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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사 미술 칼럼] 풍경인가, 산수인가? 중세 동아시아 미학에서의 ‘고(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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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99호 김집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 2016.09.06 14:25:04

(CNB저널 = 김집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 
(인문고전 팟캐스트 ‘너도 고(古)양이로소이다’ 진행자)) 

작년에 방문한 홋카이도의 ‘더 레이크 뷰 토야 노노카제 리조트(The Lake view TOYA Nonokaze resort)’에서는 그 이름에 걸맞게 각 룸과 옥상에 마련된 노천탕에 몸을 담근 채 토야(洞爺) 호수의 경치를 편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림 같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경치는 한 편의 ‘풍경화’였다. 

더 이상 자연은 내가 그 안에 섞이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나와 공간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저편의 관람 대상이자 그림 같은 풍경이 된 것이다. 옛 사람에게는 서로 연관되고 서로 스며들어 궁극에는 한 몸으로 합일되어야 할 자연과 주체의 정신적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낡은 것으로 폐기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지평에서 사고되었던 자연, 곧 산수(山水)는 언제부터 주체와 분리된 풍경이 되었나? 풍경과 산수의 예술적 형상화인 풍경화와 산수화는 어떻게 다를까?

풍경 없는 산수화, 산수 없는 풍경화

풍경이 그려진 산수화에는 ‘풍경’이 없고 산수가 그려진 풍경화에는 ‘산수’가 없다. 풍경과 산수는 모두 ‘자연’이지만, 풍경이 자연(Natur)을 형이하학적이며 재현 가능한 대상으로서 발견한다면 산수는 자연(自然)에 대한 선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모델로서 존재한다. 

▲일본 홋카이도에 소재한 토야코(洞爺湖) 전경. 토야(洞爺)의 ‘토(洞)’는 중국 후난성의 ‘동정호(洞庭湖)’에서 가져온 한자로, 곧 ‘동정호의 늙은이’라는 뜻이다. 동정호 인근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곳의 여덟 경치를 그린 그림을 ‘소상팔경(瀟湘八景)’이라 하는데, 토야코의 절경(絶景) 또한 그에 못지않다.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일본을 대표하는 화가 우사미 케이지(宇佐美圭司, 1940~2012)에 따르면, ‘선험적인 것’이란 중세 동아시아 산수화에서는 고대의 철인(哲人, Philosopher)이 깨달음을 얻는 이상향으로, 중세 유럽의 종교화에 등장하는 신(神) 내지 성서적인 이념에 상응한다. 중세 동아시아의 산수화와 중세 유럽의 종교화는 그 내질에 있어서 공통되는 것이다. 이것이 근세 이후에 등장한 풍경화에 의해 중세 예술의 이지적, 철학적, 종교적 내용이 잠식당하게 된 것이다.(폴 발레리)

이념과 정신의 물리적 구현, 자연에는 조각이 없다

산수화가가 소나무를 그릴 때는 이른바 소나무에 담긴 개념(이념, 정신)을 형상하는 것이지, 일정한 시점과 시공간을 통해 볼 수 있는 현실 속의 소나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 그려진 소나무가 《논어》 〈자한〉 편의 “추운 계절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디 시듦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라는 전고에 함의된 ‘소나무=절의(節義)’라는 유가적 이념을 형상한 것처럼 말이다. 중세의 미술은 ‘고전(古典)’ 위에서 축조된 정신적 사유 내지 신념의 물리적 구현인 것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 1844년, 국보 180호 수묵화, 23 × 69.2cm, 국립중앙박물관. 추사가 제주도 유배지에서 소동파(蘇東坡)의 〈언송도(偃松圖)〉를 떠올리며 그린 조선 후기 문인화(文人畵)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풍경화의 풍경은 ‘지금 여기’에서 고정된 시점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해 파악되는 외부의 객관 대상이다. 이것을 기하학적 원근법(투시도법)이라 한다. 곧 산수가 ‘고전’이라는 고래로부터의 시간적 흐름 위에서 반복된다면, 풍경은 ‘지금 여기’라는 찰나의 공간적 현장 안에서 출현한다. 따라서 문학적, 철학적이면서 종교적, 역사적인 이야기를 구현해온 중세 회화와 달리, 풍경의 원근법으로는 이야기적 시간성을 가지는 정신과 사물의 서사적 개념이나 대상을 구현해내기가 쉽지 않다. 화가의 고정된 시점에서 즉자적으로 대면된 단순한 풍경으로서의 풍경만이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게으르그 짐멜이 「풍경의 철학」에서 통찰한 것처럼, 자연에는 조각이 없다. “자연은 전체의 통일이며 거기서부터 무언가가 떨어져 나온다면 그 순간 그 무언가는 자연이 아니게 된다. 경계선 없는 통일 그 속에서만, 전체의 흐름의 물결 속에서만, 그것은 ‘자연’으로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전체의 통일’이란 외부 풍경에 대한 다면적, 종합적 조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육화된 이념과 신성, 역사의 통일체에 대한 총체적 세계 감각을 의미한다. 

풍경과 산수, 리얼리즘 소설과 고문(古文)

그런데 이러한 풍경과 산수의 차이는 미술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의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논의될 수 있다. ‘풍경으로서의 문학’이 고정된 시점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해 주체와 분리된 외부 대상에 대한 객관적, 사실적 묘사를 통해 가능하다면, ‘산수로서의 문학’은 한문으로 전승되어온 과거의 고전을 전고를 통해 이념적, 형식적으로 반복 소환함으로서 가능하다. 따라서 풍경화가 근대 리얼리즘 소설에 대응된다면, 산수화는 한문 글쓰기에서의 고문(古文)에 대응된다. 

메이지 일본의 대문호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는 『문학론』 서문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에 즐겨 한학(漢學)을 배운 경험을 술회한 후 “문학은 이와 같은 것이라는 막연한 정의를 어렴풋하게나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국어(國語)』, 『사기(史記)』, 『한서(漢書)』로부터 얻었다. 가만히 따져 보니 영문학도 또한 이와 같은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생을 바쳐서 배워도 반드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였다.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는 사생문(寫生文) 잡지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를 연재한 바 있다. 이 작품은 소세키가 조나단 스위프트나 로렌스 스턴 등 17~18세기 영문학사에 새로이 등장한 ‘산문-희극-서사적인 글쓰기’(밀란 쿤데라)로서의 ‘소설’을 참조하여 집필한 것이다.

위에 열거된 한학서는 지금의 기준으로는 역사서에 가깝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는 ‘(한)문학=고문’이다. 고문은 인칭이나 객관, 묘사에 구애받음 없이 고래의 역사적, 철학적, 문학적 텍스트(레퍼런스)들을 참조하고 인용하면서 반복하고 변주한 산문이다.

새로운 것이냐, 오래된 것이냐

근대의 풍경화(리얼리즘 소설)가 ‘지금 여기에서’ 주체와 공간적으로 분리된 외부의 객관 대상에 대한 사실적, 개성적 자기표현에 강박되어 있다면, 중세의 산수화(고문)는 ‘고래로부터’ 주체와 시간적으로 연속된 과거의 문학과 역사, 철학 텍스트(고전)를 전범으로 삼아 계승하는 것에 몰두한다. 전자의 미감이 ‘새로운 것’을 긍정하는 근대적인 것이라면, 후자의 미감은 ‘오래된 것’을 긍정하는 중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지금의 예술이 기존의 규칙에 얼마나 부합하느냐가 아니라 기존의 규칙을 얼마나 ‘일탈’했느냐로 평가받는다면, 중세의 예술은 기존의 규칙을 얼마나 일탈했느냐가 아니라 기존의 규칙에 얼마나 ‘부합’하느냐로써 평가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일탈조차도 옛것을 전범으로 삼은 바탕 위에서만 비로소 존재가능하다는 정신 태도이다. 이것을 법고창신(法古創新) 또는 계왕개래(繼往開來)라 한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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