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대도시 서울과 산사(山寺), 가을 숲과 콘서트, 국악과 재즈. 스님들과 여장 남자…. 얼핏 보아서는 영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들이지만 뛰어난 창의력과 에너지로 가을날 시민들의 문화적 감성을 풍족하게 채워 주었다.
지난 주말인 26일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경국사(慶國寺, 주지 경암스님)에서는 ‘이희문 컴퍼니의 한국남자와 함께하는 경국사 가을음악회’라는 제목의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가을 색깔이 묻어나는 나무들 사이에 조촐한 야외무대와 300여 개의 간이 의자로 마련한 자리였다.
‘한국남자’는 국가무형문화제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인 소리꾼 이희문과 버클리 음대 유학생 출신의 실력파 4인조 재즈밴드 ‘프렐류드’, 그리고 남성 소리꾼 듀오 ‘놈놈’이 함께 하는 프로젝트 그룹이다. 국악인과 재즈밴드의 만남. 얼핏 국악 대중화를 위해 기획된 팀 같지만 이들은 서로의 음악에 반해 자발적으로 밴드를 결성해 함께 곡을 만들고 공연을 다닌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음악을 '섞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시너지를 발휘해 완성도 높은 음악을 추구한다.
이들 음악의 중심에 있는 메인 보컬 이희문은 명창 고주랑의 아들이자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이춘희의 제자이다. 또한 그는 소리꾼들과 록 뮤지션이 모여 만든 프로젝트 밴드 ‘씽씽밴드’의 리드보컬이자 ‘이희문 컴퍼니’의 대표이기도 하다. 씽씽밴드는 지금은 해체했지만 2017년 미국의 공영라디오 방송국 NPR에 한국 뮤지션 최초로 초청되어 공연하는 등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고 국내 마니아 팬들을 양산했으며, 음악 페스티벌마다 단골로 초대되고, 클럽 공연 티켓이 오픈되면 수 분 만에 매진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던 팀이다.
이희문은 특히 화려한 가발과 하이힐 등 여장에 가까운 차림으로 유명한데, 이날도 역시 특유의 스타일로 꾸미고 무대에 올랐다. 엄숙해야 할 것 같은 천년고찰에서 그 모습은 매우 파격적이고, 이질적이었다. 경국사 신도와 인근 성북구 주민이 대부분인 객석 한쪽에서는 그의 등장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그 차림새에 놀랐거나, 코믹한 콘셉트의 공연인 것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반면 이희문과 프렐류드라는 뛰어난 뮤지션들에 대해 익히 알고, 기대에 찬 환호를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공연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왔다는 관객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첫 곡이 끝나기도 전에 관객 대부분이 이들의 음악에 매료되고 말았음을, 객석의 큰 호응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국남자는 이날 우리나라 민요 ‘갈까보다’, ‘강원도 아리랑’, ‘난봉가’, ‘자진아리’ 등을 재즈로 편곡한 곡들을 선보였다. 가사와 가락에 담긴 정서는 한국인에게 익숙했고, 프렐류드의 편곡과 연주는 세련되고 수준 높았다. 그리고 색소폰,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같은 서양 악기들과 전통 소리꾼 이희문의 때론 간드러지고 때론 에너지가 폭발하는 목소리의 조화는 신선하고 트렌디한 음악이 되어 기분 좋게 가을 숲을 수놓았다.
한 시간가량 이어진 공연이 끝날 무렵,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춤을 추며 놀았고, 앵콜 곡이 끝난 뒤에도 또다시 앵콜을 외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날 경국사는 산사음악회에 앞서 오전에는 괘불문화재 산책 행사도 열었다. 경국사에는 삼존불을 그린 서울시유형문화재 264호인 괘불도가 전해진다. 1878년에 걸쳐 조성된 가로 3.75m, 세로 6.1m의 대형 괘불도가 이날 대중에게 공개되고 전문가들이 괘불도에 대해 설명하는 강연도 펼쳐졌다.
경국사 주지 경암스님은 “도심 속 전통사찰인 경국사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고 싶은 마음에 괘불문화재 산책과 산사음악회를 마련했다”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성보문화재인 괘불을 친견할 수 있는 자리와 함께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인 음악을 선보이는 음악가 이희문 명창을 초대했는데 즐거움과 위안을 얻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경국사(慶國寺)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5년 율사 정자(淨慈)가 창건했으며, 조선 명종 때는 왕실이 호국법회를 주관하기도 했던 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