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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그림 속 길을 걷는다 (9) 청풍계~옥류동 下 ①] 가재우물 찬물로 목 축일 날 되돌아올까

할머니 기억 속 우물, 지금은 철창에 갇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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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90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06.04 09:33:56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옥동척강도(玉洞陟崗圖)를 따라 버드나무 약수터까지 올라왔다. 체육시설 뒤 산 쪽으로는 수량이 풍부한 약수물이 있다. 맑은 석간수가 가득하고 누군가 넣었는지 금붕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서울의 약수터 대부분이 그렇듯이 음용불가 판정이 내려져 있다는 점이다. 약수물들이 대부분 음용불가가 된 것은 관리소홀로 인한 것인데 수도꼭지를 달고 입구를 막으면 좋은 물이 될 샘이 많을 터인데 아쉬운 생각이 든다. 

 

옥동능선 올랐던 7인은 과연 누구?


그날 옥동능선길을 올랐던 7인의 선비도 여기까지 올랐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더 오르는 산길이 가파른 직벽에 막혀 있기에 더 오르려면 우회해야 하는데 그날의 기록을 보면 청풍계로 내려갔으니 이곳에서 동쪽으로 길을 잡아 청풍계 계곡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올랐던 7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전회(前回)에 소개한 이춘제의 글 서원아회(西園雅會)를 보면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본인 이춘제(李春躋), 조현명(趙顯命), 송익보(宋翼寶), 서종벽(徐宗璧), 심성진(沈星鎭)이며 나머지 두 사람은 불분명하다. 어떤 이는 겸재 정선이 그림을 그렸고 사천 이병연이 詩를 썼으니 이들 7인이 아니었겠느냐고 추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춘제가 본인이 말한 대로 지비(知非, 5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했으니 겸재는 64세, 사천은 69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이들 40, 50대와 같이 옥동능선을 오르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두 사람은 아니라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갔다. 

 

되돌아본 옥동능선의 현재 모습. 사진 = 이한성 교수

더구나 이춘제는 소론(少論), 겸재나 사천은 노론(老論)으로 당색이 달랐으니 예술을 사랑하는 면에서는 통했으나 그밖의 면에서는 일상적으로 함께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서종벽(徐宗璧)의 시문집 사오재유고(謝五齋遺稿)에서 이날의 기록을 찾아낸 연구자가 있어 그 이름들을 알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5인 이춘제, 조현명, 송익보, 서종벽, 심성진 이외에 조영국(趙榮國), 황정(黃晸)이 그들이다. 


앞장서서 지팡이를 내저으며 가는 이는 조현명임이 분명하다. 갑자기 생긴 일이라 흔히 있어야 할 주효(酒肴: 술과 안주)도 없고 노복(奴僕)도 사동(使童)도 없다. 그런데 사유재문고에 거론된 황정(黃晸)은 이춘제의 글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니 단순 실수인지 무슨 이유가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기왕 ‘옥동척강도’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하나만 더 짚고 가자. 이춘제가 ‘서원아회기’에서 자신은 詩를 못 쓰는데 억지로 썼다고 죽는 소리를 했는데 과연 이 양반은 시를 어떻게 썼을까? 그날 쓴 씨가 사오재유고에 남아 있다. 그날 조현명이 내놓고 자신이 지은 시(詩)의 운(韻)은 평성(平聲) 경(庚) 운(韻)으로 成, 晴, 輕, 生, 淸 다섯 글자를 운으로 살려 짓는 칠언율시(七言律詩)였다.


*한시(漢詩)는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정해진 운을 붙여 마무리한다. 현재 사용하는 운(韻)은 106운인데 반드시 정해진 운을 사용해야 근체시(唐 이후의 정형시)가 된다. 또 하나 소리의 높낮이를 맞추는 규칙이 있는데 평측(平仄)이라 한다. 이춘제가 자기는 배우지 않았다 하는 것은 운(韻)과 평측(平仄)이 서툴다고 엄살을 부린 것이다. 또 조선시대에는 연회가 벌어지면 누군가가 운(韻)을 내어 시를 짓고, 다른 이들이 답하는 것이 풍류였다. 우리 시대에 한 잔 하면 노래방에서 한 가닥 뽑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선비가 이것을 못하면 선비도 아니었고, 임금이 내놓은 시에 화답을 못하면 벼슬살이인들 어찌 평탄했겠는가.


이춘제도 이 다섯 글자를 살려 답시를 지었다. 평가는 독자 여러분께서. 

 

소원(小園)의 멋진 모임 우연히 이루어지니
지팡이질 부지런히 맑은 저녁 소요하네.
신선인 듯 번거로움 사양하니 마음 벌써 평안하고
구름진 산 탐승하니 다리 더욱 거뜬쿠나.
시원하게 올라 오늘 저녁 수고롭다 말 마세
멋진 놀이는 이生에 제일이라 감히 말하네.
헤어질 때 되었으니 정녕 후일을 기약하세.
장군(조현명)의 풍치는 늙을수록 맑다네.


小園佳會偶然成 
杖屢逍遙趁晩晴
仙閣謝煩心已稳
雲巒耽勝脚益輕
休言溒陟勞今夕
堪託奇游冠此生
臨罷丁寧留後約。
將軍風致老猶淸 

 

이제 옥동능선을 버리고 옥류동(玉流洞)으로 가려 한다. 옥류동은 지금의 청와대 경내인 장동의 무속헌(無俗軒)과 선원 김상용의 청풍계와 더불어 장동 김씨들의 터전이 된 곳이며, 장동 김씨들의 후원을 입은 겸재가 어김없이 그 풍경을 진경산수로 남긴 곳이기에 지나칠 수 없는 골짜기이기 때문이다.

 

청휘각 정자에 얽힌 사연들


이곳에 이르는 길은 청풍계 길 위쪽 끝에서 좌향좌 하여 경복교회 위 골목길을 지나(세심대 능선 끝) 옥동능선을 넘는 옥인 5길인데, 이 길은 옥동능선의 길을 막은 서울교회 아래쪽 첫 골목과 연결되는 길이다. 이렇게 두 능선의 위쪽을 가로질러 넘으면 Yoon’s라고 쓴 붉은 벽돌집을 지나 작은 체육공원이 조성된 골짜기의 상류에 닿는데, 바로 이곳이 옥류동 상류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겸재의 그림 청휘각(晴暉閣)을 복사한 안내판이 서 있고 이곳이 청휘각 터임을 알리고 있다. 옥동능선 끝 버드나무 약수터에서는 서쪽 사직동 방향으로 길을 잡아 자락길 400~500m를 진행하면 좌측 아래 작은 체육공원으로 내려오는 층계를 만난다. 그 아래가 바로 청휘각 터에 해당된다.

 

흔적만 남은 약수터. 마실 수는 없고 물속에는 누군가 풀어준 금붕어가 산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청휘각 그림을 곰곰 살펴보면 청휘정(晴暉亭)이라 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곳을 기록한 다른 그림이나 자료들은 청휘각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청휘각으로 기술하려 한다. 이 청휘각은 인왕산을 바라보는 정면에서 보면 계곡의 왼쪽에 그려져 있다. 국립박물관 소장 그림이 청휘각을 대표하는 그림인데, 리움(leeum)이 소장한 겸재의 ‘옥류동(玉流洞)도’ 또한 이곳 청휘각을 그린 그림으로 국립박물관 소장 청휘각도와 구도가 유사하여 청휘각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하나 반가운 것은 겸재(1676~1759년)보다 50여년 뒤 태어난 화가 권신응(1728~1781)의 옥류동도가 전해진다는 점이다. 그 그림에도 겸재의 그림과 같이 청휘각이 그려져 있고 그 정자에는 晴暉閣, 좌측 능선 넘어 골짜기에는 水聲洞, 앞쪽 산에는 仁王山이라 쓰여 있어 정확한 위치 파악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가로 세로 한 간(間)의 작은 정자는 누가 왜 세운 것일까? 후세에 옥류동에는 윤덕영의 벽수산장이 자리잡았는데 청휘각이 있던 자리에 일양정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벽수산장의 정원을 연구한 김해경 씨(건대)의 자료를 살펴보자. 이곳 청휘각을 세운 장동 김씨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10세손이며 청휘각의 마지막 주인인 김학진의 글이 소개되어 있다.

 

겸재의 청휘각 그림(국립박물관 소장).
팻말만이 옛날 위치를 알려주는 청휘각 터. 사진 = 이한성 교수

“김학진의 ‘벽수산장일양정기’에는 옥류동 송석원 일대가 문곡 김수항의 별장이며 본거는 육청헌이라 불린다고 했다. 우측으로 20보(步)에서 30보 떨어진 곳에 주변 조망이 좋은 청휘각이 있으며, 해당 지역을 ‘玉流洞’이란 바위 글씨로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옥류동의 송석원은 나의 선조 문곡 김수항의 별장이다. 선생의 옛집이 서울 북부 순화방에 있었는데 그 뜰에 겨울철에도 청청한 여섯 그루의 나무가 있어 슬하에 여섯 자제를 둔 것과 서로 맞았다. 그리하여 집 이름을 육청헌(六靑軒)이라 하였다. 그 집에서 오른쪽으로 20, 30보(步)를 가서 한등성이를 넘으면 그 기슭에 언덕과 골짜기가 아름답고 산골물이 얽히고 굽이친다. 이를 차지하니 아침저녁으로 지팡이 끌며 거닐 만하고 특히 청휘각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구경할 만하였다. 이곳을 옥류동(玉流洞)이라고 하였는데, 우암 송시열의 필적이라고 한다.”


위 글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장동 김씨들의 주거지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청풍계 그림을 소개할 때 한 번 살펴보았듯이, 선원 김상용은 청풍계에 자리잡았으며, 그 아우 ‘가노라 삼각산아’의 주인공 청음 김상헌은 지금 육상궁(毓祥宮: 칠궁) 옆 청와대 경내에 해당하는 종가 무속헌(無俗軒)에 거주하였다. 김극효의 두 아들 선원과 청음이었지만 큰 아버지 김대효가 후사(後嗣)가 없었기에 청음 김상헌은 큰아버지 댁으로 양자를 가 종가의 주인이 되었다. 청음은 이른바 삼수(三壽)라고 부르는 壽자돌림 세 손주를 두었는데 그 중 막내 김수항(金壽恒)은 머리 좋고 건강하여 육창(六昌)이라 부르는 걸출한 여섯 아들을 두었다. 창집(昌集),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집(昌緝), 창립(昌立). 이 중 창흡과 창업은 겸재가 그림 그리고 글 읽는 데에 영향을 미친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 눈병 고치려 찾아낸 옥 같은 생물 


이렇게 식구가 많아진 김수항은 안국동과 옥류동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게 된다. 옥류동 집은 육청헌(六靑軒: 1683년)이라 이름 짓고 여섯 그루의 나무를 심어 여섯 아들이 끗꿋하게 자라줄 것을 바랐으며, 집 이름도 육청(六靑)이라 하여 여섯 아들이 청사(靑史)에 남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기슭 하나 너머에 있는 골짜기 가에는 맑고 맑은 작은 정자 청휘각(晴暉閣)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장동김씨의 영역은 청와대 주변 장동, 청풍계, 그리고 능선 넘어 옥류동까지 넓어졌다. 이 옥류동 집은 경제(京第), 한성제(漢城第), 북동제(北洞第), 북리제(北里第)라고도 불렸다는데 여기에서 第는 아우가 아니라 집이란 뜻이다. 


그런데 식구가 늘었다고 이미 기계유씨 유척기(兪拓基) 등 다른 가문이 자리잡고 있던 옥류동으로 김수항은 갑자기 넘어온 것일까? 김상헌의 청음집에는 그 힌트가 될 산행기가 실려 있다. 유서산기(遊西山記)라는 산행기인데 여기에서 서산(西山)이란 인왕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일부를 고전번역원의 번역을 인용하여 살펴보자.

 

위에서 내려다본 옥류동의 모습. 사진 = 이한성 교수
권신응의 옥류동 그림. 청휘각이 보인다.

“갑인년(1614, 광해군 6년) 가을에 어머님께서 눈병이 나셨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서산(西山)에 신통한 샘이 솟아나는데 병든 사람이 머리를 감으면 이따금 효험을 보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마침내 날을 잡아 산에 올랐는데, 큰형님과 나와 광찬(光燦)과 광소(光熽)가 함께 따라갔다.


인왕동(仁王洞)에 들어가서 고(故) 양곡(陽谷) 소이상(蘇貳相)이 살던 옛집을 지났는데, 이른바 청심당(淸心堂), 풍천각(風泉閣), 수운헌(水雲軒)으로 불리던 것들이 지도리는 썩고 주춧돌은 무너져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양곡은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어 이미 귀하게 된 데다가 부유하였으며, 또한 심장(心匠)이라고 칭해졌으니, 집을 지으면서 교묘함과 화려함을 극도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교유하였던 선비들도 모두 한때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이 읊었던 것 중에는 필시 기록되어 전해질만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채 백 년도 못 되어서 이미 한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선비가 믿고서 후세에 베풀어줄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곳을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니 절벽에서는 폭포가 쏟아지고 푸른 잔디로 덮인 언덕이 있어 곳곳이 다 볼 만하였다. 다시 여기를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자 돌길이 아주 험하였으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다시 한 번 쉰 다음 샘이 있는 곳에 이르니, 지세가 공극산(북악산)의 절반쯤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높이 솟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새가 날개를 편 듯이 지붕을 얹어 놓은 것 같았다. 바위 가장자리가 파여 있는 것이 처마와 같아 비나 눈이 올 때 예닐곱 명 정도는 들어가 피할 만했다. 샘은 바위 밑 조그만 틈새 가운데로부터 솟아 나왔는데, 샘 줄기가 아주 가늘었다. 한 식경쯤 앉아서 기다리자 그제야 겨우 샘 구덩이에 삼분의 일쯤 채워졌는데, 구덩이의 둘레는 겨우 맷돌 하나 크기 정도이고 깊이도 무릎에 못 미칠 정도여서 한 자 남짓 되었다. 샘물의 맛은 달짝지근했으나 톡 쏘지는 않았고 몹시 차갑지도 않았다. 샘 근처의 나무에는 여기저기 어지럽게 지전(紙錢)을 붙여 놓은 것으로 보아 많은 노파들이 와서 영험을 빌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석굴의 앞에는 평평한 흙 언덕이 있었는데 동서의 너비가 겨우 수십 보쯤 되어 보였다. 비로 인해 파인 곳에 오래 묵은 기와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인왕사(仁王寺)의 옛 절터인 듯하였다. 어떤 이가 북쪽의 맞은편 골짜기에도 무너진 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옛 자취가 다 없어졌으니 분명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일찍이 듣기로는 국초(國初)에 도읍을 정할 때 서산의 석벽에서 단서(丹書)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산 전체가 바위 하나로 몸체가 되어 산마루부터 중턱에 이르기까지 우뚝 선 뼈대처럼 가파른 바위로 되어 있고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와 겹쳐진 절벽이 똑바로 서고 옆으로 늘어서 있어 우러러보매 마치 병기를 모아 놓고 갑옷을 쌓아놓은 것과 같아 그 기묘한 장관을 이루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산줄기가 이어지면서 산등성이를 이루고 여러 산등성이가 나뉘어 골짜기가 되었다. 골짜기에는 모두 샘이 있어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치매 수많은 옥이 찰랑거리는 것 같았는 바, 수석(水石)의 경치가 실로 서울에서 으뜸가는 곳이었다.” 


(歲甲寅秋. 慈闈目疾. 聞有靈泉出於西山. 病沐者往往輒效. 遂卜日以往. 伯氏及余燦,熽俱從. 入仁王洞. 過故陽谷蘇貳相舊宅. 所謂淸心堂,風泉閣,水雲軒者. 退戺殘礎. 殆不可分. 陽谷用文章顯世. 旣貴而富. 又稱有心匠. 結構極其工麗. 交遊之士. 皆一時詞翰聞人. 其所賦詠. 必多可記而傳. 至今未百年. 已無一二存焉. 士之所恃以施於後者. 不在斯也. 由此而上. 絶壁飛泉. 靑莎翠阜. 處處可悅. 又由此而上. 石路峻仄. 去馬而步. 再憩迺至泉所. 地勢直拱極之半. 一穹石. 翼然如架屋. 石際槌鑿狀屋簷. 雨雪可庇六七人. 泉從石底小縫中出. 泉脈甚微. 坐一餉. 始滿坎三分之一. 而坎周僅比一碾. 深亦不及膝尺剩. 泉味甜而不椒. 亦不甚冷冽. 泉之旁叢林. 紛然亂着紙錢. 多婆乞靈處也. 石窟之前. 土岸平衍. 東西纔數十步. 雨破出古瓦. 認是仁王寺遺址. 或言迤北對谷. 亦有廢基. 古跡陻沒. 莫能辨也. 嘗聞國初定都時. 得丹書于西山石壁云. 而亦不知處也. 山以全石爲身. 從頂至腹. 屹骨巉巖. 危峯疊壁. 直豎橫布. 仰視如攅兵積甲. 奇壯難狀. 支脈絡而爲岡. 群岡分而爲谷. 谷中皆有泉. 淸流觸石. 萬玉琤琮. 水石實都中第一區也)

 

가재우물이라고 불리게 된 옥류동 골짜기 샘물


청음 김상헌은 1614년 가을 형님 선원 김상용을 모시고 아들 광찬과 막내 조카 광소를 데리고 인왕산 등산길에 오른다. 모친께서 눈병이 났기에 좋은 샘물을 찾으러 나선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찾아간 곳은 인왕제색도에서 소개했듯이 아마도 지금의 석굴암이 자리한 곳이었을 것이다. 바위굴, 절터와 기와 파편, 처마처럼 덮여 있는 바위, 그 아래 샘. 그리고 글이 길어 줄였지만 아들과 조카가 끝까지 산을 올라 내려다본 사현(沙峴: 홍제동에서 오르는 무악재) 모두가 석굴암의 현재 상황과도 일치한다. 아직도 절 마당에는 기와 조각이 간간이 보이고, 한참을 기다려야 샘물이 고이는데 물맛도 특이하지는 않으며 누군가가 정성을 드렸던 흔적도 그대로이다. 어쩌면 400여 년 전과 이리도 같을 수 있을까? 

청음이 찾아갔을 석굴암의 샘물. 지금도 석간수가 고인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그 뒤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지만 결국 이들은 석굴암 샘물을 포기하고 새로 찾아낸 샘물이 아마도 후에 ‘가재우물’이라고 불리게 된 청휘각 아래 옥류동 골짜기 샘물이었을 것이다. 물을 찾던 그들이 자리잡은 곳이 이 지역이었으니 이곳에 자리잡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제 청휘각 터를 떠나 시멘트로 포장된 옥류동 길을 내려온다. 옥인9길이다. 집들이 옹기종기 길을 막아 미로 같은 골목길 밑으로는 옥류동의 물길이 하수로가 되어 흐른다. 옥류(玉流)가 어쩌면 이리도 하수(下水)가 될 수 있는가?


깨진 복개층 사이로 불빛을 비추어 물길을 비추어 본다. 석간수가 흐르던 계곡의 바위 물길이 어렴풋이 보인다. 아 반갑구나. 언젠가 형편이 좋아져 복개층을 깨어내고 하수를 달리 흘린다면 옥류동의 물길도 살릴 수 있겠구나. 

가재우물에서 먹을 물을 떠가는 아낙네의 모습. 자료사진
한때 유명했던 가재우물은 저 철창 안에 메말라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김수항이 지은 육청헌과 청휘각은 네째 아들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이 이어받았는데 이곳 샘물은 노가재의 호를 따서 가재우물이 되었다 한다. 1950년대까지는 이름난 약수였다는데 지금은 어느 집 지하 쇠창살 안에 초라하게 메말라 있다.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옥류동(玉流洞) 각자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가재우물을 지나 복개된 물길 위를 내려오다 보면 폐가가 되어 함석으로 가림막을 한 집 입구 대문 받침돌과 만난다. 태극 문양이 선명하다. 노가재와 관련이 있는 어느 건물 입구인가. 건너편 집 벽에 박혀 있는 장대석도 예삿돌은 아니다. 무너진 옛 건물의 한 부분이 이렇게 길을 잃고 을씨년스레 박혀 있는 것이다.

 

재개발 탓에 가게엔 물건도 부족하고

 

시간 너머로 남아 있는 구멍가게. 옥류동의 오늘을 말해준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이 지역은 그동안 재건축 지역으로 지정되어 사람들도 떠나고 집들은 퇴락할 대로 퇴락하여 어느 골목에 들어서면 마치 무엇인가 튀어나올 것 같다. 다행히 재건축 지역이 해제되었다 한다. 하마터면 옥류동이 산산이 파헤쳐져 아파트 단지가 될 뻔하였다. 대만의 옛 광산 지역 저우펀에 갔을 때 개미집 같은 집들과 미로를 살려 관광자원화한 그들의 저력이 많이 부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익선동이 살아나듯이 옥류동이 살아나 옛것과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재우물을 기억하시는 할머니와 한참을 우물 이야기를 하다가 골목 끝 1960년대 그 시간대에 머물러 있는 구멍가게에서 나이드신 주인 부부와 옥류동 이야기를 하며 음료수를 사 먹는다. 예전에는 장사가 잘되었는데 재개발 한다 하니 손님이 없어 아이스크림도 못 가져다 놓았다며 아이스크림을 찾는 내게 아주 미안해 하신다. 언젠가는 이 골목에 오면 가재우물로 목을 축이고, 옥류동 계곡수에 손 담그고, 수퍼가 된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었으면 좋겠다.<계속>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걷기 코스: 통의동 백송 ~ 자교교회 ~ 청운초교 ~ 백세청풍 각자(청풍계) ~ 맹학교(세심대) ~ 농학교(선희궁터) ~ 우당기념관 ~ 옥류동(청휘각, 가재우물, 송석원, 벽수산장 흔적) ~ 인곡정사터 ~ 박노수 미술관 ~ 백호정터 ~ 택견전수터 ~ 수성동 계곡 ~ 백사실 ~ 세검정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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