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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49) 탑산 증미산] 없어진 소요당과 ‘주초위왕’의 헛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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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69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2.17 09:13:58

(CNB저널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오늘은 겸재의 그림 소요정(逍遙亭)과 이수정(二水亭)을 따라 발길을 옮긴다. 허준박물관이 있는 구암공원과, 탑산과, 염창동 증미산이다. 전호(前號)에 이미 소개한 공암층탑(孔岩層塔)은 이번에 살펴볼 소요정과 거의 유사하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같은 곳을 두 번 그린 그림이다. 차이가 있다면 소요정에는 어느 승려의 부도탑(浮屠塔)으로 보이는 탑을 빼고 그렸을 뿐이다. 물론 이 그림에도 광주바위와 탑산을 그렸는데 전과 마찬가지로 탑산을 광주바위 쪽으로, 즉 상류 방향으로 이동시켜 그 곁에 한 화면으로 그렸다. 이유는 전호에서 살폈듯이 그림의 구도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 왜 같은 구도의 작품을 다시 그렸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잘은 모르지만 이런 추측도 해 본다. 겸재는 조선 최고의 산수화 작가이면서 또한 조선 최고의 인기 작가였다. 이름을 얻은 후에는 밀려드는 주문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라 했고, 그러함에도 주문에 수응(酬應)했다 한다. 관아재 조영석에 의하면, 자연히 급히 응대하는 붓놀림 법(응졸지법: 應猝之法)도 창안해야 했고, 최근 전공자들에 의하면 마석린이나 둘째 아들 만수 등을 동원해 대필 그림도 그렸다 하니 새롭게 장소를 찾아 새 그림을 그리기보다 한 번 그려놓은 그림을 모본으로 하여 변형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도 1. 답사 길. 
지도 2. 옛 양천현 읍지에서.

우선 오늘 갈 길을 최근의 지도와 옛 양천현 지도로 살려보려 한다. 지도 1은 최근 지도에 답사 길을 표시해 본 것이다. 소요정과 공암층탑의 배경이 되는 탑산, 광주바위(구암공원)에서 출발하여 공원길 또는 강변 길을 걸어 증미산(염창산)으로 가는 답사 길이다. 증미산은 오늘 두 번째 만나는 그림 이수정(二水亭)이 있던 곳이다. 지도 2는 양천군 읍지에 실려 있는 지도인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던 옛 지명도 있고 겸재의 그림 위치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잠시 살펴보면 공암으로 기록한 산 즉 탑산과, 광제암(廣濟岩)으로 기록한 세 바위(광주바위)가 지금도 그렇지만 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말라버린 학천도 그려져 있고 이어지는 산들에는 영벽정(暎碧亭)이 있었는데 지금은 산도 정자도 모두 없어져 아파트촌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행히 이수정(二水亭)을 그려놓은 산 증미산은 건재해 있는데 양천의 다른 정자들처럼 이수정도 자취를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그림 속의 암지산은 도대체 어디로?

그런데 이상도 하구나. 이수정(증미산) 옆으로는 암지산(岩芝山)이란 산이 있는데 아무리 산을 찾으려 해도 산은 없고 안양천만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왜일까?

 

지도 3. 탑산을 소요산(逍遙山)이라 써 놓은 옛 지도. 

다시 다른 옛 지도(지도 3)을 보자. 이 지도에는 탑산을 소요산(逍遙山)이라 써 놓았다. 비로소 탑산과 소요산과 소요정이 한 고리로 연결된다. 옆에는 공암(孔岩)도 적어 놓았고 구암공원(광주바위)으로 흘러드는 학천(鶴川)도 선 굵게 그려 놓았다. 옆으로는 지금은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흔적도 없어진 낙산(洛山?, 澄山?)도 기록되어 있고 드디어 이수정이 자리했던 산 이름이 염창산(鹽倉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옆으로는 역시나 암지산(岩之山)이 그려져 있고 그 동쪽으로 안양천, 다시 동쪽으로 선유봉과 양화진이 그려져 있다. 도대체 염창산 우측에 암지산은 어디로 갔으며 지금 안양천 건너에 있는 쥐봉(인공폭포 산)은 어디로 가고 선유봉이란 말인가?

 

지도 4. 일제시대의 지도.

궁금하여 일제 초기에 그려진 지도를 찾아보았다(지도 4). 여기에도 공암(1)이 그려져 있고 강 따라 상류로 오르면 증산(甑山, 2)이라 적어 놓은 우측으로 염창리(鹽倉里, 3)라 쓰여 있다. 그런데 상류 쪽으로 조금 우측에는 작은 산이 그려져 있는데(6) 안양천은 그 우측으로 흐른다.

조선조 지도로부터 일제 초기의 지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도에는 증미산(증산, 염창산) 우측 상류 방향에 이른바 암지산(岩芝山)이라는 산이 있고 그 우측으로 안양천이 한강으로 흘러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상류에 산이라면 선유봉이 유일했다. 지금은 어떤가?

 

현재 남아 있는 광주바위.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증미산(증산, 염창산) 우측 상류에는 어떤 산도 없이 안양천이 한강으로 합수된다. 참 모를 일이다. 이 문제는 일단 논제로 던져 놓고 이수정 그림을 볼 때 다시 살펴보려 한다.

그러면 소요정(逍遙亭)이란 화제(畵題)로 그린 그림에 소요정은 왜 나타나 있지 않을까? 누구의 정자이며 어디에 있었을까? 간송의 최완수 선생이 이미 친절하게 설명했으니 새삼스레 덧붙일 일은 없다. 옛글을 찾아가 보자. 명종, 선조 연간에 명신(名臣)으로, 의병대장으로, 청백리로 살다간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그 힌트가 실려 있다.

나의 조부(소요공 심정: 沈貞)는 양천현(陽川縣) 동북쪽에 있는 공암(孔巖) 서쪽 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逍遙堂)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漢江)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은 이것들로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南袞)의 율시 두 수가 있는데, 그 한 수에 이르기를
(吾祖父作堂於陽川縣東北孔巖西江岸上. 名曰逍遙. 其形勝爲漢江以下沿江亭榭之最. 一時名士題詠滿壁. 南衮有二律. 其一曰)


물은 여한(驪漢:여주 앞 남한강)에서 산은 삼각산에서
모두 정자 앞 향하니 새삼 기이하구나
섬 하나(난지도?) 교묘히 확 트인 강 마주하고
긴 이내 두루두루 달 뜰 때 피어나네
바라보면 중경(개경?) 어귀와 볼수록 비슷한데
꿈속에 구지국에 왔나 스스로 의아하네
그대 소요코자 하더니 어찌 이리 급하신가
다음에 흰 수염 드리우며 늘 찾아 가겠네
(水從驪漢山從華.
盡向亭前更效奇.
孤島巧當江闊處.
長烟遍起月生時.
望中京口看猶似.
夢裡仇池到自疑.
君欲逍遙寧遽得.
他年長往鬢垂絲.)


이 글에 의하면, 심수경의 할아버지인 중종(中宗)조 중신 심정(沈貞)은 공암 서쪽 강가에 집을 짓고 소요당(逍遙堂)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에 동지(同志)인 남곤(南袞)이 소요당에 대한 칠언율시(七言律詩) 두 수를 지어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지도에서 이 탑산을 소요산이라 했었는데 유추해 보면 심정이 호를 소요공(逍遙公)으로 하고, 이 산 서쪽에 집을 짓고 그 이름도 소요당이라 했기에 소요산으로 부르게 되었음도 알 수 있다.
 

증미산 오르는 길 위에서 바라본 한강.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소요당이었나, 소요정이었나

한편 양천군지에서는 “소요정은 진산(津山, 탑산, 소요산, 공암) 남쪽 기슭에 있었다(逍遙亭在津山南麓)”고 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할아버지 일을 기록한 견한잡록과 300년쯤 뒤 읍지의 기록을 비교한다면, 아마도 견한잡록의 기록이 맞을 것이다. 양천군읍지에는 소요당을 소요정으로 기록했고 위치도 산의 서쪽을 남쪽으로 기록했으니 살짝 틀린 것 같다. 겸재도 소요당을 화제에 소요정(逍遙亭)으로 썼으니 마찬가지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또 하나 자료가 있다. 심정과 같은 시대에 나라에서 발간한 책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소요당(逍遙堂)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堂)이거나 정(亭)이거나 문제될 것이야 뭐 있겠냐마는 그래도 알고는 지나가자.

소요당(逍遙堂): 현 동쪽 4리 지점에 있다. 좌의정 심정(沈貞)의 별서이다.
(逍遙堂在縣東四里 左議政沈貞別墅)


그러면서 위 견한잡록에서 벽에 가득했다는 시(題詠)들을 실었다. 당대의 문인이며 한가닥하는 이들이다. 최숙생(崔淑生), 문계창(文繼昌), 남곤(南袞), 윤순(尹珣), 김준손(金俊孫), 손수(孫洙) 이런 이들의 시(詩)들이 벽면 가득 걸려 있었는데 지면을 아끼기 위해 소개는 생략하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사진을 올리니 참고하십시오.

 

소요당 관련 시들이 실린 동국여지승람. 

그러면 이 별서의 주인 심정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시를 지어 보낸 남곤은 또 누구였을까? 필자가 중학교를 다닐 때 1학년 교과서였던가, 거기에는 애들 마음에도 분노를 일으키고, 한편으로는 기발하기도 하구나 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이른바 충신 조광조(趙光祖)와 간신 심정(沈貞), 남곤(南袞)의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에 등장한 방법이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파먹게 한 후 그 나뭇잎을 이용해서 조광조를 귀양 보내고 끝내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주초위왕(走肖爲王) 고사를 다시 돌아보자.

남곤-심정은 그렇게 악인들이었을까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반정 세력을 기반으로 해서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그들을 과도하게 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처음에는 좋았으나 갈수록 반정 세력이 불편한 존재들로 되어갔다. 이때 새로 등장한 세력이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었는데 그 대표가 바로 정암 조광조(趙光祖)였다. 그는 철저한 성리학자 김굉필(金宏弼)에게 공부한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꿈꾸는 사람이었다. 훈구세력의 70여 명의 공훈을 삭제하고, 과거 없이 인재를 발탁하는 현량과를 시행하고, 왕에게도 철저한 수양을 요구하여 끊임없이 왕을 가르치고 밀어붙였다. 성군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집념이었다.

세상은 왕보다 정암의 눈치를 보는 모양새로 변해 갔다. 이건 승냥이를 몰아내니 호랑이 굴에 든 꼴이 되었다. 이에 중종은 훈구세력과 손을 잡고 조광조를 몰아내 능주(화순)로 유배 보내고 이어서 사약을 내렸다. 어느 누구도 조광조의 사사(賜死)까지 바라는 이는 없었다. 중종이 그렇게 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심정과 남곤 등이 궁인(宮人: 경빈 박씨네 사람)을 시켜 꿀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趙)를 파자(破字)하여 주초(走肖)로 썼다 했으니 조위왕(趙爲王: 조가 왕이 된다) 나뭇잎 증거를 만들어 조광조를 죽였다는 것이 교과서 내용이었다. 그때 어린 내 마음은 분노로 가득했고, 주초(走肖)라는 파자(破字)가 멋있었고, 꿀을 발라 증거를 조작했다는 방법이 경이로웠다.

나이가 들면서 중종실록을 찾아보았다. 어디에도 주초위왕은 없었다. 이건 뭐지? 한참 후 선조시대에 와서 비로소 실록에 주초위왕이 등장했다.

왜 교과서에까지 ‘주초위왕’ 거짓말을?

때는 선조 1년 무진(1568) 9월 21일 기록인데 중종실록에 누락된 남곤 등이 조광조를 모해한 전말이라는 내용이다. 기묘사화가 1519년( 중종14년) 일이니 50년 전 이야기를 사관이 알아서 쓴 것이다.

당초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기를 마치 한(漢)나라 공손(公孫)인 병이(病已)의 일처럼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이 하였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 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告變)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를 대략 기록한다.(當初袞求交於趙光祖等, 光祖等不許. 袞積憾, 欲殺光祖等, 求得木葉上食甘之蟲, 以蜜多書走肖爲王四字於木葉上, 放蟲而使之食, 如漢 公孫病已之事, 有若天成者然. 袞家在白岳山下景福宮後, 自其家泛水, 而流送於闕內御溝, 使中廟見而大驚. 因告變以成其禍, 中廟實錄或爲遺漏, 故於此略爲載錄)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우리 시대 사람들은 그것이 궁금하여 어느 대학 교수는 몇 달 동안 수십 종 나무에 달콤한 여러 물질을 나뭇잎에 묻혀 그 결과를 실험하였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단 하나의 나뭇잎도 갉아먹은 것이 없었다. 방송의 역사 프로그램에서도 실험을 했는데 갉아먹힌 나뭇잎은 하나도 없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이야기는 거짓이었던 것이다. 이는 훈구세력(勳舊勢力)과 신진세력(新進勢力)의 정치 파워가 부딪친 사건이 아니었을까? 이후 훈구세력은 다시 실각하여 죽음을 맞거나 귀양 길에 올랐고 그 후로 조선은 나라가 끝날 때까지 신진세력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심정, 남곤 등의 훈구세력은 조선은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두고두고 간신의 꼬리표를 떼기 어렵게 되었다. 주초위왕이 교과서에 실린 난센스를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남곤-심정의 실각 뒤 없어졌을 소요당

시정(市井)에는 곤쟁이젓 유래가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필자는 곤쟁이젓을 맛있어 했다. 적갈색이면서 또 푸르스름한 회색을 띄고 콩콩한 맛을 내는 곤쟁이젓을 밥에 얹어 찌면 감칠맛이 좋았다. 우리 어머니는 간신 남곤과 심정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그 쫌팽이 간신들의 이름을 이 볼품없는 젓갈에 붙여 ‘곤정(남곤, 심정)이 젓’이라 한다시며 많이 먹지 말라 하셨다. 가방끈이 짧은 분이셨는데도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을 보면, 이 인물들이 얼마나 심하게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50년 후 실록의 기록도 사관이 써 놓았고, 실록을 편수하면서도 편수관도 이의 없이 실록에 올린 것을 보면 내 편과 네 편의 칼날은 참으로 끔찍하다. 당대의 대문장가 남곤은 스스로 글을 불살라 글 한 편 만나보기 힘들고, 심정의 글을 엮은 소요당집도 우리 시대에 와서야 그 후손이 가지고 있던 조상 심정의 유고를 정리해 냈으니 낙인의 혹독함은 질기다. 이런 사정으로 볼 때 겸재의 그림에 어떻게 소요당(逍遙堂)이 제 모습으로 남아 있겠는가? 아마도 심정 실각 후 오래지 않아 사라졌을 것이다.

이제 이수정(二水亭)을 찾아간다. 광주바위에서 증미산(증산, 염창산, 도당산)으로 가는 길은 공원 길로 이어져 있다(지도 1 참조). 증미산은 강변 방향은 바위와 흙으로 이루어진 매우 가파른 기울기의 경사면이고 다른 방향은 경사면이 느린 편안한 흙 길로 이루어져 있다. 겸재는 1742년도쯤 고도 50여m, 거의 정상부에 있는 정자 이수정을 그렸다.

 

겸재 작 ‘이수정’ 간송본. 
겸재 작 ‘이수정’ 김충현 본. 

이수정(二水亭) 그림은 간송본과 김충현본 각각 두 점이 전해진다. 구도는 거의 비슷한데 간송본의 시야가 조금 넓어 구비 도는 한강 모습을 더 넓게 그렸다. 두 그림 모두 배를 타고 한강을 오르면서 비스듬한 시각으로 그린 그림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길에 계단이 보이고 그 끝에 솟을대문으로 보이는 문 너머로 이수정 건물이 ㄱ 자로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이 증미산 북쪽 한강 방향에서는 산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옛 이수정 오르던 계단을 연상케 한다.

양천군읍지에 의하면 ‘염창탄(현 안양천) 서쪽 깎아지른 절벽 위에 효령(孝寧)대군의 임정(林亭)이 있었다. 그 후에 한흥군 이덕연(李德演, 1555∼1636)과 그 아우인 찬성(贊成)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이 늙어서 정자를 고쳐 짓고 이수정(二水亭)이라 했다.’

이 형제는 고려말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5대 윗대 할머니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따님이었기에 대군의 임정 땅이 한산 이씨 땅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산 위쪽에 형제는 정자를 짓고 이수정이라 했다

이산해의 아계유고에는 이수정기(二水亭記)가 실려 있는데 정자를 지은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글이다.

나의 종계(宗契)인 이덕연(李君德演) 군이 양화진(楊花津) 남쪽 언덕에다가 정자를 하나 지어 백로주(白鷺洲)와 서로 마주보게 해놓고 이름을 이수정(二水亭)이라 하였다. 물이 양화진으로 흘러드는 것이 두 곳이 있는데, 이는 대개 이 적선(李謫仙: 이백)의 시(詩)에서 ‘이수는 백로주를 끼고 둘로 나뉘었다(二水中分白鷺洲)’라는 구절을 취한 것이다.

이군의 왕조부(王祖父) 상국공(相國公)이 일찍이 이곳을 점지하여 장차 조그만 정자를 지으려 하였다가 이루지 못했으니, 이곳에다 정자를 지은 것은 선조의 뜻을 계승한 것이다. 군이 젊어서 과거 공부를 익혔으나 누차 장옥(場屋)에 불리하였고 결국 음사(蔭仕)로 현령이 되었다. 얼마 후에 사임하고 돌아와 이 정자에서 노년을 보내면서 산수를 즐기겠다고 하였다. 군의 아우 보덕공(輔德公)이 바야흐로 조정에서 현직에 올랐으므로 동생을 찾을 때가 아니면 도성 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권귀(權貴)한 자의 문에 드나드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吾宗契李君德演. 構亭於楊花渡之南岸. 與白鷺洲相對. 名之曰二水者. 水之流入于楊花者有二. 而蓋取李謫仙二水中分白鷺洲之句也. 李君王祖父相國公嘗卜是區. 將營小築而未果. 亭之作. 述先志也. 君少習擧子業. 屢不利於場屋. 以蔭仕知縣. 未幾解綬歸. 將老於玆亭之上. 以山水自娛. 君之少弟輔德公方顯于朝. 非訪弟則不肯入城市. 此豈與奔走權貴之門者比哉.


이백의 시에서 비롯됐을 이수정

이 글을 보면 이수정이란 이름은 이백(李白)의 시(詩) ‘登金陵鳳凰臺(금릉봉황대에 오르다)’에서 비롯된 이름이라 한다. 그러면서 양화진으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2개라 했으니 아마도 안양천과 홍제천을 이르는 말 같다. 이 두 물줄기가 이수(二水)인 셈이다.

 

증미산 산길.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이제 증미산으로 오른다. 어떤 이들은 이 산 이름의 유래를 이야기하는데, 산 앞 한강 물속에는 도깨비바위라는 암초가 있어 세곡(稅穀)을 실은 배들이 김포에서 마포나루로 가던 도중 종종 도깨비바위에 부딪혀 좌초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물에 빠진 곡식을 건져내던 곳이라 하여 건질 증(拯)자와 쌀 미(米)자를 써서 증미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깨비바위는 올림픽도로를 만들 때 없어졌고, 증미산은 어떤 연유에선지 일찍 증(曾)자로 바뀌기도 했다.

높이라야 50m여인데 강변 쪽 계단 길은 가파르고 정상은 운동장만큼 평평하다. 그곳에는 요즈음 스타일로 지은 정자 염창정이 있다. 증미산의 또 다른 이름이 염창산이라 염창정이란 이름을 붙였다. 조선시대에 서해 지방에서 조세로 받은 소금을 저장하던 창고가 이 지역에 있었기에 염창(鹽倉: 소금 창고)라는 말이 생겼다 한다.
강 건너로는 난지도의 하늘공원, 노을공원이 지척이고 그 너머로는 북한산이 선명하다. 강가로는 한강 삼천리아파트 뒤로 안양천이 한강으로 흘러든다.

앞 지도에서도 의문을 제기했듯이 안양천은 여지승람에서는 대천(大川), 대동여지도에서는 기탄(岐灘), 읍지에서는 염창항탄(鹽倉項灘)으로 기록하였는데, 옛 지도에는 증미산과 안양천 사이에 암지산(岩芝山)이 그려져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암지산은 지금 인공 폭포를 설치해 놓은 쥐봉으로, 숙종 때 첨중추부사 강효직(姜孝直)에게 사패지(賜牌地)로 하사(下賜)함으로써 진주(晋州) 강씨의 묘역이 많은 곳이다.

그렇게 보면 일제시대 어느 때인가 인공 폭포가 있는 쥐봉(암지산) 동쪽으로 흐르던 안양천의 물줄기를 증미산과 쥐봉 사이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서울의 하천’에도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 미확인의 찜찜함을 남기고 다음 회에는 한강 길을 걸어 동작진 쪽으로 가 보리라. 겸재의 그림이 또 기다리고 있으니.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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