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주크박스 뮤지컬이라 해서 걱정했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노래가 중심이 되는 만큼 음악의 매력이 배가 되긴 하지만, 그만큼 스토리가 부실해지는 위험이 있기 때문. 그런데 신중현 작곡가의 곡들을 바탕으로 만드는 공연이라는 걸 알고 기대가 됐다. 중장년층을 비롯해 현재 10대들에게도 익숙한 ‘미인’ ‘아름다운 강산’ ‘커피 한 잔’ 등 수많은 명곡을 무대에서 들을 수 있는 기대감이었다.
그렇게 우려와 기대가 공존한 채 찾은 뮤지컬 ‘미인’. 그리고 최종적으로 뜻밖의 수확과도 같은 만족감을 얻었다. 우려했던 스토리 라인과 노래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뤘고, 노래의 편곡과 안무, 무대 구성까지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뮤지컬 ‘미인’은 1930년대 무성 영화관 ‘하륜관’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후랏빠 시스터즈와 함께 춤과 노래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타 변사 강호. 그의 곁에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 돌아온 형 강산과 강산의 절친한 친구이자 주먹으로 종로를 주름잡는 두치가 있다.
1막은 행복했던 강호에게 새로운 만남이 찾아오고 이로 인해 갈등이 시작되는 과정까지 그린다. 음악 레슨에서 만난 일본 형사 마사오와 강호는 음악적 교감을 나누지만, 이 모습이 형 강산과 두치에게는 탐탐치 않다. 여기에 미모의 신 여성이자 시인 병연에게 강호는 첫눈에 반한다. 병연은 강산, 두치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를 단순한 모임으로 착각한 강호에 의해 이들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
1막은 대체적으로 발랄한 분위기 속 시작된다. 형과 병연이 하는 독립운동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강호가 두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득 드러내기 때문. 신중현 작곡가의 히트곡 ‘미인’을 비롯해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떠도는 사나이’ ‘빗속의 여인’ ‘소문났네’ 등 총 17개의 곡이 펼쳐진다. 하지만 스토리와의 관련성을 크게 느끼기는 힘들다. ‘커피 한 잔’의 경우 배우들이 있는 배경이 카페라는 것 하나 이외에는 자연스러운 연결고리가 없어 노래가 갑자기 펼쳐지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노래와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기 시작하며 몰입도 또한 높아진다. 1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봄비’다. 1막에서 ‘봄비’는 총 두 번 불린다. 처음 불리는 ‘봄비’는 조용하게 불리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있다. 독립투사들을 감시하고 지켜보는 일본 형사 마사오와 그의 눈길을 피해 다니는 강산이 각자의 상황 속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라며 가사를 읊는다.
1막 엔딩곡으로 다시 불리는 ‘봄비’는 처연하고 또 장엄하다. 형 강산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강호의 바람이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무너진 가운데 현실을 다소 회피하려 했던 강호의 변화를 엿보게 해주는 노래이기도 하다. 노래 가사처럼 강호는 한없이 내리는 봄비처럼 쏟아지는 슬픔에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비가 그치는 순간을 기다리며 앞으로 나아겠다는 의지 또한 강하게 부르짖는다. 앞서 마사오와 강호가 불렀던 느낌과는 비슷한 듯 하면서도 사뭇 다르다. 같은 가사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점이 특별하다.
2막에 이르러서는 신중현의 곡들과 극이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강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노래와 병연의 이야기로 시대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당 시대에서는 금지된 영화를 올리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극 속 강호가 노래를 만드는 설정으로, 신중현의 곡들을 자연스럽게 하나둘 씩 들려준다.
1막의 하이라이트가 ‘봄비’였다면 2막의 하이라이트 곡은 단연 ‘아름다운 강산’이다. 마사오의 압박으로 원하지 않는 노래를 만들 위기에 처했던 강호는 ‘아름다운 강산’을 부른다. “봄, 여름 지나면 가을, 겨울이 온다네, 아름다운 강산” “우리는 이 땅 위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곳에 자랑스런 이곳에 살리라”는 가사가 극 속 배경인 1930년대를 뛰어넘어 2018년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깊은 감명을 준다.
노래의 매력을 흠뻑 살린 이 공연에서 또 발견한 보석은 배우 스테파니다. 그룹 천상지희의 멤버로 활동했던 스테파니는 활동 당시 ‘천무 스테파니’로 불리며 춤을 담당했다. 이번 공연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스테파니의 춤은 대단했다. 똑같은 춤을 추더라도 춤선 하나하나가 매우 고급스럽고 그렇기에 눈에 띄었다. 그래서 다른 배우들 사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혼자 튀는 것이 아닌지 우려됐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의 춤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춤으로 유명했던 스테파니였기에 노래와 연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적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선입견을 스테파니는 이번 공연에서 배우로서 불식시킨다. 노래와 춤, 연기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며 포텐을 터뜨리는 곡이 ‘리듬 속에 그 춤을’을 부를 때다.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던 그가 출생의 비밀로 충격을 받고 방황할 때 이 노래를 부른다. 원곡은 독보적인 섹시가수 김완선이 불렀는데, 스테파니는 곡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결코 김완선에 뒤처지지 않고 제대로 살린다. 이 노래가 끝나고 무대에서는 “브라보” 함성이 울리기도 했다. 앞으로 스테파니가 뮤지컬계에서 어떤 배우로 성장할지 기대되는 무대였다.
뮤지컬의 힘은 역시 노래에 있다. 신중현의 곡들로 채워진 무대는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공연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7월 2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