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도기천 기자)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 방한을 계기로 ‘제2중동 붐’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반세기 전 국내기업 중 최초로 중동 시장을 개척했던 SK그룹이 주목받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은 부친인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이 50여년전 구축한 ‘중동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투자 영토를 넓히는 중이다. 최 회장은 메마른 중동사막에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사우디는 제1위 원유 공급국이자 제1위 해외건설 수주국이고, 또한 중동 내 우리의 최대 교역국일 뿐만 아니라 최대의 대(對)한국 투자국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의 정상회담에서 사우디와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사우디는 중국(2688억 달러), 미국(1316억 달러), 일본(852억 달러) 등에 이어 우리나라의 8위 교역국(303억 달러)이다. 하지만 수출보다 수입이 6배 이상 많아 우리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공략이 필요한 상대다. 더구나 중동지역 무역수지는 현지정세 불안, 유가 불안정 등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우디 최고실권자인 왕세자가 한국을 다녀갔다는 점에서 재계는 고무된 분위기다. 왕세자의 공식 직함은 부총리 겸 국방부장관이지만 왕위 계승 서열 1위인데다, 고령인 아버지를 대신해 실질적인 정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문 대통령과의 만남도 회동이나 면담이 아닌 정상 간 회담으로 격상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회장, 구광모 LG대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5대그룹 총수들은 그가 머무는 동안 많게는 3번씩이나 만났으며, 삼성은 2010년 전경련 회장단 만찬 이후 9년 만에 승지원(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살던 집을 개조한 저택)을 재계 총수들과 왕세자에게 개방했다.
특히 재계가 주목하는 대목은 왕세자가 직접 지휘하고 있는 ‘네옴 프로젝트’다. 사우디가 석유의존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밀어붙이고 있는 약5000억달러(600조원) 규모의 스마트시티 사업이다.
사우디는 인공지능(AI)과 정보통신기술(ICT) 등 첨단산업 위주로 변신하려는 국가적인 프로젝트 ‘비전 2030’(7000억달러 규모)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중 네옴 프로젝트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반도체, 자동차, 5G 등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우리와의 협력이 필요할 수 있다. 이번 방한 기간 중 △정유·화학 △ICT △전자정보 △자동차 △수소경제 △금융 등 여러 방면에서 83억 달러 규모의 양해각서(MOU) 및 계약이 체결된 것은 이런 흐름을 방증한다.
‘석유 외교’ 물꼬 튼 고 최종현 회장
이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기업이 SK다. 중동 사막길을 맨 먼저 개척해 후발 기업들의 항로를 열었다는 점에 더해, 당시부터 형성된 강력한 중동 네트워크가 왕세자 방한을 계기로 화두가 되고 있기 때문.
SK그룹의 중동 진출 역사는 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국토에서 고 최종현 선대회장은 당시 섬유회사에 불과했던 선경(현 SK)을 원유정제를 비롯한 석유화학·필름·원사·석유까지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석유에서 섬유까지’ 프로젝트다.
그는 경제개발의 동력인 원유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오늘날 에쓰오일이 들어서 있는 울산의 정유공장 위치에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을 추진했다. 하지만 때마침 불어 닥친 제1차 석유파동으로 공장 설립이 좌절됐다.
최 선대회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중동 왕실과의 석유 네트워크를 꾸준히 구축해 나갔다. 치밀한 준비 끝에 마침내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했다. 1983년부터는 해외유전 개발에 나섰고, 이듬해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했다.
그 시절 최 선대회장과 중동 왕실 간의 관계는 지금도 재계에 회자될 정도다.
1970년대 석유파동 당시 석유수출국기구(OPEC)은 ‘이스라엘에 협력하는 나라에는 석유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미국을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우호 관계를 유지해오던 한국은 석유수출 금지국으로 분류됐다. 당시 경제개발에 주력하던 박정희 정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다.
이에 정부는 중동과의 유일한 민간외교 고리였던 최 선대회장을 사우디로 급파했다. 현지로 날아간 최 선대회장은 왕실과 접촉하는 한편 야마니 석유상을 만나 한국에 대한 OPEC의 석유수출금지 조치를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우디정부는 한국정부에게 몇가지 외교적 조건을 제시했고 이를 우리정부가 수용함으로써 본격적인 석유 외교의 물꼬가 터졌다.
이후 선경 측은 사우디 왕자를 국내로 초청해 계열사들을 소개하는 등 다각적인 우호관계를 다져갔다. 그런 친분으로 1977년 최 선대회장은 야마니 석유상의 초청으로 사우디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민간인 신분으로 야마니 석유상의 공식초청을 받은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때도 그는 정부로부터 사우디에서 수입하고 있는 원유량을 증량하는 문제를 교섭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중재에 나섰고, 나름 성과를 거뒀다.
선경의 유공 인수 또한 사우디와의 관계가 배경이 됐다. 정부가 유공의 민영화를 발표했을 때 재계에서는 아무도 선경이 유공을 인수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1억불에 이르는 인수 자금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하지만 최 선대회장은 알 사우디 은행으로부터 1억불의 차관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오랜 세월 사우디 정·재계와 다져온 신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공을 인수한 최 선대회장은 종합 에너지·종합 화학기업으로의 과감한 변신을 단행했다. 중동과의 교역규모를 크게 늘려나갔고, 무려 1조5천억원을 투입해 1991년까지 9개의 신규 석유화학공장을 설립했다. 채 20년이 되지 않는 기간에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꿈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최 선대회장이 1998년 별세하면서 30대의 젊은 나이에 그룹을 승계한 최태원 회장은 중동 국가들과 석유산업을 뛰어넘는 새로운 협력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신성장 동력 발굴이 절실한 중동 산유국들에게 SK가 가진 핵심 기술력을 접목시키는 플랜이다.
최 회장은 선대회장 때부터 쌓아온 중동 네트워크를 무기로 투자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반세기 이어져온 왕실과의 친분
2011년 중동을 방문해 사우디 국영기업 사빅(SABIC)에 협력 사업을 제안했으며, 이 결과 2015년 SK화학이 ‘사빅’과의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2016년에는 아랍에미레이트(UAE) 국부펀드인 MDP의 알 무바라크 CEO 및 석유회사 MP의 무사베 알 카비 CEO 등과 만나 여러 분야에서 협력해 나가기로 합의했으며, 같은해 한국을 방문한 알 하마드알 사바 쿠웨이트 총리와의 면담 때는 에너지·화학, 신에너지, 인프라 구축 등 다양한 투자확대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알 마디 MIC(사우디 방위사업청) 회장, 사우디 왕자인 알 사우드 사빅 회장, 알 이사 리야드 은행 의장 등과도 면담을 갖고 중동 네트워크를 강화했다. 특히 알 마디 회장은 평소 최 회장이 ‘내 오랜 친구’로 표현할 만큼 개인적 친분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아랍에미리트 무함마드 왕세제의 최측근인 칼둔 칼리파 알무바라크 아부다비 행정청장은 최종현 선대회장 때부터 인연을 맺고 교분을 이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칼둔 청장은 2018년 1월 최 회장을 만나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날아오기도 했다. 최 회장은 무함마드 왕세제의 동생 만수르 부총리와도 신뢰가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SK가(家)의 중동 인맥은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SK건설은 최근 UAE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지하 원유비축기지에 이어 사막을 횡단하는 대형 철도공사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국내 건설사 최초로 사우디, 쿠웨이트 등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의 철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현재 SK건설은 UAE 알 만도스 원유비축기지, 카타르 도하 지하철 레드라인, 쿠웨이트 알 주르 항만 등 중동지역 내 다수의 인프라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국내 정유업계 1위인 SK이노베이션은 쿠웨이트, 사우디 등과 원유 관련 사업을 펼치고 있다.
앞으로는 석유화학 분야를 넘어 친환경 에너지에 주력할 생각이다.
사우디 왕세자는 지난달 방한 당시 최 회장과의 단독면담에서 기존 석유화학 외에도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친환경 에너지 사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 외교부는 최 회장과의 면담에 대해 “석유화학, 청정에너지, 환경, 배터리 기술에 대한 협력과 투자방안이 오갔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과거 중동 방문 때마다 왕실·재계 실권자들에게 “자원을 매개로 한 단순한 자원협력을 넘어 기술·자본·마케팅 등 새로운 분야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자”고 제안했었다. 따라서 이번 면담을 계기로 ‘신(新) 에너지’와 관련된 중동 투자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SK家 화려한 중동인맥, 교두보 역할
한편 재계는 사우디 왕세자 방한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주선으로 이뤄진 5대그룹 총수들과 왕세자 간의 승지원 회동을 계기로 16억 중동 시장 공략을 위한 연합체 결성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과거 중동은 주로 건설사들이 오일달러를 벌어들이는 곳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정보통신기술(ICT) 등으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시장으로 부상했기 때문. 이에 반도체·AI(인공지능) 등에 있어 글로벌경쟁력을 확보한 삼성전자, 가전 분야의 LG전자, 수소차 시장 확대를 노리는 현대차 등이 기회를 노리고 있다.
따라서 중동 인맥이 넓고 현지 경험이 풍부한 최 회장의 역할이 주목된다. 1960년생인 최 회장이 이재용(51), 정의선(49), 구광모(41) 등 젊은 총수들에 비해 맏형 격인데다, 지난해 평양정상회담 때 뛰어난 친화력을 보이는 등 재계를 아우르는 역할을 하고 있어, 중동 사업의 구심이 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재계 관계자는 CNB에 “최태원 회장은 과거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의 중동 방문 직전 임 실장을 독대했는데, 당시 재계에서는 최 회장이 현지분위기를 미리 임 실장에게 전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만큼 최 회장은 ‘중동통’으로 알려진 인물”이라며 “글로벌 경기침체와 미중 무역분쟁 등으로 수출·내수 모두 침체를 겪고 있는 와중에 등장한 중동 카드가 새로운 돌파구가 되고 있는 만큼 내심 최 회장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