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3호 김금영⁄ 2019.07.01 11:17:15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우리는 오늘, 즉 현재를 살고 있고 어제는 과거, 내일은 미래로 이야기해요. 하지만 내일이 오면 현재라고 믿었던 오늘은 과거가 되죠. 모레에 가보면 내일 또한 과거가 되고요. 그렇다면 현재와 과거, 미래는 과연 다른 시간일까요?”
안종대 작가가 질문을 던졌다. 이는 가나아트에서 7월 14일까지 열리는 그의 개인전 ‘시간(Le Temps)’과도 연결되는 이야기다. 작가는 실상(實相) 연작을 통해 ‘시간과 실존’이라는 주제에 꾸준히 천착해 왔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모두 실상(實相)이라는 제목을 붙이지만, 불어로는 ‘실상(Le Reel)’과 ‘시간(Le Temps)’을 모두 사용한다. 매순간 우리의 눈에 비치는 모든 존재들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렇기에 절대적이고 완결된 상태의 실체(實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를 표현하기 위한 예로 작가는 ‘대상’과 ‘실상’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그는 “대상은 바로 내 앞에 서 있는, 우리가 바라보는 어떤 것, 그리고 실상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며 “우리가 보는 대상은 사실상 실상이 아니다. 무언가를 현재 봤다고 인지하는 순간 그 시간은 이미 과거가 돼버리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하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실상이고 이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시간을 작업에 담기 위해 어떤 재료와 방식을 사용했을까? 그는 캔버스가 아닌, 캔버스를 짜기 위해 마련했던 천에 주목했다. 이밖에 길을 걷다 만났던 나뭇가지, 프랑스의 화방에서 만났던 아프리카 마, 주방에서 만났던 깨진 그릇 파편까지 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오브제들이 그의 작업 도구로 사용됐다.
작가는 “특별히 이런 재료만 쓰겠다고 정해두지 않고, 인연이 돼서 만난 재료와 작업한다. 한국과 프랑스에 모두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재료들을 선택했다. 학교 다닐 때는 전통 서양화 재료를 많이 사용했지만 그보다 내 마음에 자연스럽게 들어온 오브제들을 사용했다”며 “좋은 재료를 사용한다고 작품이 더 좋아지는 게 아니라 어떤 환경에 있든 예술가는 무엇이든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신념을 밝혔다.
작업 방식 또한 그가 맞닿는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한정된 작업실에서 벗어나 그가 발걸음을 옮기는 대자연이 바로 작업 현장이 됐다. 이건 대자연의 시간을 그의 작업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작가는 “내 작업은 자연이 ‘되게’ 한다. 나는 그 과정에 조심스레 개입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설명하는 대표작으로 작가는 상 위에 놓인 설치물을 소개했다. 수북하게 쌓인 종이 위에 나무토막, 돌멩이, 깨진 조각 등이 놓여 있었다. 이 오브제들을 들어 올리자 푸른빛, 빨간빛, 주황빛 등 숨겨져 있던 색이 드러났다. 알고 보면 이 오브제 아래 놓인 색이 본래의 색지가 갖고 있던 색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햇볕과 바람에 노출되며 색지가 자연스럽게 하얀색으로 빛을 바랜 것. 결국 이 작품은 작가와 자연이 함께 만든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모두 담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실상(實像)은 결국 허상(虛像)
작가가 이런 방식의 작업을 이어가게 된 계기는 그가 느낀 허무함 때문이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미술 학도는 석고상, 정물 산수화 등 여러 과정을 거쳐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솜씨가 숙련되면 사물을 보고 캔버스에 이를 재현한다. 그런데 난 ‘진정한 아름다움이 꼭 눈에 보이는 것뿐일까?’ 궁금해지며 일순간 모든 과정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며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 시간 같은 존재들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싶은 존재를 찾았지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 막막했던 작가는 캔버스를 짜려고 남겨놓았던 천들에 물을 뿌리고 구겨놓았다. 답답함 속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구겨진 채 방치해놓았던 캔버스 천에서 물자국과 빛바랜 흔적을 발견했고, 여기서 시간의 흐름과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이번 전시에 작가는 파리에 있는 작업실 양철지붕에 10년 동안 올려놓았던 작업 또한 선보인다. 화면엔 빗자국이 얼룩덜룩 찍혀 있다. 이는 자연의 흔적이다. 여기에 검은 점이 찍힌 것도 눈에 띄는데 이는 작가가 직접 남긴 흔적이다.
그는 “나는 작품에 검은 점을 찍는 등 자연의 조화를 해치지 않는 정도로 개입한다. 이는 화면에서 균형을 잡고, 우주의 중심을 상징한다”며 “이 점이 없다면 작품은 그저 자연 그대로의 원시에 그친다. 작가로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얼룩진 천이 단순히 그냥 걸레가 되느냐, 예술품이 되느냐를 가르는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이라고 설명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더러운 천으로 보일 수 있는 화면에 대해 작가는 “부패가 아닌 발효의 개념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라 말했다. 작가는 “우리는 매일 거울을 보며 늙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매일 마주하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게 아닐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패하는 게 아니라 발효, 즉 더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아름다움은 썩어서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평면 작업 외 조각, 설치작업 등도 보여주는데 이중 특히 감자, 고구마, 모과 등을 이용한 조각 작업이 눈에 띈다. 작가는 “한 30년 된 작업들이다. 처음 작업할 때는 젊은 사람의 얼굴로 조각했는데, 감자와 고구마가 세월이 흐르고 점점 쪼그라들고 변형을 거치면서 마치 진짜 사람이 나이 들듯 변했다”며 “자연스럽게 변한 지금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이 조각은 마치 내 자화상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자연, 시간과 함께 작업한 작품들로 우리의 실상을 돌아보는 작가. 그는 “내 작업에는 완성이 없다. 항상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했다.
가나아트 측은 “작가는 과거, 현재, 미래 사이를 유영하며 실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그 변화의 편린들을 작업으로 엮어 실상의 개념으로 구현한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축적된 시간의 흔적들을 어느 한 순간의 상(像)으로서 목격한다. 즉, 눈에 보이는 실상(實像)은 결국 허상(虛像)과도 같으며, 작가에게 있어서 실상은 시간과 밀접한 개념”이라며 “그저 만물이 시간 앞에서 결국 바스러져 사라진다는 허무의 개념이 아닌, 시간의 흐름과 서로 영향을 미치고 조화를 이뤄 숙성의 아름다움을 이뤄냄을 발견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이번 전시에서 살필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