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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그림 속 길 (13) 옥류동 ~ 세검정 ②] 그림 속 기린교 되찾으니 얼마나 반가운가

시멘트·나무판에 덮였던 다리 되살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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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00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08.13 09:56:43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옛 지도를 보면 경복궁에서 모화관(독립문) 쪽으로 가는 길은 누각동을 지나 모자바위로 올라 한양도성을 통과한 후 무악재로 내려가는 길이 대로였다. 그때는 사직터널도 사직단 앞 대로도 없었으니 누각동과 모자바위(帽岩) 언덕이 큰 길이었던 셈이다. 이제 모자바위 언덕(택견수련장)을 출발, 인왕산 그늘길로 답사 길을 잡는다. 보통 사직단 쪽에서 창의문 방향으로 가는 인왕산 길은 성벽을 타고 산을 넘는 길, 인왕산 차도를 끼고 만들어진 산책로를 걷는 길이 있었는데 근래에는 한 5부능선쯤 되는 곳에 그늘길을 만들어 놓았다. 겸재 그림을 따라 인왕산을 오르려면 막힌 길이 하나 둘이 아니다. 

 

많은 길 막혔지만 그래도 ‘그늘길’ 걸을 만


필운대, 필운상화, 육강현은 배화여고 담장에 막혔고, 옥동척강, 서원소정, 삼승조망은 서울교회와 민가들로 막혀 있어 그림 따라 산을 오를 수 없다. 세심대, 청풍계는 재벌가 가옥과 일반 주택에 막혀 있고, 백운동에서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길도 빌라와 민가들로 길이 막혔다. 청송당도 마찬가지여서 그림 속에 그려진 북악의 기슭으로는 한 발도 들여 놓을 수 없다. 또 겸재 그림의 많은 배경은 청와대 경내에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다행히 이 그늘길로 답사 길을 잡으면 아쉬운 대로 겸재 그림의 뒷배경이 되는 인왕산 산록을 걷고 살필 수 있다.

 

필자와 함께 하는 ‘이야기길 답사팀’이 출발을 앞두고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출발이다. 숲이 우거졌건만 삼복의 더위는 비 오듯 땀을 흘리게 만든다. 그래도 다 내려가면 시원한 빙수 한 그릇이나 생맥주 한 잔이 기다리고 있으니 발길은 가볍다. 숲길 아래로는 누각골(누상동) 골짜기의 상류와 능선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가 인왕산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골짜기의 시작점은 동천(洞天: 신선이 살 만한 골짜기)이다. 체육 시설도 훌륭해서 젊은이들이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고 있다. 새소리 벗 삼아 숲속 코트에서 땀 흘리는 젊은이의 모습은 예전 이곳 사람들의 시회(詩會)와는 사뭇 다르지만 어울림의 문화는 동일한 것이리라.  


이제 누각골 능선을 넘으면 저 아래 수성동(水聲洞)이 보인다. 내려가는 숲길에는 오랜 샘물이 자리 잡고 있다. 아마 그 옛날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던 안평대군도 이 물을 마셨을 것이다. 아쉬운 것은 노천 약수이다 보니 관리가 안 되어 음용불가란다. 한 바가지 떠서 손을 씻는다. 그 시원함이 여간 아니다. 샘이 깊은 물일 듯하다. 문을 해 달고 수도꼭지 하나 달면 이곳을 지나는 이 갈증을 풀어줄 수 있을 텐데….

 

산과 물이 어우러지는 수성동 계곡. 사진 = 이한성 교수

아파트 철거 뒤 공원 되면서 면모 되찾아


수성동 계곡은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가 자리 잡으면서 골짜기는 없어지고 아파트촌이 되었다. 이곳이 지니고 있는 역사도 문화도 모두 서민들 삶의 무게 속에 묻혀버렸다. 다행히 나라 형편이 좀 나아지면서 보상도 해줄 수 있게 되자 아파트는 철거되고 공원화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2009년 9월 신문 기사들은 한결같이 없어진 줄 알았던 기린교(麒麟橋)가 비록 시멘트에 덮이고 나무판으로 이어졌지만 수성동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기사들을 실었다. 


기린교? 얼마나 그리운 다리였던가? 1994년 발간된 책 ‘서울 육백년’ 1권에는 서울시 지명 위원으로 활동했던 김영상 씨의 소중한 기린교 사진이 실려 있다. 아마도 1950년대 어느 날 찍은 사진일 텐데 두 개의 화강암 기둥이 골짜기 사이에 얹혀 있는, 꾸밈이라곤 다 생략된 다리 끝에 한 어린이가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이 정도 돌다리야 장식도 없고 달리 예술성도 보이지 않으니 그저 그만이려니 여기면 되겠지만, 우연히도 이 다리가 겸재의 ‘水聲洞(수성동)’이란 그림에 그 모습 그대로 그려져 있으니 사람들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이곳 다리의 이름에 대한 설명이 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 인왕산(仁王山)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호)의 옛 집터이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수성동 계곡의 상류로 올라가면 기암괴석을 만날 수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청계천의 발원지이며, 도롱뇽이 살고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 사진 = 이한성 교수 

실물과 그림과 사진과 설명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 경우였는데 그런 겸재 정선의 그림(水聲洞) 속 다리 기린교는 이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더욱이 안평대군의 시대로 돌아가서 골짜기의 모습도 회복되었다. 이 골짜기 끝까지 올라가면 기암괴석 사이로 물이 흘러들고 있다. 주변에는 안내판도 있는데 도롱뇽, 가재, 개구리, 버들치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 수성동 골짜기의 원류는 윗절 석굴암 계곡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인왕제색도의 인왕산 주봉과 그 사이 석굴암, 그리고 우측 기차바위가 시작되는 봉우리에서 시작되는 물길이다.

 

겸재의 그림 ‘수성동’. 일행 뒤로 기린교가 보인다.

비 오는 날 기린교 찾은 박윤묵 일행


200여 년 전 수성동 골짜기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그는 옥류동에서 천수경, 장혼, 왕태 등과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이끌어 가던 존재(存齋) 박윤묵(朴允默: 1771~1849년)이었다. 1810년 여름 큰 비가 여러 날 내렸기에 술 한 병 들고, 자주 어울리는 친구들과 수성동을 찾았다. 그리고 그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유수성동기(遊水聲洞記)


골짜기 물이 많아 수성동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인왕산 입구다. 경오년(1810) 여름 큰비가 수십 일 내려 개울물이 불어 평지에도 물 깊이가 세 자나 되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맨발로 나막신을 신고 우의를 입고서 술 한 병을 들고 몇 명의 동지들과 골짜기로 들어갔다. 돌다리 가에 이르니 아래 위쪽의 풍경을 보느라 다른 데 정신 쓸 겨를이 없었다. 개울이 빼어나고 폭포가 장대하여 예전에 보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대개 인왕산의 물은 옆으로 흐르기도 하고 거꾸로 흐르기도 하며 꺾어졌다 다시 흐르기도 한다. 벼랑에 명주 한 폭을 걸어놓은 듯한 곳도 있고 수많은 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곳도 있다.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나는 듯 떨어지기도 하고 푸른 솔숲 사이를 씻어내듯 흐르기도 한다. 백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개울이 하나도 똑같은 형상을 한 곳이 없다. 이 모든 물이 수성동에 이르게 된 다음에야 하나의 큰 물길을 이룬다. 산을 찢을 듯, 골짜기를 뒤집을 듯,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면서 흐르니 마치 만 마리 말들이 다투어 뛰어오르는 듯하고 우레가 폭발하는 듯하다. 그 기세는 막을 수가 없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 가운데는 눈비가 퍼붓는 듯, 자욱하고 넘실거린다. 때때로 날리는 포말이 옷을 적시면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들어와 혼이 맑아지고 정신이 시원해지며 마음이 편안하고 뜻이 통쾌해진다. 호탕하여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으로 노니는 듯하다. 마침내 술에 만취하여 즐거움이 극에 달하였다. 이에 갓을 벗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게 노래하엿다.

 

인왕산 위에 비가 쏴하고 내리네. 
인왕산 아래에 물이 콸콸 흐르는구나.
이 물이 있는 곳 바로 나의 고향이네
머뭇머뭇 차마 떠나지 못한다네.
외물과 나 서로 잊고 나서
노래 부르고 돌아보면서 일어나니
하늘은 홀연 맑게 개고
기운 해는 벌써 산에 걸렸네. (기존 번역을 모본으로 삼아 필자가 재번역)


遊水聲洞記


洞多水. 以水聲名. 迺西山之口也. 庚午夏. 大雨數十日. 川渠漲溢. 平地水深三尺. 余朝起跣足着屐. 衣雨衣携一壺酒. 與數三同志者入洞. 至石橋邊. 上下一望. 應接殆不能暇. 溪澗之勝. 泉瀑之壯. 怳與舊日觀大有異焉. 凡西山之水. 或橫流或倒流. 或折而復流. 或掛匹練. 或噴亂珠. 或飛於絶壁之上. 或灑於松翠之間. 百谷千流. 不一其狀. 皆到水聲之洞然後. 始成一大流. 裂山倒壑. 衝崖轉石. 如万馬之爭騰. 如疾雷之暴發. 其勢不可遏也. 其深不可測也. 其中霏霏如也蕩蕩如也. 時飛沫濺衣. 凉意逼骨. 魂淸神爽. 情逸意蕩. 浩然如與造物者. 遊於物之外也. 遂大醉樂極. 散髮長歌. 歌曰西山之上雨床床兮. 西山之下水湯湯兮. 惟此水是吾鄕兮. 徜徉不忍去. 物與我而俱相忘兮. 歌闋相顧而起. 天忽開霽. 西日已在山. 


유수성동기(遊水聲洞記: 수성동에서 즐긴 기록). 존재집(存齋集)에서

 

추사 김정희도 수성동 찾아 시 읊어 


요즈음처럼 무더운 여름날에는 존재가 즐겼던 기린교 장관이 보고 싶구나. 이곳을 노래한 이들은 여럿 있을 것이다. 추사도 빠지지 않았다. 완당전집에는 수성동우중관폭(水聲洞雨中觀瀑)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비온 다음날 수성동을 찾아와 기린교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쓴 시다. 여기에서는 소개하지 않는다. 궁금하신 분은 완당전집 9권을 참조하시기를.

 

1950년대쯤에 김영상 씨가 촬영한 기린교의 모습. 
한겨울 눈 덮인 기린교. 사진 = 이한성 교수 

겸재는 이 골짜기를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그렸는데 세 명의 선비가 동자 노비 하나 데리고 인왕산 방향으로 가는 모습이다. 평화롭다.


그런데, 이 골짜기에는 과연 누가 살았을까? 효령대군의 집터였다는데 과연 그랬을까? 다 아는 바와 같이 세종대왕은 소헌왕후 사이에 아들 8명을 두었다. 세자(훗날 문종), 수양대군(훗날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이 그들이다. 아버지 세종은 성군이었건만 그 아들들은 그렇지 못했다. 문종이 서거한 후 어린 조카 단종은 큰 숙부 수양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았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피비린내가 온 세상을 덮었다. 수양대군에게 반기를 든 형제들은 죽음을 맞았고, 수양대군 편에 든 형제들은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곳은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집이 있던 곳이다. 조선의 왕자들은 어느만큼 성장하면 세자를 제외하고는 궁궐에서 나와 사가(私家)에서 생활하는 것이 법도였다. 안평도 10대 중반이 되자 세간을 냈다. 이때 아버지 세종이 안평에게 내려준 당호(堂號)가 비해당(匪懈堂)이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고 부르는 유가(儒家)의 경서 중에는 시경(詩經)이라는 책이 있는데 옛 주나라 시절 각국에서 부르던 노래 300여 수(首)를 공자께서 손을 보아 모아 놓은 책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라는 단원은 주나라 시조 문왕(文王)의 업적을 주로 노래했는데 그 중 증민(蒸民) 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명차철(旣明且哲) 이보기신(以保其身), 숙야비해(夙夜匪懈) 이사일인(以事一人)   

 

대략 이런 뜻이다. ‘현명하면서도 지혜롭게 하여 자신의 몸을 보존하며, 아침과 저녁으로 게으르지 말고 그로써 한 사람만을 섬긴다.’


명철보신(明哲保身)이라는 성어는 이 글에서 나온 것인데, 세종께서는 뒤 구절 ‘숙야비해 이사일인’으로 당호를 내렸다. 아마도 안평(安平)이라는 이름이 너무 평화롭기만 하니 게으르지 말라고 일러 주신 것 같고, 이사일인(以事一人)은 병약했던 세자(후에 문종)를 염두에 두고 임금 잘 섬기라는 당부의 말씀을 내린 것은 아닐까? 그러면 안평대군은 정말 역심을 품고 왕 자리를 탐했던 사람이었을까?

 

바위에 새겨진 인왕산 숲길 안내도. 사진 = 이한성 교수

평안하지 못했던 안평대군 살던 곳


수양이 계유정란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쥔 후 비정한 역사는 그렇게 정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것도 수양의 입이 아니라 단종의 입을 통하여 역적으로 정리되었고 쿠데타가 일어난 내막을 알려고 온 명나라 사신에게는 단종의 명을 받아 좌승지 박원형이 수양의 능력과 자신의 무능을 전하도록 하고 있다. 어린 단종은 얼마나 공포 속에서 수양에게 왕위를 넘겨야 했던 것일까? 그때의 실록 기록을 보자.

 

“노산군이 다시 좌승지(左承旨) 박원형(朴元亨)에게 명하여 태평관(太平館)으로 가서 명나라 사신에게 말하게 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계유년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반란을 꾀하여 숙부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이 사실을 나에게 고하고 평정하였다. 그러나 그 남은 일당들이 아직도 존재하여 다시 궤도(軌道)에 벗어나는 일을 꾀하고 있으니, 이 어찌 유치한 내가 능히 진정할 바이겠는가? 수양 대군은 종실(宗室)의 장(長)으로서 사직(社稷)에 공로가 있으니 중임(重任)을 부탁할 만하다. 이에 그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 서리(署理)토록 하고 장차 이를 주문(奏聞)하겠다.’


하니, 명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이는 곧 국가의 대사인데, 이제 그 유서(諭書)를 받으니 기쁩니다.”


하였다.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으로 들어가 노산군을 알현하고 면복(冕服)을 갖추고,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卽位)하였다.


魯山命左承旨朴元亨, 往太平館, 言於明使曰: “予幼沖卽位, 歲癸酉安平君 瑢謀亂, 叔父首陽君告我平定. 然餘黨猶存, 復謀不軌, 豈予幼沖所能鎭定? 首陽君宗室之長, 功在社稷, 可付重任. 玆令權署國事, 將以聞奏.” 明使曰: “此是國家大事, 今承諭爲喜.” 世祖入思政殿, 見于魯山, 具冕服, 卽位于勤政殿.

 

이렇게 단종도 안평대군도 수양대군 손에 사라져 갔다. 역사는 정의의 편이었으면 좋으련만 많은 경우 역사는 힘 있는 자의 편이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수성동은 오늘도 평화롭다.

 

화사했던 안평의 삶 보여주는 48가지 즐거움


안평은 경서(經書)에 밝고 시문(詩文)에도 뛰어났으며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다. 당연히 빼어난 집현전 학사들이 구름같이 그를 따랐다. 아마도 수양에게는 아우의 이런 인기가 신경쓰였을 것이다. 안평과 관련하여 이곳 수성동에서 돌아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  


첫째는 안평이 발제(發題)하고 집현전 학사들이 답한 ‘비해당 48영(匪懈堂 48詠)이다. 이는 안평이 자신의 집 비해당 주변의 48가지 아름다움을 시로 짓고(그림도 그렸을 가능성도 있음) 집현전 학사들의 답시를 받은 것이다.  지금도 그 시들이 대부분 전해진다.


둘째는 이곳에서 꾼 꿈을 안견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그 꿈을 실행에 옮긴 무계정사(武溪精舍)에 대한 것이다.

 

이곳을 배경으로 쓰인 소설 ‘운영전(雲英傳)’의 운영낭자를 생각하게 만드는 풍경이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셋째는 안평 떠난 지 200여 년 뒤 이곳 수성동을 배경으로 쓰인 소설 ‘운영전(雲英傳)’ 이야기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긴 이야기는 다 할 수 없으니 짧게짧게 짚어 가며 답사길을 가려 한다.


우선 비해당 48영 내용을 소개한다.


1. 春後牧丹(춘후목단) : 봄 지난 뒤의 모란
2. 屋角梨花(옥각이화) : 집 모퉁이 배나무 꽃 
3. 墻頭紅杏(장두홍행) : 답장 위의 붉은 살구꽃
4. 熟睡海棠(숙수해당) : 곤히 잠든 해당화 
5. 爛熳紫薇(난만자미) : 활짝 핀 배롱 꽃
6. 半開山茶(반개산다) : 반쯤 핀 산다화
7. 雪中冬柏(설중동백) : 눈 속의 동백 열매
8. 日本躑躅(일본척촉) : 일본 철쭉
9. 浥露黃橙(읍로황등) : 이슬에 젖은 오렌지
10. 假山煙嵐(가산연람) : 가산의 이내
11. 門前楊柳(문전양류) : 문 앞의 버드나무 
13. 映日丹楓(영일단풍) : 햇살에 비치는 붉은 단풍
14.竹逕淸風(죽경청풍) : 대숲 길의 맑은 바람
15. 矜秋紅柹(긍추홍시) : 가을의 자랑 홍시
16. 苔封怪石(태봉괴석) : 이끼 낀 괴석
17. 海南琅玕(해남낭간) : 해남의 옥돌
18. 梅窓素月(매창소월): 매화 핀 창가의 흰 달 
19. 鶴唳庭松(학려정송) : 학이 우는 뜰의 소나무
20. 麝眠園草(사면원초) : 사향노루 잠드는 동산의 풀숲
21. 水上錦雞(수상금계) : 물 위의 금계
22. 籠中華鴿(롱중화합) : 새장 속의 화려한 집비둘기  
23. 琉璃石(유리석) : 유리석
24. 硨磲盆(차거분) : 옥돌 화분
25. 梔子花(치자화) : 치자 꽃
26. 傲雪蘭(오설란) : 오설란
27. 萬年松(만년송) : 만년송  
28. 四季花(사계화) : 사계화
29. 百日紅(백일홍) : 백일홍
30. 金錢花(금전화) : 금전화
31. 拒霜花(거상화) : 목 부용꽃 
32. 映山紅(영산홍) : 영산홍
33. 安石榴(안석류) : 석류
34. 凌霜菊(능상국) :  서리가 범한 국화 
35. 梧桐葉(오동엽) : 오동나무 잎
36. 飜階芍藥(번계작약) : 널찍한 섬돌에 작약
37. 滿家薔薇(만가장미) : 집에 가득한 장미
38. 輕盈玉梅(경영옥매) : 한들한들 예쁜 옥매화 
39. 忘憂萱草(망우훤초) : 근심을 잊게 하는 원추리 
40. 向日葵花(향일규화) :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
41. 窓外芭蕉(차외파초) : 창밖의 파초
42. 三色桃(삼색도) : 세 가지 꽃이 피는 복숭아
43. 玉簪花(옥잠화) : 옥비녀 꽃
44. 藤蔓老松(등만노송) : 등나무 감긴 노송
45. 蜀葡萄(촉포도) : 촉나라 포도
46. 盆池菡蓞(분지함도) : 오목한 연못의 연꽃 봉우리 
47. 木覓晴雲(목멱청운) : 구름이 갠 목멱산
48. 仁王暮鐘(인왕모종) : 인왕산의 저녁 종 소리

 

참 화사한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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