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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나홀로 세계여행 (185) 인도 ④ 카시미르] 경찰이 주민보다 많은 관광명소, 가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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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15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8.11.26 09:25:55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7일차. (레 → 스리나가르 버스)

혹성 탈출


오후 2시에 레를 떠난 스리나가르 행 버스는 434km 험준한 산악 구간을 쉬지 않고 달린다. 무척 낡아 보이지만 버스는 우렁찬 디젤 엔진 소리를 내며 험한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밤새도록 17시간을 달려 내일 아침 7시에 스리나가르에 도착할 예정이다. 도로는 끝없는 사막을 가로 지른다. 잔인한 황무지다. 해발 4천 미터를 넘나드니 일부러 심고 관리하지 않는 한 나무가 자랄 수 없는 헐벗은 산들이 이어진다. 보통 5, 6천 미터의 준봉들이다. 레를 떠나는 기분…. 혹성 탈출이라고나 해야 할까? 마을은 어쩌다 만나지만 거대한 규모의 군사 시설과 그곳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자주 본다.

아름다운 레~스리나가르 도로

히말라야의 높은 봉우리들 사이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인더스 계곡(Indus Valley)을 계속 옆에 두고 달린다. 그 유명한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이자 고대 동서 교역로…. 길을 따라 드문드문 나타나는 작은 오아시스 마을들은 지금은 존재감이 없지만 모두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들일 것이다.

황토물의 강 위에서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래프팅’이라는 광고 포스터가 유혹한다. 석양빛을 안은 황무지 사막은 찬란하게 아름답다. 금빛을 내는 거대한 바위들이 제멋대로 깎인 채 서있지만 그런 것까지도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내니 버스 여행이 지루할 틈이 없다. 미국 서부 유타, 네바다, 애리조나의 풍경을 닮았지만 거기에 수만 년 인류가 살아온 흔적이 촘촘히 박혀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도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인더스 강의 상류 풍경. 사진 = 김현주 교수
레에서 스리나가르로 이어지는 434km 험준한 산악 구간을 지나면 바로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잔인한 황무지가 이어진다. 인도와 중국의 국경지대라서 거대한 군사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사진 = 김현주 교수

촘촘해지는 체크 포인트

카길(Kargil)을 지나 밤이 깊어 스리나가르가 가까워지면서 체크 포인트를 자주 만난다. 심야 시간대이지만 매번 버스에서 내려 인적 정보와 여권 정보, 비자 정보 등을 확인시켜 주고 꼼꼼히 기록한 후에야 버스를 보내 준다. 인도 여행에서 자주 겪은 일이기도 하지만 여기는 국경 분쟁 지역임을 감안하면 불편을 참아야 한다. 숙소 체크인 할 때도 이른바 숙박부 비슷한 것을 적는다. 꽤나 자세하게 적어야 한다.

 

스리나가르에 들어오는 여정에선 잔뜩 긴장했으나 정작 와보니 분주하고 활기차서 안심을 했다. 사진 = 김현주 교수

18일차. (스리나가르)

체크 포인트가 갑자기 더 많아지고 경계가 더욱 삼엄해진 것으로 보아 스리나가르(Srinagar)가 매우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도대체 카시미르 지방은 어떤 곳이길래 이렇게 살벌한 국경이 되었는지 따져 본다. 원래 카시미르는 14세기까지는 힌두교 또는 불교 왕국이 지배해 오다가 14세기 이후 무굴 제국을 비롯하여 여러 이슬람 통치자의 지배를 받는다. 무굴 제국 해체 후에 영국의 영향에 편입되지만 1947년 영국이 떠날 때까지도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의 번왕국(藩王国, princely state)의 하나로서 주권을 유지했다.

카시미르가 분쟁 지역이 된 사연

그런데 문제는 영국령 인도가 해체, 분할되면서 시작된다. 종교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되지만 주권을 유지해 왔던 카시미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주권 국가로 남는다. 그러나 1947년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무장 세력이 스리나가르 외곽으로 진입해 오자 카시미르 왕은 자신이 보호받는 조건으로 영토를 인도에 할양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즉 무슬림이 절대 다수(96%)인 카시미르가 졸지에 힌두교가 다수인 인도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냥 독립 국가로 남거나 차라리 파키스탄에 속하기를 원했던 카시미르 주민 대부분은 인도의 통치를 반기지 않았기에 차츰 분리주의 운동이 싹텄고 그에 대한 인도 정부의 가혹한 탄압, 그리고 카시미르인들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카시미르를 분쟁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은 것이다.

1980년대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최고조에 달했던 분쟁과 갈등은 최근 좀 나아졌다지만 언제든 불씨는 남아 있다. 레에서 스리나가르 행 버스에 오른 어제만 해도 긴장하기에 충분한 뉴스 하나가 터졌다. 스리나가르 외곽에서 분리주의자 세 명이 인도 경찰의 총격으로 사살되었다는 소식이다. 사살된 세 명이 먼저 인도 경찰을 살해한 것에 대해서 끝까지 색출하여 보복했다는 인도 정부의 발표가 결코 자랑스럽거나 용맹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잔뜩 긴장한 채 도착한 카시미르

버스는 아름다운 달 호수(Dal Lake) 호반을 따라 내려가더니 아침 7시, 스리나가르 터미널에 도착했다. 호숫가에는 그 유명한 선상 숙소(boat house)들이 옹기종기 늘어서 있다. ‘동방의 베니스’(Venice of the East)라고 불릴 정도로 풍치와 자연 경관이 빼어난 도시에 왔음을 금세 확인한다. 분쟁 지역에 들어왔다는 두려움은 멀어지고 평온하고 아늑한 도시 분위기에 일단 안심한다.

 

스리나가르의 중요한 볼거리는 다양한 인종과 함께 독특한 퓨전 건축 양식이다. ‘목조로 건축한 인도 빅토리아 양식’이라고나 할 건물들이 재미있다. 사진 = 김현주 교수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여러 명의 카시미르 청년들이 버스에 올라 방문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로 자기네 숙소에 가자고 열심히 설득한다. 하루에 몇 번 다니지도 않는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 고작 십여 명에 매달려야 하는 그들을 보며 카시미르의 사정이 딱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카시미르의 불안한 치안이 부담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해진 사이 관광 산업이 중요한 수입원인 이곳 청년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나라 외교부 홈페이지나 온갖 종류의 여행 안내 책자는 카시미르 여행에 대해 ‘자제’를 넘어 ‘즉시 철수’로 규정하고 있고, 그래도 정말 가야 한다면 도시 바깥을 절대 벗어나지 말라, 도시 간 이동은 버스나 육상 교통수단이 아니라 항공기를 이용해라 등등 별의 별 겁을 다 주고 있을 정도니 오죽하랴? 그런 형국에 굳이 내가 카시미르를 찾아 간다는 것이 무모한 짓이 아닌가 걱정도 많이 했다.

카시미르에는 이런 얼굴도 있다

예약해 놓은 숙소를 찾아 들어가니 고맙게도 조기 체크인(early check-in)을 해준다. 숙소 종업원 아젤은 난생 처음 동양인을 보는 듯 호기심과 관심이 섞인 눈빛으로 열심히 이것저것 묻는다.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와 갈색 머리털을 가진 그는 토종 카시미르인이다. 아침 시간 거세게 내리는 비에 젖은 옷을 말리고 밤새 산악 도로에서 시달린 몸을 잠시 눕히니 세상이 내 것이다. 짧은 휴식 후 도시 탐방에 나선다.

 

인도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스리나가르의 올드타운 중심지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사진 = 김현주 교수

숙소 부근을 흐르는 젤룸(Jellum) 강둑을 따라 시내 중심부 중앙 시장이 위치한 랄 초크(Lal Chouk)를 향해 걷는다. 스리나가르의 중요한 볼거리는 다양한 인종과 함께 독특한 퓨전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다. 목조로 건축한 인도 빅토리아 양식이라고나 할까? 인도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올드타운 중심은 혼란스럽다. 아침에 내린 비로 길은 진창이다. 이 도시에 오기 전에는 잔뜩 긴장했으나 정작 와보니 분주하고 활기차서 안심한다.
 

물 위에 떠 있는 선상 숙소들. 사진 = 김현주 교수
스리나가르 시내 중심부를 흐르는 젤룸 강의 풍경. 사진 = 김현주 교수

경찰이 민간인보다 많은 곳

길을 따라 거의 30m 간격으로 배치된 중무장 경찰 병력을 제외하면 평화롭기까지 하다. 삼엄한 치안 유지 덕분에 여행자는 긴장을 늦추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위압적이고 불편할 것이다. 스리나가르 인구(118만 명) 만큼의 군 경찰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달 호숫가(Dal Lake)의 한쪽 귀퉁이에 닿아 있는 치나르바그(Chinar Bagh)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휴양 도시답게 도심 곳곳에 널찍하게 조성해 놓은 바그(bagh, 공원) 때문에 그나마 도시 탐방이 쾌적해진다.

결국 오늘도 진창길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도시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나마 지난 며칠은 건조한 라다크에 있었기 때문에 인도의 질퍽거리는 길을 잠시 잊었었다. 어릴 적 우리나라에서는 집집마다 장화 몇 켤레씩 기본으로 갖추었던 시절이 생각난다. 이렇듯 인도 오지 여행은 힘들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물과 음식이다. 목이 말라도 음료를 마음껏 마실 수 없다. 조심하느라고 했지만 인도 여행 내내 속이 편한 적이 없다. 물이 위생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음식도 그렇다. 인도 쌀과 함께 나오는 카레 이외에는 별달리 먹을 것도 없다. 우리가 즐겨 먹는 달콤한 일본식 카레를 생각하면 안 된다.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인도 통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은 카시미르인 파레이 씨. 사진 = 김현주 교수

카시미르인들의 불만

오늘 스리나가르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사업을 하는 파레이(Parray)는 시내에서 달 호숫가까지 먼 길을 함께 걸으며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인도는 군사력만 가지고 지난 71년 동안 카시미르를 통치하고 있다”고 분개한다. 민감한 문제라서 내가 일부러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모처럼 만난 외지인에게 하소연하듯 술술 그의 감정을 풀어낸다. 대부분의 카시미르인들은 인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카시미르와 인도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지만 달리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인도 전체 인구의 1%도 안 되는 카시미르인들(인구 1250만 명)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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