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경제] 스마트폰 덕에 ‘세로 세상’ 됐는데 왜 신용카드만 가로?
▲‘현대카드, 카드의 방향을 바꾸다 - 디자인편’ 광고 화면. (사진 = 광고화면 캡처)
광고가 시작된다. 비비드한 컬러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익숙한 폰트로 자막이 뜬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고개가 꺾어진다. 쉽게 안 읽히고, 불편하다. 자막이 90도 돌아가 있어서다. 신경 쓰이는 것은 또 있다. 프레임 오른쪽 경계 너머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중력을 무시한 몸짓으로 허공을 들락날락 하는데, 역시 위아래가 90도 돌아가 있다. 아마도 프레임 오른쪽 바깥에 있는 트램폴린을 이용해 뛰어오르는 모양이다. 소파에 누우면 해결된다. 바른 자세로 TV를 보도록 교육하는 집에서라면 TV를 떼어 옆으로 세워둬야 하겠다.
현대카드가 지난 2월 1일 공개한 티저 광고의 카피가 바로 그렇다. “지금 이 광고, 화면 돌려버리고 싶죠? 현대카드가 돌아버린 이유. 카드의 방향을 바꾸다. 현대카드.” 그리고 1주일 뒤에 공개한 ‘현대카드, 카드의 방향을 바꾸다 – 디자인 편’의 카피는 이렇다. “현대카드가 돌았다고 했죠? 맞아요. 세상이 다 변하는데 그대로인 건 못 참겠으니까. 세상 처음 세로 카드. 카드의 방향을 바꾸다. 현대카드.”
이 광고들의 임무는 현대카드가 새 디자인을 통해 신용카드를 가로 구도가 아닌 세로 구도로 바꿨음을 알리는 일이다. 이제 대부분의 신용카드 결제는 마그네틱을 가로 방향으로 긁는 대신 IC칩을 세로 방향으로 꽂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신용카드를 쥐는 방법, 보는 시선 등이 달라졌으니 디자인도 그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고 설득하기 위함이다.
이 광고는 도발적이다. 시청자가 자막 읽기에 불편을 느끼면, 불편을 끼치고 있음을 시인한다. 또한, “자막을 눕히다니, 돌았나?” 싶은 생각이 들면, 자신들이 “돌아버렸다”고 시인한다. 강조하는 어법 때문에 ‘돌다’의 rotate(회전하다)라는 의미와 crazy(미치다)라는 의미가 중의적으로 와 닿는다.
새 카드 디자인에 대한 이유도 밝힌다. “세상이 다 변한다”고 전제하며 “그대로인 건 못 참을 일”이란다. 즉, 아직도 신용카드 디자인이 가로 방향이라면 그것은 못 참을 정도로 구닥다리다, 따라서 디자인이 돌아버린(이때는 단지 회전의 의미) 현대카드의 신용카드만이 트렌드에 예민하게 대응한 신용카드라는 뜻이다.
여기까지가 이 광고가 전하려는 메시지다. 평소 돌아버린 광고주가 변한 트렌드에 맞춰 돌아버린 디자인의 제품을 내놓았다는 새로운 정보를 알린다. 여기서 돌아버린 광고주란, 이제껏 혁신적인 마케팅을 펼쳐온 현대카드를 말한다.
프레임을 깨는 크리에이티브
그러나 이 광고의 진가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 광고는 ‘제품의 특징을 반영한 광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카드가 그런 디자인을 내놓게 된 과정을 반영하는 동시에 TV 광고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까지 담았다. 오늘날 변해버린 트렌드는 신용카드 결제방식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청자는 이 광고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스마트폰 사용 경험을 떠올린다. 스마트폰 화면은 대개 세로다. 사람들은 TV나 모니터보다 스마트폰을 보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세로 포맷의 동영상은 이제 그다지 낯설고 불편한 것이 아니다. 셀카나 화상전화가 그렇고, 스마트폰을 플랫폼으로 이용하는 SNS에서도 흔하다. 몇 년 전 아이돌그룹 EXID의 차트 역주행을 주도한 거리공연 ‘직캠’ 동영상도 세로 포맷이었다.
스마트폰뿐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웹페이지, 웹툰, 일반 문서도 대부분 세로 방향 스크롤로 보게 되어 있다. 모니터 기기 자체도 화면 방향을 90도 돌릴 수 있는 ‘피봇(pivot)’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대부분의 OS가 이 기능을 지원한다.
사람의 눈은 좌우로 두 개. 따라서 가로로 벌어진 시야에는 가로 포맷의 프레임이 편안하다고 알려져 왔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화면이 점점 가로로 길어지는 형태로 발달한 데는 이러한 이론의 바탕이 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시선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데 더 익숙하다. 사람들은 스마트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또는 PC 모니터 화면을 마우스 휠을 위아래로 훑으며 정보들을 접한다.
하지만 거실 TV와 극장 화면은 여전히 가로 포맷을 고집하고, 동영상 광고도 대부분 이 포맷이다. 광고인이라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크리에이티브를 고민해야 한다. 더 나은 크리에이티브를 위해서는 프레임을 깨는 혁신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현대카드 광고가 보여준 시도는 이 틀에 박힌 포맷을 돌려버림으로써 영상 문화의 트렌드를 쫓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으로도 보인다.
▲현대카드의 세로 카드 디자인. (사진 = 현대카드)
돌아버린 광고주와 돌아버린 대행사
남들이 스타 연예인을 내세우고, 포인트와 무이자 할부 혜택을 줄줄이 읊을 때 현대카드는 “인생 삐딱하게 살아보자”고 랩하는 앵무새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고, 세계 최고의 뮤지션들을 초청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콘서트 티켓을 구하고 싶게 만들었다. 남들이 서비스 상품을 팔 때 현대카드는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팔았고, 그러한 현대카드의 DNA를 품은 현대카드 광고 역시 대부분 세련됐다는 평가와 함께 화제가 되어 왔다.
돌아버린 것은 광고 대행사인 ‘메이트 커뮤니케이션즈’도 마찬가지였다. 메이트는 지난 2000년에 설립되어 꾸준히 흑자를 내고 있는 강소 기업이다. 스키장에서 긴 머리 김태원을 내세운 핫초코 광고, 폴로와 빈폴을 겨냥해 “굿바이 폴”을 과감히 얘기한 헤지스 광고 등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해마다 광고업계에서 선정하는 각종 상을 수상하며 업계 10위권에 오를 만큼 성장했다.
메이트는 “반복은 재앙이다. 세상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 것은 모독이다”라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크리에이티브의 방향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메이트 피플이라면 세상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며, “남들과 같다면, 단 1초라도 참을 수 없다”는 문장을 모토로 삼고 있다. 이번 광고의 카피는 이러한 메이트의 기본 철학과 통했던 것이다.
메이트는 현대카드의 새로운 신용카드 디자인을 광고에 고스란히 담았다. 이들은 가로 × 세로 3840 × 2160 비율의 크고 선명한 4K 화면을 새 카드 디자인과 같은 비비드한 컬러로 채워버린 것도 모자라 화면의 방향 역시 카드와 마찬가지로 세로로 돌려버렸다. 그러나 TV 수상기를 세로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자막은 옆으로 누워있으며, 전달해야 할 메시지의 가독성은 저하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런 점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시청자들의 뇌리에 남았다. 현대카드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는 순식간에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렸고, 이들은 ‘세계 최초 세로 카드’는 틀렸다며 과거에도 있었던 세로 디자인 신용카드들에 관한 자료를 찾아 올릴 정도로 적극적인 피드백을 던졌다. 주목받고, 기억되고, 인구에 회자되는 데다 메시지도 정확히 전달했다. 성공적으로 잘 만든 광고다.
윤지원 yune.jiw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