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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남미의 파리’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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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11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6.11.28 09:44:11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4일차 (부에노스아이레스)

온세역 앞 이민자 거리

호텔을 나와 천천히 걸어 온세(Once)역까지 간다. 온세역은 부에노스의 주요 기차역 중 하나로, 북서쪽 방향 열차가 여기서 출발한다. 청량리역쯤 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주로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출신 이민자들이 몰린 역 부근은 사람과 가게, 행상들로 늘 북적인다. 노숙자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지만 거리의 악사는 벌써 하루를 시작하는 오전 10시다.

남미 스페인어권에서는 아르헨티나가 거대한 블랙홀임을 말해 준다. 거리에 오가는 인종도 매우 다양하다. 메스티소는 물론 백인도 이탈리아계, 스페인계, 독일계, 동유럽계 등 매우 폭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흑인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 또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큰 차이다. 사탕수수 재배할 일이 없었기에 흑인 노예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온세역 부근에서 수브테를 타고 레티로로 향한다. 출근 시간이 아직 지나지 않았는지 매우 혼잡해서 차량 한두 대를 보내고 겨우 승차했다. 아주 낡은 목제 차량의 백열등이 깜빡거린다. 오늘도 33도를 예상한다. 레티로에서 수브테를 내린 뒤 물어물어 이민자박물관(Museo del los Inmigrantes)을 찾아 갔으나,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일반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문서보관 시설이다. 그 대신 이민 관련 민원 처리를 위해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민국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이민자의 나라임을 증명해 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도 차이나타운이

레티로에서 교외통근열차를 타고 벨그라노(Belgrano) 지역에 있는 차이나타운(Barrio Chino)을 찾아 간다. 열차는 부두를 오른쪽으로 보면서 올라간다. 철도와 부두 하치장 사이 고립된 섬 같은 공간에 빈민가가 늘어서 있다. 브라질 파벨라(Favela)보다 더 참혹한 모습이다. 벨그라노는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인 외곽 주거지역인데 의외로 그곳에 작은 규모나마 차이나타운이 둥지를 틀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 광장인 마요광장. 스페인 식민 지배의 부당함에 맞서 독립을 선언한 1810년 5월 혁명을 기념하는 ‘5월의 탑’이 있다. 사진 = 김현주

▲벨그라노 지역에 있는 차이나타운. 중국 식당 몇 개, 기념품이나 공예품 가게, 아시아 식료품점 몇 개가 전부인 작은 지역이다. 사진 = 김현주

역을 나오니 바로 앞에 패루가 보인다. 1810년 5월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2009년 건립했다고 기록한 기념비가 패루 바로 옆에 서 있다. 차이나타운은 중국 식당 몇 개, 기념품이나 공예품 가게, 아시아 식료품점 몇 개가 전부인 작은 지역이다.

그중 아시아 식료품점 한 곳에 들어가 본다. 생선과 육류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신라면, 너구리, 초코파이 등 한국 식품도 중요한 아이템이다. 서울방앗간에서 만든 가래떡도 한 코너 차지하고 있다. 스낵코너에서 볶음밥을 시켜서 먹었다. 양이 아주 많아서 강행군해야 하는 오늘 저녁까지 든든할 것 같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에서 가이드 없이 지도 한 장에 의지해 스스로 찾아다니는 일은 쉽지 않다. 우선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고 안내 표지가 부실해 수없이 물어 보고 확인해야 한다.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안 되겠지만 나 같은 초행길 방문자는 헤맬 수밖에 없다. 초행자도 쉽게 찾아 갈 수 있도록 안내가 충실한 대중교통 시스템과 완벽한 도로표지판을 갖춘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도시가 늘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이유를 알고도 남겠다.

차이나타운을 나와 후라멘토(Juramento) 거리를 네댓 블록 걸어 올라가니 수브테역이다. 수브테로 팔레르모(Palermo) 지역을 찾는다. 길이 넓고 숲이 울창한 우아한 지역이다. 가로수가 늘어지고 프랑스식 주택이 많은 이 지역은 한때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남반구의 낙원이었음을 말해 주기에 충분하다. 식물원, 동물원, 일본 정원이 있는 이탈리아 광장의 시원한 그늘에서 한참동안 더위를 식힌 후 시내버스를 타고 레사마(Lezama) 공원으로 향한다. 

▲팔레르모 지역의 길은 넓고 숲이 울창하다. 가로수가 늘어지고 프랑스식 주택이 많다. 사진 = 김현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러시아정교당

레사마 공원의 작은 언덕을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마침 불어와 더위를 식혀 준다. 공원에는 1536년 이 도시를 개척한 멘도사 동상이 있고, 동상 뒷면에는 그와 함께 항해해 온 선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원 바로 바깥에는 1904년 건립한 러시아정교회당(Iglesia Ortodoxa Rusa)이 파란색 ‘양파 돔’을 얹고 서 있다. 화려한 성삼위 모자이크 타일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두 블록 동쪽으로 걸으니 산텔모(San Telmo) 지역이다. 항구와 가까워 일찍부터 유럽 이민자들이 정착한 지역이다. 이 지역 한복판 도레고(Dorrego) 광장에서 거리 탱고 공연이 열릴 것을 기대했으나 아직 시간이 이른지, 아니면 날이 너무 더운지 탱고를 추는 사람들은 없다. 라쿰파르시타 연주만 스피커를 타고 흐른다. 

5월 광장

버스로 몇 정거장 이동하니 드디어 마요광장(Plaza de Mayo)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 광장인 이곳에서는 대통령 취임식을 비롯해 집회와 시위가 자주 열린다. 광장 한 가운데에는 스페인 식민 지배의 부당함에 맞서 독립을 선언한 1810년 5월 혁명을 기념하는 ‘5월의 탑’이 있다. 독립 1주년에 세웠으니 200년이 훨씬 넘은 탑이다.
탑을 마주 보고 대통령궁이 서 있다. 5월의 탑을 중심으로 대통령궁 맞은편에는 시청사와 메트로폴리탄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가톨릭 문화권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성당이 있어서 비를 피하고 추위나 더위를 피하며 휴식을 취하기에 그만이다. 성당 내부에는 독립 영웅 산마르틴의 영묘(mosoleum)가 있다.

▲러시아정교회당이 파란색 ‘양파 돔’을 얹고 서 있다. 화려한 성삼위 모자이크 타일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사진 = 김현주

포클랜드 전쟁

광장 한켠에 각종 구호가 나부낀다. 그중에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 패배로 영국에 빼앗긴 말비나스 제도(영국 지명은 포클랜드 제도) 문제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 많다.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가장 아픈 부분인 포클랜드 전쟁은 1982년 아르헨티나가 남대서양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일으킨 전쟁이다. 당시 영국 대처 정부의 강력한 응전에 따라 아르헨티나의 항복으로 끝났다.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는 실각해 민간에게 정권이 이양되는 계기가 됐다. 포크랜드 앞 바다엔 엄청난 양의 원유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라도나와 월드컵

그 후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앙숙이 돼 월드컵 축구 경기장에서 만날 때마다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드디어 1986년 아르헨티나는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잉글랜드를 만나 2대 1로 이겨 4년 전 포클랜드 전쟁 패배의 아픔을 위로받는데 이날 두 골 모두 축구 신동 마라도나가 기록했다. 한 골은 그 유명한 ‘신의 손’ 논쟁을 불러일으킨 골이고, 또 한 골은 잉글랜드 수비수 6명을 제치며 60미터를 단독 돌파해 기록한 월드컵 사상 가장 위대한 골 중의 하나다. 그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당시 세계 최강팀 서독을 3대 2로 이겨 두 번째 월드컵을 차지했다.

남미의 파리

5월의 광장에서 멀리 오벨리스크(Obelisco)를 보며 레푸블리카 광장까지 걷는다. 광장 앞으로는 넓디 넓은 폭 140미터짜리 7월 9일 대로(Avenida de 9 Julio)가 지나고 광장 중앙에는 대형 아르헨티나 국기가 펄럭인다. 마지막 기운을 내 콜론극장(Teatro Colon)과 유대교당이 있는 산니콜라스 지역까지 간다. 콜론 오페라 극장은 거대한 건축물인데 마침 보수공사 중이다. 유대교당 옆에는 국립 세르반테스 극장이 있다. 이처럼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공연장, 극장, 미술관, 박물관이 즐비한 문화의 중심지여서 ‘남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것이다.

▲마요광장 앞에는 폭 140미터짜리 7월 9일 대로가 있다. 사진 = 김현주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콩그레소(Congresso) 광장을 지난다. 지붕에 구리돔을 얹은 국회의사당이 있는 광장은 아르헨티나의 기점 0킬로미터, 즉 지리적 중심이기도 하다. 의사당 건물은 군정 시절 오랫동안 폐쇄됐다가 1983년 민정 이양 후 다시 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의사당 광장 한켠에는 한때 멋진 모습을 뽐냈을 고딕첨탑 건물이 흉물로 방치돼 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이 나라 경제 사정을 말해 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25일차 (부에노스아이레스 → 상파울루)

공항행 8번 시내버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는 먼 길에 오르는 날이다. 에세이사 국제공항은 시내 서북쪽 35km 지점 먼 곳에 있지만 항공기 출발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고 무엇보다도 도시의 다른 부분을 떠나는 순간까지 느껴보고 싶어서 8번 시내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간다. 8번 버스는 라바다비아(Rivadavia) 거리를 끝까지 올라가더니 공항을 바로 앞에 두고 공항 부근 크고 작은 동네를 빙빙 돌아 결국 두 시간 걸려 공항에 도착했다. 요금은 상상할 수 없이 저렴한 2페소(한화 600원). 그런데도 항공기 출발까지 무려 4시간 넘게 남았다. 

버스가 지나 온 도시 외곽은 보잘 것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성에 전혀 걸맞지 않는다. 잘 가꾸고 관리했더라면 예뻤을 도시가 외곽으로 갈수록 무질서하다. 도시를 예쁘게 가꾸려면 돈이 많이 든다. 멋진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이렇게 쇠락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버스에서 새삼 느꼈지만 아르헨티나는 더 이상 압도적인 백인의 나라는 아니다.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를 남미의 백인 3국이라고 배웠지만 가보지 못한 우루과이를 제외하면 최소한 대도시에서는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30여 년 전 지리 교과서가 쓰일 당시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인접 국가에서 이민이 많이 들어오면서 유럽 백인 후손들의 혈통적 순수성은 희석된 지 오래다.

▲도레고 광장에서 거리 탱고 공연이 열릴 것을 기대했으나 아직 시간이 이른지, 아니면 날이 너무 더운지 탱고를 추는 사람들은 없다. 사진 = 김현주

지구 문명의 남쪽 끝 서쪽 끝 부에노스아이레스

에세이사 국제공항에서는 북미와 유럽 주요 도시 뿐만 아니라 멀리는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말레이시아 항공, 두바이행 에미레이트 항공, 도하행 카타르 항공, 요하네스버그행 남아공 항공도 떠난다. 그러나 묘하게도 여기서 떠나는 거의 모든 항공기의 목적지는 북쪽 아니면 동쪽이다. 그만큼 이곳은 인류 문명의 남쪽 끝이자 서쪽 끝이라는 뜻이다.

상파울루행 항공기가 하늘에 오르자 끝없이 이어진 불빛의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산이 없이 평탄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떠나는 나에게 멋진 야경으로 이별의 파티를 열어 준다. 상파울루까지 비행시간 2시간 30분. 기내식으로 나온 소고기가 입에서 녹는다. 상파울루에는 거세게 비가 온다. 남미 전역을 돌다가 브라질에 다시 오니 브라질 사람들은 구분이 갈 정도로 생김새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포르투갈계가 주축인 브라질 백인과 스페인, 이탈리아계가 주축인 아르헨티나 백인의 용모가 다르다는 뜻이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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