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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경쟁업체로 옮길 권리’ 보장 캘리포니아와 獨명차, 이래야 창조경제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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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03호 최영태 편집국장⁄ 2016.10.04 13:18:47

(CNB저널 = 최영태 편집국장) 최근 2주새 CNB저널의 온-오프라인 기사에는 ‘직장인의 전직(轉職) 권리’에 대한 기사가 3개나 연달아 실렸습니다. 

첫 번째는, 지난 9월 19일자 CNB저널 온라인의 [LG-삼성, 美 실리콘밸리서 ‘고용 방해’로 집단소송 당할 위기 - LG전자의 전 임원 “LG와 삼성이 채용 막는 부당한 협정 맺어”]였습니다. 

LG전자 미국 법인의 전직 영업부장 A. 프로스트(A. Frost) 씨는 삼성전자 미국 법인으로 자리를 옮기려다가 채용 관련자가 “LG의 직원을 삼성에 소개해주면 안 된다. 미안하다. 두 회사는 서로 상대 회사의 직원을 고용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고 알린 것에 착안해, LG전자-삼성전자 두 회사를 상대로 △직원들의 이직 기회를 방해해 급여 상승을 제한하고 △반독점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는 뉴스였습니다. 

이 소송을 맡은 변호사 조셉 세이버리(Joseph Saveri)는, 이미 작년 초에 구글, 애플, 인텔, 어도비 등 실리콘밸리의 거대 기업들이 이처럼 근로자의 전직을 막는 ‘노-포칭(no-poaching) 합의’를 맺어 근로자에 피해를 끼쳤다는 집단소송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4억 15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받아낸 경험도 있어, LG전자와 삼성전자를 상대로 한 소송의 앞날에 궁금증이 더해집니다. 

여기서 포칭(poaching)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몰래 잡아먹기, 빼앗기’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쓰입니다. 사냥이 금지된 장소에서 몰래 사냥을 하는 것도 포칭이요, 남의 애인을 몰래 뺏는 것도 포칭이라고 합니다. 기업들 사이에서는 상대 회사의 유능한 직원을 빼내오는 게 포칭이 되겠지요. 

기업 간에 맺어지는 ‘노-포칭 합의’는 “우리 서로 상대 직원 빼내지 맙시다”가 된다. 개인보다는 단체, 근로자보다는 기업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이 ‘노 포칭 합의’가 아주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홍콩 거리에서 자태를 뽐내는 BMW와 벤츠. 두 기업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성장한 자동차 디자이너 이야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그러나 근로자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나쁜 합의가 되지요. 덩치 큰 회사들끼리 “너희 직원이나 우리 직원이나 서로 전직을 못하도록 막자”고 비밀협정을 맺으면 어떻게 됩니까? 샌프란시스코에서 소송을 제기한 프로스트 씨처럼, 삼성전자에 빈자리가 생겼다는 소리에 반색을 하고 그 자리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LG전자에서 일한 당신은 애당초 자격이 안 돼요”라는 기막힌 답변 밖에 들을 수 없겠지요. 일자리도 뺏기고 연봉 올릴 기회도 날아가니 당하는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 되겠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이런 데서도 앞서가네

그런데 이 기사와 관련해 검색을 하다 보니 ‘나름 감동적인’ 팩트와 만나게 됩니다. 미국의 여러 주 중에서도 캘리포니아는 이런 ‘노 포칭 합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미국은 주마다 법이 다 다르지요. 

‘노 포칭 합의’는 비즈니스-근로 계약서에 들어가는 ‘경쟁 제한 조항(no-compete clause)’ 중의 하나입니다. 비즈니스를 사고 팔 때 ‘이 가게를 판 사람은 반경 5km 이내에선 유사한 업종의 가게를 향후 2년간 오픈해서는 안 된다’는 개업 금지 조항은 비즈니스에 대한 경쟁 제한 조항이 됩니다. 권리금을 짭짤히 받고 가게를 판 사람이 바로 인근에 똑같은 가게를 내도록 놔둔다면 기존 가게를 인수한 사람은 바보가 되지요. 그러니 이런 비즈니스 경쟁 제한 조항은 충분히 근거가 있고, 캘리포니아 주법도 인정합니다. 

단, 캘리포니아 주법이 전면 금지하는 건, 바로 ‘노 포칭 합의’처럼 근로자의 이직 권한을 막는 경쟁 제한 조항입니다. 회사끼리 이런 협약을 맺는 걸 캘리포니아에선 금지하고 있으므로, 프로스트 씨는 당연히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요. 

미국에는 50개 주가 있지만, 그 중 법률 제정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주는 대개 캘리포니아입니다. 자동차 배기가스에 대한 규제는 거의 항상 캘리포니아에서 ‘너무 쎈’ 규제법을 만들고 나면, 자동차 업체들이 “그렇게 강력한 규제하면 우린 다 망한다”며 강력 항의를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의 다른 주들도 비슷한 입법을 하면서, 결국 자동차 업계가 굴복했다는 기사를 여러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뿐 아니라 근로자 보호 측면에서도 모범적인 법제화를 이뤄나가는 캘리포니아주 대법원 건물의 모습. 사진 = 위키피디아

“규제는 암덩어리”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친재벌 전문가들이 보면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가장 암덩어리가 많은 땅이 되겠지만, 실제로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주에 꼽히니, 한국의 친재벌 전문가들의 말이 과연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올바른 규제까지 암덩어리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심해보게 됩니다.

BMW-벤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재교환

미국의 앞서 나가는 주 캘리포니아가 ‘노 포칭 합의’ 같은 못된 짓을 일절 금한다는 따뜻한 정보를 접한 뒤, 이번에는 지난주 CNB저널(통권 502호, 9월 26일~10월 2일자)에는 경쟁도 참 명품스럽게 하는 독일 명차 BMW와 벤츠의 이야기 [100살 BMW “내가 최고” 자랑에 벤츠 “동생 많이 컸네”]가 실렸습니다. 

프랑스인 자동차 디자이너 폴 브라크(Paul Bracq)가 1960~1970년대 벤츠에서 일하다가 BMW 디자인 임원으로 채용됐을 때 벤츠가 조용히 참았고, 그 뒤 이번에는 BMW의 핵심 디자이너 카림 하비브(Karim Habib)가 2009년 벤츠로 옮겼지만 BMW가 가만히 참았다가 2년 뒤 그를 임원으로 다시 모셔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근로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독일에서도 이처럼 핵심 디자이너가 자유롭게 두 브랜드를 오갈 수 있었던 것은 벤츠와 BMW 사이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지요. 더 큰 성취를 위한 이직을 막지 않고 그 직원이 더 큰 사람이 됐을 때 임원으로 모셔오는 명품스러운 경쟁을 하기에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는 벤츠와 BMW가 됐다고 합니다. 

한국 법원도 ‘합리적 전직 제한’만 인정 판결

그러면 한국의 실정은 어떨까요? 미국에서 한국 전자업체 거인 둘 사이의 ‘노 포칭 협정’이 논란이 됐듯, 한국 안에서는 경쟁사로 자리를 옮기는 근로자에 대해 ‘A업체의 기밀을 경쟁 B업체로 빼돌리는 질 나쁜 사람들’로 배척받거나 아니면 전직장의 소송으로 근로자가 곤욕을 치르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지요. 

이런 와중에 최근 한국에서 이뤄진 한 판결을 고윤기 변호사가 이번호 칼럼 [근로자의 경쟁사 전직, 무조건 영업비밀 침해 아니다 - 전직금지 약정, 구체적·합리적 범위만 인정](20~21면)에서 소개합니다.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미국의 창의기업들. 근로자의 전직 제한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캘리포니아의 근로자 옹호 법제가 이들 창의기업들을 유인하는 한 요인이 될 듯도 싶다. 사진 = 위키피디아

칼럼에 따르면 S전자의 상무급 연구임원이 2014년 말 퇴직했다가 2016년 초 경쟁사인 H반도체로 이적했는데, S전자는 2016년 12월 이전에 동일 업종에 취업한 것을 서약서 위반이라며 고소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이 연구원이 H반도체에 취업한 행위가 S전자의 영업비밀을 침해할 우려가 없다면 전직금지 약정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이 연구원이 가지고 있는 기술은 퇴직 전부터 업계에 알려진 것이므로 이 연구원이 H반도체에 입사하더라도 S전자의 영업비밀이 침해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고 변호사는 소개했습니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반가운 판결이라 하겠습니다.

그간 한국 정부는 줄곧 ‘기업하기 좋은 나라’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자랑해 왔습니다. 듣기 좋은 말입니다. 헌데, 잘 생각해 보면 한 나라의 경제에는 기업만 있는 게 아니라 중요 이해당사자로 근로자도 있지요.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게, 근로자에게도 잘해주면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뜻이라면(미국에선 그런 뜻이지요) 환영할 만하지만, 반대로 그 말 뒤에 숨겨 놓은 뜻이, ‘근로자를 때려잡아 꼼짝 못하게 함으로써 기업 하기 좋게 만들겠다’라면, 그리고 그런 방향으로 행정을 해나간다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라 하겠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 근로자 하기 참 안 좋은 나라가 되면, 결국 경제의 두 이해당사자 중 하나가 불구가 되는 것이니 결국 경제가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그런 면에서 앞선 캘리포니아의 법제, 그리고 인재 육성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독일 명차들, 그리고 합리적 판단을 내려준 한국 법원의 판결 모두가 반가운 소식들이라 하겠습니다.

캘리포니아가 미국 창의기업의 본산이 된 배경에는 캘리포니아의 근로자 보호 법제가 있을 것이며, 세계를 누비는 독일 명차의 인재채용 원칙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는 듯합니다. 박근혜정부가 내건 창조경제의 의미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만약 거기에 ‘근로자에게 숨쉴 공간을 내줌으로써 창의적이 되게 하자’는 것이라면, 근로자를 옥죄는 법규나, 또는 지나치게 재벌 오너 편만 드는 판결은 “이제 그만~” 해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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