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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왜 서울 사니?” 나올 때까지 계속되길…文대통령의 ‘지방분권 개헌’ 환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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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59호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2017.10.27 11:46:59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10월 26일 전남 여수에서 열린 제2회 시도지사 간담회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새로운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시대를 열겠다. 지방이 튼튼해야 나라가 튼튼해진다. 새정부는 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잘사는 강력한 지방분권 공화국을 국정목표로 삼았다. 명실상부한 지방분권을 위해 지방분권 개헌을 추진하겠다. 자치입법권·자치행정권·자치재정권·자치복지권의 4대 지방 자치권을 헌법화하겠다. 수도권이 사람과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매우 반가운 소리죠? 대통령이 멀리 여수에서 열리는, 과거 정권이라면 ‘하찮다’고 볼 수도 있었을(‘정권 안보’에 전혀 도움이 안 되니) 행사에 직접 참가한 것도 이례적인 데다가, 4대 지방자치권을 헌법에 명시하겠다니, 신라의 한반도 통일 이래 중앙(서울)집권에 눌려 맥못추던 한국의 지방이란 곳들이 새 헌법 아래에서 회생될지를 지켜보는 것도, 앞으로 이 정권의 남은 기간 동안 재밌는 볼거리가 될 전망입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각 시도 지사들이 10월 26일 오전 전라남도 여수시 여수엑스포에서 열린 제2회 시도지사 간담회에서 각 시도 마스코트를 들고 기념촬영하며 미소짓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억눌려온 지방의 실상이야, 지난 5월 9일까지 이어진 ‘이른바 보수정권’ 아래서 한국 국민들이 신물나게 지켜봤습니다. 대표적인 게 누리과정 예산과 관련해 벌어진 보육대란 같은 거죠. ‘무료 보육 실현’이란 대통령의 공약을 실현하는 것처럼 중앙정부는 생색을 내고, 그 비용 부담은 모조리 지자체와 지방교육청 등에 부담시키면서 벌어졌던 게 보육대란입니다. 

중앙과 지방의 이른바 8대2 구조, 즉 세금을 걷어 8을 중앙정부가 가져가고, 나머지 2만 딸랑 지자체에 남겨두는 방식이 이 나라엔 온존합니다. 지방정부는 중앙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아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으므로 지방민과 지방 공무원은 중앙정부의 하급관리에게라도 넙죽 엎드려 바다 같은 배려만 앙망해 왔습니다. 이런 구조 덕택에 중앙부처의 공무원 또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은 마치 제 주머닛돈 내주듯 생색을 잔뜩 내며 나랏돈을 지방에 하사하면서 제 뱃속을 불려왔던 게 바로 한국의 8대2 예산구조입니다. 

이런 구조를 조선시대 이래 대를 이어 봐온 지방민들은 그저 서울 쪽만 바라보는 것만도 황공스럽고,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어. 서울에서만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란 패배주의에 젖어온 거 아닌가요?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하는 게 민주주의의 요체이고 정신이라면, 한국의 지방이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를 할 수 없는 질곡 속에 갇혀 있었다고 할 만한 이유입니다.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 서울' 현상 끝낼 수 있을까 

문 대통령의 표현대로 ‘수도권이 사람과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는 현상은, 한국 정부 수립 직후(1948~50년), 그리고 5.16 쿠데타 전후 시기(1958~63년)에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했던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에 의해 정확히 간파됩니다. 그가 당시를 회상하며 쓴 책이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1968년 출간)이고, 이 책에서 그가 묘사한 한국의 현실, 즉 소용돌이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는 서울의 정치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더구나 그가 한국의 지방 현실에 대해 써 놓은 부분을 읽으면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입니다.  

일본 치하에서는 독립적인 경제인들이나 중요한 지위에 있는 관리들이 지방의 도시나 항구에서 기업을 신장시키거나 출세할 수 있었지만 한국 고유의 제도에서는 모든 근거지가 서울 아니면 안 됐고, 모든 야심가들은 서울에 가지 않으면 안됐다.(316쪽) 

일본강점기 시대에는 지방도시에서도 기업을 할 수 있었고 출세도 할 수 있었지만, 한국 고유의 제도로 돌아가면 그런 성공이 불가능하다는 이 진단은, 지금의 한국 현실 그대로이지요? 

흔히 일본을 한국 같은 중앙집권국가로 알지만 실정은 조금 다른 모양입니다. 한국에선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인 서울’ 대학들이 완전히 한반도를 평정했지만, 일본 유학 경험자에 따르면 수도 도쿄의 도쿄대학교가 물론 1등이지만, 교토의 교토대학도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만만치 않고, 동북 지역의 명문 도호쿠대학 등 대학의 지방분권화가 한국인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이뤄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한때 지방 국립대가 명문으로 통했었지만, 한국 특유의 ‘서울 소용돌이’는 이제는 그 어떤 지방 국립대도 ‘인 서울 대학’ 아래로 내려보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헨더슨의 말대로 ‘일제시대 때 현지에서 출세가 가능했던 대표적 지방 도시’로는 부산이나 군산 등이 있지요.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되지만, 1930년대의 부산은 서울의 뺨을 때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1936년 3월 ‘후산닛포’(부산일보의 일본식 발음)가 지령 1만호 기념사업인 ‘항港 릴레이’, 즉 동군과 서군 기자단이 부산을 출발하여 동해안과 서해안 끝인 웅기와 진남포 항구들을 거쳐 항해하는 릴레이는 부산이 반도의 중심이란 걸 과시하는 행사였다. ‘후산닛포’도 조선과 일본 각지, 만주, 상하이로 지사를 늘려가며 국제적 신문사로 부상했다.(한석정 저 ‘만주 모던 -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 83쪽)

부산이 한반도의 중심이란 걸 과시할 수 있을 정도로 부산의 기세가 강해지고, 부산일보도 글로벌 신문사가 되면서 ‘서울보다 우리가 한 수 위’라는 생각을 부산 사람들이 품을 만 했다는 전언이지요.  

부산이 이런 야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만주국-한반도-일본열도를 포함하는 일본대제국의 영토 안에서 부산이 ‘교통 핵’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여건에서 기여했던 듯 합니다. 

부산은 조선의 여타 도시와 다르게 총독부 소재지 경성을 우회하고 도쿄, 오사카, 펑텐, 신징 같은 대도시와 직접 접촉하기를 꿈꾼 제국 속의 '글로벌 시티'였다. (중략) 1930년대에 부산을 중심으로 일본 제국을 한 덩어리로 만들려는 노력이 해상, 육상, 해저, 상공에서 무서운 속도로 추진됐다. (중략) 일본 제국은 수송혁명으로 산업혁명을 시도한 셈이고(‘만주 모던’ 86~87쪽)
   
지금은 부산에서 서울 행 열차가 ‘상행선’이지만, 당시 더 큰 수도인 도쿄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건 ‘하행선’이 됩니다. 현재 부산항이 중국, 러시아, 일본을 아우르는 지역 최대의 물류항이 된 현상은, 이미 1930년대 일본에 의해 이뤄졌다가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은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1920년대 군산항에 쌓아진 '쌀탑'의 사진. 한반도 식민지에 대한 수탈의 상징이지만, 당시 대량 쌀 수출을 계기로 군산의 일본 상인과 일부 조선인이 떼돈을 버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호남 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대(大)수출항이었던 군산의 위세는, 당시 쌀 가마니로 탑을 쌓아올린 ‘쌀 탑’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산업이라야 농업 밖에는 없던 일본강점기 초-중기에는 호남이 한반도의 ‘경제 서울’이라 할만 했으며, 호남이 조선 전체를 먹여살린다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당시 기록이 전합니다.  

국사 교과서에서 가르치듯 쌀의 대일 수출은 당연히 엄청난 수탈의 과정이었지만(굶주리는 조선 피식민지 사람들을 놔둔 채 쌀을 일본으로 실어갔으니), 이 과정이 수출의 형식으로 이뤄졌으니 그 과정에서 당연히 떼돈을 번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돈을 번 것은 일본인들이었지만, 그에 기생한 조선인 상인도 당연히 배출됩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대표 격인 안병직, 이영훈 두 교수의 대담집인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 당시에 대한 경제적 분석이 잘 기록돼 있습니다.
 
개항 이전에는 지주라는 말이 없었고, 또 전통적인 양반 가문이라 해봐야 토지 규모가 200~300두락, 대략 15~20정보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 반면에 개항기와 식민지기를 거쳐 성장한 신흥 지주의 토지 규모는 1천 정보를 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변화의 기본 요인은 역시 시장. 쌀 수출하는 대규모 시장이 열리니까 거기서 성공한 자들이 대주주로 변신(‘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124쪽) 
 
이처럼 쌀 수출로 떼돈을 번 신흥 지주들이 이른바 민족자본으로도 커가고, 그들 대부분이 조선 왕조 아래서라면 불가능했을 떼돈을 일본의 식민지배 덕분에 벌 수 있었으니, 그들의 거의 전원이 친일파가 된 것도 사실 당연한 현상이지요. 

일본이라는 대외 요인이 있기에 그랬지만, 그래도 일본강점기에는 지방도시에서도 출세와 성공이 가능했는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통치하게 된 해방 이후에는 서울로 가지 않으면 그냥 바보가 되는 나라를 만들었다니 창피한 노릇 아닌가요? 요즘은 많이 줄었지만 한때 나이든 분들이 푸념하듯 내뱉곤 하던 “일정 때가 그래도 살기는 좋았어”라는 말에는 분명 이런 근거도 있을 것입니다. 

지방분권에 대한 의지를 이어가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 ‘지방을 살리려’ 나선 경우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지방 발전에 공이 있지만, 그 주요 대상이 경상도, 특히 자신의 고향인 경북에 치우쳐 빛이 바랬습니다. 특히 “5.16쿠데타 이후 공화당에서 만든 경북 발전특위가 경북 출신 향토 재벌을 육성”했고 그래서 “삼성-럭키-효성 같은 향토 기업이 생겨난 것”(김욱 ‘아주 낯선 상식’ 122쪽)이라는 내용까지 접하고 나면, 구토증이 날 정도입니다. ‘권력을 잡았으니 다른 지역은 상관없고, 우리 경북만 잘 살면 된다’는 지역 이기주의가 극을 달렸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경북 출신 대통령이 권력을 잡았다고 해도, 집권 여당 안에 경상북도만 잘살게 하겠다는 ‘경북 발전특위’가 만들어졌고 편향적인 자금지원-공단개발이 이어졌다니 말입니다. 

‘김대중 자서전’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정치인 김대중에게 별명을 붙인다면 ‘미스터 지방자치’가 제일 어울릴 것도 같다”는 문구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1990년 지방자치제 실시를 내걸고 단식투쟁까지 벌여 1991년 이를 실현해냅니다.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은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뒤 14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실의에 빠졌던 시절인 1994년에 안희정-이광재와 함께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세워서 운영했을 정도로 지방분권에 대한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당시 낙선 의원으로서 거의 잊혀진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연구소를 세우고 운영했다는 것은 그의 평생에 걸친 지향을 일부 읽게 해줍니다. 

▲국회의원 재선에 낙선했음에도 불구하고 1994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만들어 지방자치에 대한 평생의 지향을 드러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실무강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사진=노무현 사료관)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러한 지향성은 2006년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크게 보도된 정권 핵심부의 “우리는 부산 정권” 발언, 그리고 부산에서 표를 얻기 위한 부산에 대한 집중 투자 논란 등으로 역시 빛이 바랩니다. 최근 ‘과연 참여정부가 호남을 홀대했느냐’는 논란이 벌어졌고, 인사-예산 등의 차원에서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팩트-숫자로서 증명되기도 했지만, 당시 언론이 거의 완전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참여정부가 자신들의 고향 부산에 상당한 애착을 가졌음 역시 팩트라 할 수 있겠습니다. 

김대중-노무현이라는 두 탁월한 정치인이 지방자치의 꿈을 키웠다고는 해도, 그들에게도 박정희와 비슷한 성향, 즉 “고향의 발전을 위해 서울의 대권을 차지한다”는 의식이 없었다고 할 수 없고, 또 그런 것이 유권자들이 세상을 보는 ‘시대의 정신’이었다고도 할 수 있기에, 앞에서 말한 돈의 서울8 대 지방2의 구도는 변함없이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1849년 프랑스의 유명한 삽화가 오노레 도미에가 그린 토크빌의 캐리커쳐.(이미지=위키피디아)

이제 문재인 정권이 ‘강력한 지방분권 개헌’을 국정목표로 삼겠다니, 199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방자치를 되살린 뒤에도 ‘서울 중앙권력의 스위치를 어느 지역 출신 대통령이 잡느냐’를 주제로 벌어지던 한국의 서울 소용돌이식 정치가, 앞으로는 ‘지역을 움직이는 스위치를 지역 사람들이 얼마나 스스로 잘 잡느냐’라는 지방 소용돌이식 지방정치로 방향을 잡아 나갈 수 있을지 기대를 걸어봅니다. 

"지방자치 안 되면 민주주의 안 돼" 간파한 토크빌

헌데, 왜 지방자치가 중요한가요? 지방자치라는 게 결국은 지방 토호들(지역의 '장'들과 토건업자들의 연합)의 전횡을 보장하는 장치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이런 질문이 당연히 떠오릅니다.  

여기서,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 대해 꽤 의미있는 분석을 내린 것으로 평가되는 알렉시스 토크빌의 생각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인으로서 1831~32년, 즉 미국 건국 초창기에 미국을 방문하고 1835년 ‘미국의 민주주의’란 책자를 내놓은 그는, 프랑스에서 안 되는 민주주의가 미국에서 잘 되는 이유를 지방자치에서 봤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정부 관리들을 지방에 파견하는 것이지만 미국에서는 마을이 그 관리들을 정부에 빌려준다.  
미국에서는 이와 반대로 마을(타운)이 카운티보다 먼저, 카운티가 주보다 먼저, 주가 연방보다 먼저 조직됐다.
권력과 자주성을 갖지 못한 마을은 착한 신민은 가지게 될지 모르지만 능동적인 시민은 가질 수 없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써 놓은 말들입니다(박홍규 저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에서 재인용)

▲미국 버몬트 주 헌팅톤의 타운 미팅. 실내체육관에 주민들이 모여 주요 현안을 토론하고 결정내리는 이런 전통이 아직도 미국에는 살아 있다.(사진=위키피디아)


한국처럼 모든 것이 파리 집중인 프랑스에서는 중앙정부가 지방 관리를 파견하지만, 미국에서는 지방정부가 먼저 구성되고 자신들이 지역 문제에 대한 권력과 자주성을 가지며, 중앙정부에 지방의 인재들을 ‘빌려준다’는 사실을 보고 토크빌은 놀랐고, “이게 바로 민주주의다!”라고 선언한 것이지요. 

위에서 인용한 세 번째 문장, 즉 ‘권력과 자주성을 갖지 못한 마을은 착한 신민은 가지게 될지 모르지만 능동적인 시민은 가질 수 없다’라는 것은, 바로 촛불혁명 이전의 한국 지방민의 모습 아닌가요? 자주성을 갖기 못하기에 착한 신민만 가득한 지방…, 그래서 부정과 비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1번만 줄창 찍어온 신민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자 “전하~~”라는 비명을 외치면서 엎어지는 사람들…. 우리가 봐온 지방민들의 한 측면입니다. 
 
토크빌의 책이 프랑스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뒤 프랑스에서는 자신들도 미국의 헌법과 법을 모방하여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를 세우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토크빌은 헌법과 법만으로는 무가치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무엇보다도 국민의 사회 상태와 함께 모럴이 중요하다며 이런 개념들을 강조했다.(‘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109쪽과 117쪽)  

미국을 닮고 싶었지만 프랑스에는 미국 같은 지방자치의 토대가 없었기에 그건 불가능하다고 토크빌은 진단했다는 소리고, 그 결과를 우리는 현재의 중앙집권적 프랑스에서 그대로 발견합니다. 

박홍규 교수는 “토크빌에 의하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문제가 있다면 이는 한국에 지방분권적 민주주의의 모럴이 없기 때문이다”(위 책 121쪽)이라고 진단합니다. 지방분권적 민주주의가 없으면 한국 전체의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는 얘기지요.   

"지방분권이 안 되서 한국 민주주의가 안 된다"고?

지방자치란 주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식이며, 이는 시민들이 자신이 사는 폴리스의 문제를 해결해나간 데모크러시(demo/시민 + cratia/힘, 즉 민주주의)의 방식 그대로입니다. 폴리스를 흔히 ‘도시국가’라고 번역하지만, 아테네의 최대 인구라야 30만 정도에 불과했고, 그 중에서도 여성이나 노예는 제외하고 성인남자 시민 3만 명 정도를 중심으로 민회 등에 모여 중요 결정을 했다니, 그리스 민주주의는 그저 종합대학 1곳의 학생 총원이 자주 집회를 연 것 정도의 규모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리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원류로 본다면, 그리고 대의민주주의(대표를 뽑아 중앙에 보내는)에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면, 지방자치라는 작은 규모의 민주주의를 알차게 실행하는 것이, 토크빌이 말한 ‘능동적인 시민’을 길러내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지방자치가 안 되면 민주주의가 안 되는 원리는 고 신영복 선생의 책 ‘변방을 찾아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변방을 말한 건, 변방 사람이라야 새 길을 열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리스가 이집트의 변방이 아니었다면, 로마가 그리스의 변방이 아니었다면, 영국이 유럽의 외딴 섬이 아니었다면, 프랑스가 로마의 변방이 아니었다면, 독일이 프랑스의 변방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유럽에서 완전히 격리된 신대륙이 아니었다면 과연 기존의 중심을 뛰어넘는 창조성이 발휘됐겠냐는 질문입니다. 

중앙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내재화하면 안 되는 변방

그러나 변방이라고 ‘무조건' 창조성을 갖는 건 아니랍니다. 중앙에 대해 “콤플렉스가 구조화되어 있는 경우라면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목표를 세우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우리가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가를 깨닫는 일”(28쪽)이랍니다. 

앞 단락에서 예를 든 그리스, 로마,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특징은, 비록 출발은 변방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저거, 중앙이라고 해봐야 내가 이길 수도 있겠는데?”라는 건방진 생각을 품기 시작했고, 덤벼들고보니 어느덧 정복돼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건방짐을 품지 않으면 영원히 변두리로 찌그러져 남게 된다는 얘기이지요. 우리의 지방은 서울에 대해 그런 건방짐을 품어본 적이 있나요? 그저 지역의 잘난 사람들이 “우리가 서울로 진출해 서울의 요직을 차지하면 중앙정부의 돈을 주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의 바보들을 영원히 우리 앞에 무릎꿇릴 수 있다”는 음험한 생각만 품어오지 않았나요? 

즉 서울보다 더 나은 우리 지역을 만들겠다는 창의-창발성보다는 서울을 관습법 상의 영원한 수도로 놔둔 상태에서, 그 서울의 음성적인 지휘권만을 자신들이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향토에서 대를 물려 권세를 누리겠다는 일그러진 욕심만이 ‘서울로 진출하는 지방 엘리트’와 ‘지역의 토호’들 사이의 협잡으로 이뤄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너 왜 거기 있냐?"고 묻는 질문에 "당신은 왜 여기 없냐?"고 댓거리 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강준만 교수는 책 ‘지방식민지 독립선언’에서 중앙권력이 지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안이한 인식(252쪽), 지방자치의 문제마저도 위에서 아래로 일시에 해결하려는 1극 집중 중독증. 이 병을 고치지 않으면 답이 없다(271쪽), 지방의 이익만을 위한 게 아니라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291쪽)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지역 문제는 서울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는 ‘중병’에서 지역 사람들이 벗어나는 게 한국 전체가 걸린 중병에서 벗어나오는 해법 중 하나라면, 문재인 대통령의 ‘강력한 지방분권 공화국 헌법’ 처방은 치료법을 제대로 짚어냈다 하겠습니다. 

‘시민저항’이라는 책을 1849년 써내 톨스토이→간디→마틴 루터 킹으로 이어지는 비폭력-시민불복종의 흐름의 원류를 만들고, 20세기 역사를 바꿔낸 정신적 기원이 된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있지요. 

그는 노예제를 유지하고, 멕시코를 쳐들어가는 미국 정부에는 세금을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버티다가 결국 감방에 갇힙니다. 그를 면회하러 온 당대의 미국 지성 랠프 왈도 에머슨이 그에게 “너 왜 거기 있냐?”고 묻자 소로는 “당신은 왜 여기에 있지 않소?”라고 반문했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지요. 그런 나라에서는 감방 속이 더 정당한 위치라는 주장이지요. 

지금은 서울 사람들이 지방민에게 묻지요. “넌 왜 서울에 안 사냐?”고. 이런 건방진 질문에 대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넌 왜 서울 사니?”라고 웃으며 말대꾸해줄 수 있는 세상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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