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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전시] 예술가의 시선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할까?”

서울대학교미술관 기획전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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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33호 김금영⁄ 2019.03.29 10:22:43

김범 작가의 ‘변신술’ 작업들. 인간이 에어컨으로 변신할 수 있는 방법을 적은 텍스트(왼쪽)와 임신한 망치 등 거짓말을 대놓고 드러내며 상상력을 자극한다.(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하루에 우리는 얼마나 거짓말을 할까? 선의의 목적을 지니고 행하는 거짓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거짓말에 부여된 이미지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거짓된 정보를 담은 가짜뉴스들, 온갖 억측과 가설과 조작들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세상에서 거짓은 진실을 뒤흔들고 혼란을 가져오는 존재. 그런데 여기 예술가 9인이 거짓말을 적극적으로 작업에 활용하는 ‘거짓말’ 전시에 나서 눈길을 끈다.

서울대학교 미술관이 구민자, 김범, 신정균, 안규철, 오재우, 이병수, 이수영, 이준형, 장보윤 작가가 참여하는 ‘거짓말’전을 5월 26일까지 연다. 전시는 이들이 자신의 예술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도구로써 거짓말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주목한다.

 

안규철 작가는 텍스트와 드로잉, 그리고 설치 작업으로 이어지는 ‘그 남자의 가방’(왼쪽)을 통해 한 인간이 가방 안으로 들어가 다른 차원의 존재로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빨간 벽 쪽엔 이준형 작가의 그림이 설치됐다.(사진=김금영 기자)

윤동천 서울대학교 미술관 관장은 “거짓말은 속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 경우 성립한다. 그런데 예술적 표현으로서의 거짓말은 기만으로서의 거짓말과 달리 속이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며 “전통적 미술에서는 사실이나 실재가 아닌 ‘그림-이미지’를 대하기 때문에 유독 재현의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장르개념이 붕괴된 현 시대엔 허구로서의 이야기(내러티브) 구조를 활용하는 경향이 증가했다.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장르가 예술이고, 어떤 의미에서 훌륭한 예술가는 대단한 거짓말쟁이다”라고 짚었다.

이번 전시는 허구의 이야기 구조를 바탕으로 다양한 전략을 사용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모았다. 그리고 단지 거짓말을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려는 시도 또한 보여준다.

 

작업을 설명하는 장보윤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오진이 서울대학교 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진실에 대한 개념이 혼돈되고, 개개인의 감정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다른 시대에 거짓말은 어떤 기능을 하고 있을까? 이번 전시에서 예술가들은 상상력의 발로로, 때로는 새로운 시각으로 사회를 보기 위한 측면에서 거짓말을 활용하고, 때로는 거짓말을 통해 오히려 진실을 들추려 시도한다”고 말했다.

발칙한 거짓말을 통한 상상력의 발로는 김범, 안규철, 장보윤, 이병수의 작업에서 돋보인다. 김범의 ‘변신술’은 인간이 나무, 문, 풀, 바위, 냇물, 사다리, 표범, 에어컨으로 변신할 수 있는 방법을 적은 지침서다.

 

장보윤 작가의 ‘기억의 서: K의 슬라이드’는 우연히 버려진 사진 슬라이드를 주운 작가가 이 사진과 함께 그 주인에 대해 알게 된 다른 자료들을 보여주는 작업이다.(사진=김금영 기자)

‘에어컨이 되는 법’을 보면 “에어컨이 들어갈 자리를 찾는다” “마땅한 자리가 없으면 설치된 에어컨을 하나 떼어내어 분해해 없앤다” “에어컨이 되기에 좋은 때는 초가을부터 이듬해 늦봄까지” 등 터무니없는 말들이 적혔다. 이 지침서대로 한다고 진짜로 에어컨이 될 수 없다는 걸 관람객은 안다. 하지만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일상 속 사물을 낯설게, 또 흥미롭게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다.

김범이 ‘변신술’을 읊는다면 안규철은 텍스트와 드로잉, 그리고 설치 작업으로 이어지는 ‘그 남자의 가방’을 통해 한 인간이 가방 안으로 들어가 다른 차원의 존재로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병수 작가는 전시장에 ‘관악산 호랑이 연구소’를 세웠다. ‘과연 관악산에 실제로 호랑이가 살고 있을까?’ 하는 공상에서 출발한 작업이다.(사진=김금영 기자)

텍스트와 드로잉은 “가방에 연결된 긴 천에 몸을 짚어 넣고 천천히 가방 쪽으로 전진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결국 가방에 도착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기다리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에 도달할 것이고, 어떤 누구도 당신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또한 허구의 이야기지만, 텍스트와 드로잉 옆엔 실제 가방과 긴 천이 설치돼 ‘이 지시문대로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즐거운 상상력을 자극한다.

장보윤의 ‘기억의 서: K의 슬라이드’는 우연히 버려진 사진 슬라이드를 주운 작가가 이 사진과 함께 그 주인에 대해 알게 된 다른 자료들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작가에게 도착한 이미지는 본래의 스토리와 작가의 상상력이 뒤섞여 새로운 정체성이 덧입혀진다. 하지만 이내 관람객들은 슬라이드 사진 외 일기나 편지는 작가 자신이 주인공의 이름으로 창작해낸 자료라는 점에서 반전을 맞이한다. K의 역할을 수행한 작가의 정체성이 가상과 실제를 넘나들며 일목요연한 서사 구조를 깨뜨리고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남극에 대해 조사하고 생존 훈련을 설계한 이병수 작가의 ‘메이드 인 안타티카’가 설치된 전시장.(사진=김금영 기자)

이병수는 전시장에 ‘관악산 호랑이 연구소’를 세웠다. 작가는 “중고등학교 때 관악산 인근에 살았는데 ‘과연 관악산에 실제로 호랑이가 살고 있을까?’ 하는 유아적 공상에서 작업이 출발했다”고 말했다. 작가가 전시장에 구축한 연구소에는 실제 호랑이와 관련된 여러 연구자를 인터뷰한 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호랑이가 살 법한 지역을 유추해 표시해 놓은 지도가 설치돼 굉장히 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남극에 대해 조사하고 생존 훈련을 설계한 ‘메이드 인 안타티카’ 또한 전문가적인 포스를 드러낸다. 하지만 실상 작가의 남극 방문 프로그램이 일찌감치 무산됐다는 사실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몰입했던 거짓말로 벌어졌던 상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효과를 준다.

잘 구성된 허구는 오히려 진실을 고찰하게 한다

 

구민자 작가의 ‘스퀘어 테이블: 예술직 공무원 임용 규정 마련을 위한 공청회’는 ‘예술가가 공무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논제를 바탕으로 이뤄진 퍼포먼스다.(사진=김금영 기자)

거짓말을 통해 오히려 현실의 진실을 들추려는 시도는 구민자, 이준형, 신정균, 오재우, 이수영에 의해 이뤄진다. 구민자의 ‘스퀘어 테이블: 예술직 공무원 임용 규정 마련을 위한 공청회’는 ‘예술가가 공무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논제를 바탕으로 실제 공무원, 미술대학 교수, 미술전문지 편집장, 미술가, 큐레이터 등이 청중 앞에 모여 임무, 선발 빛 자격 요건, 근무 조건 등을 논의한 퍼포먼스다.

 

대담 자체가 가정에서 출발했기에 여기서 논의된 담론은 실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어찌 보면 모두 거짓말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을 살아가는 참석자와 청중의 발언에는 실제 자신들의 경험이 묻어나 현실의 예술계 문제를 고찰해보도록 이끈다.

 

이준형 작가의 ‘도그 프로젝트’는 추상화처럼 보이는 그림 옆에 강아지 사진이라는 정보를 끼워 넣으며 진실과 거짓을 혼동시킨다.(사진=김금영 기자)

이준형과 신정균은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 혼돈을 발생하게 한다. 이준형의 ‘도그 프로젝트’는 그림 옆에 강아지 사진이 없으면 추상화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그림 위를 돌아다니고 있는 강아지 사진은 하나의 정보로 기능하며 ‘강아지 발에 묻은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이구나’라는 유추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여기서 또 진실이 꼬인다. 추상화 같은 이미지는 작가가 직접 그린 게 맞고, 완성된 그림에 강아지가 함께 있는 사진만 찍었을 뿐인 것.

신정균의 ‘발견된 행적들’에서는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듯 진열해놓은 물품들이 눈에 띈다. 정작 이 물품 하나하나엔 큰 의미가 없지만, 북한을 떠오르게 하는 기념품들이 모이며 마치 국가 보안과 관련된 심오한 이야기를 담은 것인지 의심을 품게 한다.

 

신정균 작가의 작업. 북한에서 잘 쓰이는 빨간색 옥류체로 쓰인 문구가 마치 선동 문구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룹 엑소의 노래 ‘으르렁’의 가사다.(사진=김금영 기자)

벽에는 북한에서 잘 쓰이는 빨간색 옥류체로 쓰인 문구가 마치 선동 문구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룹 엑소의 노래 ‘으르렁’의 가사다. 이처럼 이준형과 신정균은 본인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이 실은 거짓일 수 있음을 꼬집으며 거짓과 진실이 혼돈되는 현실을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오재우의 ‘콜렉터스 초이스’ 영상에는 오형근, 앤디 워홀, 피카소 등 유명 현대 미술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콜렉터들이 등장한다. 자신이 언제 어디서 작품을 구매했는지 매우 상세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실상은 참여자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이야기들.

 

‘콜렉터스 초이스’를 작업한 오재우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고등학생, 변호사, 큐레이터, 공무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영상에서는 콜렉터로 등장한다. ‘500억 주고 마르셀 뒤샹의 변기를 샀다’ ‘작가와 친분이 있어 5만원에 구매했다’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이는 참여자들이 실제와 가상의 이야기를 뒤섞어 스스로 만들어낸 인터뷰”라고 밝혔다.

 

이어 “일반 미술품 거래 과정은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허구의 이야기는 마냥 허구같이 느껴지지 않고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또한 점점 투자 대상으로 소비되는 미술 작품의 가치에 질문을 던진다”고 덧붙였다.

 

‘콜렉터스 초이스’ 영상에는 오형근, 앤디 워홀, 피카소 등 유명 현대 미술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콜렉터들이 등장한다. 자신이 언제 어디서 작품을 구매했는지 매우 상세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실상은 참여자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이다.(사진=김금영 기자)

이수영은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만이 과연 진실인지, 사주를 통해 파고든다. 작가 스스로 명리학을 실제로 공부한 뒤 만난 사람들의 사주를 봐준 것. 과학적 상식과 논리를 뛰어넘는 믿음의 힘이 얼마나 진실만큼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작가는 그 지점을 파고든다.

오진이 학예연구사는 “진실과 허구가 얽힌 전시 작품들 속 이미지, 배경, 맥락, 사물, 이야기 속 거짓말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거짓된 지점과 진실한 지점, 이 둘 간의 관계, 이에 대한 자기 인식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대해 그 옳고 그름을 의심해보는 성찰의 자세는 반목하는 의견들이 공론의 장을 가득 채운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수영 작가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들만이 과연 진실인지, 사주를 통해 파고든다.(사진=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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