80세 노장 작가가 솔직하게 바라보는 시대, 그리고 이 시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냈다.


김구림은 1950년대 후반 이래 미술, 연극, 영화, 음악 및 현대 무용 연출이나 무대 미술 등 여러 장르를 넘어들며 활동해 왔다.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 ‘영원한 아방가르드’ 등의 명칭이 그에게 따라붙기는 하지만, 이 노장 작가의 모든 작업을 이 두 가지 단어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세월이 흐르며 쌓인 시간들, 그리고 거기에 함께 쌓인 작업들도 무시하지 못하는 바이지만, 무엇보다도 매 전시마다 다른 작가가 작업했나 싶을 정도로 다른 스타일의 작업을 보여줬기 때문.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면서 산 채로 땅에 묻히는 아기들의 죽음이 뉴스에 보도되는 시대다. 김구림은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작품에 담았다. 작품 전체 모습(왼쪽)과 클로즈업된 아기 인형.(사진=김금영 기자)

김구림은 1958년 공보관 화랑에서의 첫 개인전 이래 50년대 말 앙포르멜(비정형)과 60년대 서정적 추상에 잠시 머물다 60년대 중반부터 플라스틱, 기계부속품, 비닐 등을 사용한 매체 실험을 선보였다. 1969년 실험그룹인 ‘제4그룹’을 결성해 기성 문화를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기성 영화의 틀을 깬 실험 영화 ‘1/24초의 의미’도 선보였다. 최근에는 음양사상을 기초로 한 다양한 매체와 실험을 모색하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김구림은 00 작가입니다”라고 바로 단정 짓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는 김구림이 환영하는 바다. 그는 작가 앞에 수식어가 따라 붙는 게 아닌, 그저 ‘작가’로 불리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있다. 작업 방식은 다양할 수 있지만, 늘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는 그의 작업 철학이기도 하다.


“저는 작가로서 시대를 반영하는 작업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대정신을 나타내는 게 작가의 역할이니까요. 시대에 상관없이 혼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살아가는 이 현실이야말로 가장 관심을 갖고 바라봐야 할 대상이죠. 그래서 시대가 변하면 작가의 작품도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간의 제 작품을 쭉 훑어보면 시대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요.”


시대의 흐름 반영하는 게 작가의 역할
한국현대사회 기성문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서슴없이


▲김구림, '음과 양 15-S. 49'. 박스에 혼합 매체, 27 x 20 x 17cm. 2015.(사진=갤러리 아라리오 서울)

1960년대 말 군사정권 시절에는 한국현대사회의 기성문화를 비판한 퍼포먼스 ‘콘돔과 카바마인’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를 선보였다. 그리고 급격한 발전이 시작되던 시기인 1970년대에는 문명사회에서의 미디어 문제를 다룬 ‘매스미디어의 유물’ ‘현상에서 흔적으로’ 등을 선보였다. 그의 말처럼 작품을 통해 시대 상황을 언뜻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엔 ‘삶과 죽음의 흔적’전이다. 현 시대에서 가벼워진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담았다.


긴 세월 동안 세워진 김구림의 명성만큼 그의 작업 세계는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할 것 같다. 뭔가 범인은 이해하지 못할, 고상한 철학이 숨겨져 있진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설명을 들으니 의외로 단순하다.


흙 속에 파묻힌 아기인형, 그리고 그 가운데 자리한 관의 모습을 담은 작품 ‘음과 양 16-S. 55’는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이를 유기시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일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았다. 김구림은 “현실 같지 않은 이런 일이 흔하게 벌어지는 게 요즘 세상”이라며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고 변기에 그대로 버린다던지, 산 채로 땅에 묻어버린다던지 하는 끔찍한 일들이 뉴스에 흔히 나온다. 삶의 존엄성과 가치가 낮아진 요즘 시대에서 벌어지는 문제”라고 짚었다.


▲시리아 난민들이 바다에서 맞은 안타까운 죽음을 표현한 설치 작업 '음과 양 15-S. 45'가 지하 1층 전시 공간에 마련됐다.(사진=김금영 기자)

또 다른 작품인 ‘음과 양 16-S. 45’는 얼굴에 천을 두르고 쇠사슬에 묶인 채 손이 잘린 인물이 등장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가 낮아진 것은 결국 인간성이 훼손된 데서 비롯된다.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이른바 '현대판 노예'의 이야기를 다룬다. 수십 년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못하고 감금당한 채 무차별적인 노동 착취를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실제 현 시대에 벌어졌던 일들이고, 또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 이야기다.


김구림은 “얼굴에 천을 두른 것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현대판 노예들의 삶을 보여준다. 또 잘린 손목은 고된 노동의 흔적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삶이 윤택해졌다고들 하지만, 정작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된, 삶의 근본적인 질은 오히려 낮아진 그야말로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지하 1층에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해골들이 보인다. 시리아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했지만 바다에 빠져 생을 마감한 현장을 전시장에 재현했다. 새로운 삶을 찾고자 했지만, 그 희망마저 무색하게 삶을 마감한 현장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작가는 작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뒤로 애매모호하게 꼬지 않는다. 주제를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단순 표현? 어렵게 표현해 이해못하는 게 더 문제
윤리와 도덕관 현 시대에 대한 직설적인 이야기


▲김구림, '음과 양 12-S. 25'. 혼합 매체, 가변 사이즈, 2012.(사진=갤러리 아라리오 서울)

“너무 단순하게 표현한 거 아니냐고요? 오히려 그러는 게 맞죠. 현대미술이 어렵다는 편견이 있어요. 요새 젊은 작가들을 보면 마치 현 시대 우리나라의 언어가 아닌, 전혀 다른 천상에서 그곳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 같이 애매모호하게 작업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경우가 있더군요. 그런데 저는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현대미술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혼자 감상하기 위해 작업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함께 이야기를 해야죠.”


그런데 바로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소통하는 걸 추구하는 노장 작가에게는 전 시대에 대한 그리움도 강하게 묻어 있는 것 같다. 특히 성(性)적인 면에서 그 점이 발견된다. ‘음과 양 16-S. 54’에는 서양의 법관 가발을 쓰고 욕조에 들어간 해골이 보이는데, 여성과 남성 사이의 애매해진 경계를 나타내는 작품이다.


김구림은 “모 재벌들의 문란한 성생활을 고발함과 동시에, 요즘 시대에 애매해진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며 “요즘 남자들을 보면 귀걸이를 하고 화장을 하는 등 꼭 여자 같은 모습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다. 점점 남성과 여성 사이의 구분점이 없어지는 시대”라고 쓴소리를 던졌다.


▲현대 사회의 문란한 성생활과 남성과 여성 사이 경계의 모호함을 이야기하는 '음과 양 16-S. 54' 작품.(사진=김금영 기자)

전시장 2층 구석에 마련된 한 방에서는 마치 동물 소리가 나는 것 같다. 그런데 알고 보면 사람들이 내는 소리를 편집한 것이다. 성관계를 가질 때 사람들이 내는 신음 소리가 방에 깔리고, 가운데에는 흐릿하게 처리된 성관계 영상이 상영된다. 그리고 그 영상 옆에는 공자의 ‘논어’ 책이 설치됐다.


“방 전체가 하나의 설치 작품이에요. 공자는 ‘논어’를 통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윤리, 그리고 도덕관을 짚었죠. 그런데 이런 도덕관이 사라지면서 마치 섹스를 노리개로 여기는, 그야말로 섹스 만능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기준이 윤리와 도덕관인데, 이것이 뭉개지면서 꼭 동물과 같이 변한 인간의 모습을 이 방에서 표현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는 꾸준히 변해 왔고, 이 변화의 흐름이 어떤 부분에서는 받아들여지고, 또 어떤 부분은 허용이 되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김구림 또한 안타까움과 탄식, 그리고 쓴소리가 이번 전시에서 함께 공존한다.


하지만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고, 또 절망적인 현실이라고 해서 외면할 생각은 없다. 시대 비판 정신은 시대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시작된다. 무관심이 아닌 매의 눈초리로 계속 지금까지 그래왔듯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또 작가로서 계속해서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할 예정이다. “내가 왕년엔 말이야” 식으로 담배피운 시절의 호랑이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전시는 갤러리 아라리오 서울에서 10월 16일까지.

관련태그
CNB  씨앤비  시앤비  CNB뉴스  씨앤비뉴스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