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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의 요즘 미술 읽기 - 시간을 담는 미술] 정지 화면에 시간을 차곡차곡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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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15-516호(신년) 이문정(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2016.12.26 10:05:51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2016년의 마지막 주이다. 지난 칼럼에서 벌써 올해가 다 지났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시간은 흐른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워하고 아쉬워한다. 편의를 위해 우리는 시간을 숫자화하여 하루, 한 달, 일 년으로 정리하고 매일을 살아가지만 엄밀히 말해 시간은 그 시작과 끝을 잘라낼 수는 없는 오묘한 영원성을 갖는다. 멈춰 서지도 않는다. 간혹 판타지 혹은 SF 영화 같은 상상 속에서 – 과학 발명품이나 초능력자 등에 의해 - 시간이 정지하기도 하지만 일시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흘러간 시간과 지금 이 순간, 앞으로 내게 올 순간들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현재라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은 찰나가 아니다. 이 순간의 앞과 뒤에는 영원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가 펼쳐져 있다. 현재는 마치 정반대인 것 같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접점이다. 순간은 결코 순간이 아닌 영원인 것이다. 

시간이 신비로운 이유는 또 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수치화된 시간이라 하여도 늘 상대적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것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특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흘러가는 상대성을 갖는다.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시간이 실제로는 가장 주관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하는 모순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결국 나의 시간, 나의 하루, 나의 삶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나를 스쳐가는 순간들은 영원하지만 시간 속의 우리들은 모두 언젠가 사라진다. 어쩌면 퇴색되고 사라지는 것은 과거의 시간이 아니라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벤자민 버튼(Benjamin Button)의 시간도 거꾸로 가는 것일 뿐 유한했다. 허무함과 간절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지점이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은 미술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오늘날의 미술 작품들 중에는 관객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정량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감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작품 자체가 흐르는 시간을 담아내는, 스스로 러닝 타임(running time)을 갖고 있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중 미디어 아트(media art)는 말 그대로 작품 자체가 물리적인 시간을 담아낸다. 실제로 이전 칼럼(요즘 미술 읽기 17)에서 미디어 아트의 대표적 특징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꼽았었다. 특히 작품 자체가 움직이는 키네틱 아트(kinetic art), 움직이는 영상이 작품의 주요한 부분인 비디오 아트(video art)에서 관객은 흐르는 시간을 보다 명확히 인지하게 된다. 샘 테일러 우드(Sam Taylor-Wood)의 ‘정물(Still Life)’(2001)이나 ‘작은 죽음(A Little Death)’(2002)처럼 과일, 토끼의 시체 등이 부패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퍼포먼스(performance)처럼 – 그 전개가 계획적이든, 즉흥적이든 간에 - 일정한 내러티브를 갖는 경우에도 작품 안에 시간이 담긴다. 영화나 연극의 일부분만 보고 난 후 제대로 관람했다고 말할 수 없듯이 이러한 작품들은 최소한 러닝 타임 동안은 작품을 마주해야 한다. 잠시 한 눈을 팔면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도 있다. 

관객이 전시장에 머무는 시간까지 작품이 되는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이나 과정 미술(process art)에서는 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 전시된 이후에 일어나는 변화와 작용들까지도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자연히 흐르는 시간을 체험하며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이제 고전이 된 한스 하케(Hans Haacke)의 ‘병아리 부화(Chicken’s Hatching)’(1969)는 말 그대로 전시 기간 동안 병아리가 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작품이었고 관객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 달걀에서부터 병아리까지 -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구본창, ‘백자의 시간’(2015) 전시장. 사진제공 = 이도 아뜰리에

사실 요즘 미술의 경우, 과거에 비해 관객들의 행위가 더해져 완성되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실제의 시간을 함유하는 작품들도 늘어났다. 특정한 작가와 작품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힘들 정도이다. 이 경우 작품, 작품이 놓이는 공간, 그리고 관객이 함께 하는 만남의 시간 모두가 작품의 부분이 된다. 일례로 하케는 작품 ‘게르마니아(Germania)’(1993)를 위해 베니스 비엔날레(Venezia Biennale) 독일관의 실제 바닥을 허물었는데, 관객들이 부서진 바닥을 걸으며 파편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관객의 발걸음으로 바닥이 더 부서지는 것 등을 체험하는 것까지도 작품의 일부였다. 전시장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이 작품이었던 것이다.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발표되었던 김수자의 ‘호흡 - 보따리(To Breathe - Bottari)’(2013) 역시 관객들이 어둠과 빛을 체험해나가는 모든 명상적 과정이 작품이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6: 김수자 - 마음의 기하학’(2016)에는 관객들이 지름 19m의 원형 테이블에서 찰흙으로 구(球)를 만들어 올려놓는 작품 ‘마음의 기하학(Archive of Mind)’이 전시되었다. 이러한 김수자의 작품 속에서 관객들은 사색과 치유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시간의 축적을 담는 구본창의 사진들

그런데 때로는 작품 자체에 흐르는 시간이 담겨 있지 않더라도, 작품이 움직이거나 관객이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더라도 시간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신기한 작품들이 있다. 구본창의 ‘백자 시리즈’가 대표적일 것이다. ‘백자 시리즈’뿐만 아니라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모든 오브제(object)들은 그저 물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길게는 수백 년의 시간을 담아내는 경외의 대상이자 감정의 동인(動因)이다. 스스로 “시간이 축적된 것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작가는 ‘유한한 것에 대한 연민과 오래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서정적으로 담아낸다. 시간이 흐르면서 손때가 묻고 상처도 난 물건들에 대한 연민은 그것을 사용한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되고, 역사에 대한 숙고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에 그 모든 것이 압축된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사진 앞에 서면 관객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숙연함과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숨 1’(1995)에 등장하는,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 같은 시계는 말로 다 이야기할 수 없는 시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시간 그 자체를 고스란히 마주하게 한다.   

누군가는 올해가 빨리 가기를 바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올해가 조금만 더디게 가기를 바라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든 시간은 흐르고 곧 새해가 밝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포함한 모두는 또 한 해의 시간을 때로는 행복하게, 때로는 힘겹게, 그리고 때로는 묵묵히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쌓여 찬란하고 소중한 삶이 채워질 것이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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