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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41) 작가 성정원] 전시장 가득 채운 종이컵들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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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70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0.03.02 09:24:53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성정원은 꽤 오래전부터 자신이 일상에서 사용했던 일회용 종이컵을 수집하고, 촬영해 사진으로 보여주는 ‘일회용 하루’(2008~현재) 시리즈에 매진하고 있다. ‘일회용 하루’는 소재의 선택에서부터 작품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미술의 영역을 벗어난다. 오늘날의 미술에서는 단어 그대로 무엇이든 미술의 주제와 소재가 될 수 있다. 관객들도 이제 그와 같은 미술에 익숙하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 익숙한 사람이라 해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종이컵 이미지를 마주하면 그 평범함과 일상성에 조금은 당황할지 모른다. 하지만 성정원은 평범한 것이 가장 묵직한 울림을 줄 수 있으며, 지극히 가벼워 보이는 종이컵으로 참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일회용품의 남용으로 인한 쓰레기와 환경 문제, 현대 도시인의 삶, 일상의 가치, 대화의 시간 등이 떠오른다.

작년 봄,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동명의 개인전에서 성정원의 종이컵 사진은 A4 용지에 인쇄되어 액자 없이 전시되었다. 한 줌의 바람에도 나풀거릴 것만 같은 종이컵 사진이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우자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장관이 만들어졌다. 그 종류를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이컵들은 자신이 사용되었던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소환해냈다. 미처 떠오르지 못한 기억의 빈자리가 있어도 괜찮다. 그 빈자리는 관객의 기억과 상상으로 채워질 것이다.
 

성정원, <Can you hear me?> 갤러리 룩스 전시 전경, 2013, 사진=임장활 ⓒ성정원

성정원 작가와의 대화

Q. 작가 성정원을 생각하면 일회용 종이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종이컵을 소재로 작업을 한 지 오래되기도 했지만, 작년에 있었던 청주시립미술관에서의 전시 ‘일회용 하루’(2019)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물, 그리고 일회용품이 있다. 그중 종이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A. 나에게 일회용 종이컵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가장 먼저 산업사회, 소비사회와 관련해서 대량생산품이며 실용성에 근거해 디자인이 고정적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종이컵에 특정 회사의 상표가 명확히 보이게 인쇄된다는 점도 나의 흥미를 끌었다. 정형화된 형태와 달리 상표는 각양각색이다. 한편 종이컵이 액체를 담는다는 부분도 중요하다. 물이 담기면 생존과 관련된 필수품이 되지만 커피와 같은 기호 음료가 담기면 소비적인 물건이 된다. 때론 패션 소품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만약 종이컵에 정화수가 담긴다면 기도와 기원의 의미까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담긴다’는 단어 자체의 뜻도 재미있다. 물질적인 무언가 담길 수도 있지만, 마음처럼 추상적인 무언가가 담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Q. 종이컵 외에 관심을 갖고 있는 물건이나 일회용품이 있는가?

A. 음식을 먹는 행위와 관련된 일회용 수저와 포크도 재미있는 소재이자 재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회용품이라는 재료의 속성상 나만의 작업으로 발전시키려면 충분한 고민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일상에서는 과일 포장 용기인 폴리프로필렌 투명 상자를 모아 재활용한다. 플라스틱 상자를 별도로 구입하지 않고 수납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생각보다 튼튼해서 오래 사용할 수 있다.
 

성정원, <일회용 하루> 전시 전경, 2019, 사진=서근원 ⓒ청주시립미술관

Q. 작가가 얼마나 의도했는지 모르겠으나 작품을 보면 소비사회와 자본주의, 그로 인한 환경 오염 등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전하는 작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평상시에 그와 관련된 주제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가?

A. 사실 나의 작업이 사회를 향한 비판의 강도가 세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보다는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이 담아내는 시간성에 주목하면서 시작한 작업이다. 물론 현실 비판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평상시에 무언가를 사고, 사용하고, 버리다 보면 이 세상 혹은 자연에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인간은 참 미안한 존재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미술도 인간 중심적인 생산물이다. 산업사회, 소비사회가 인간이 오늘과 같은 문명을 만들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 것은 맞지만 끝없이 소비를 조장하는 분위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상에서는 무엇보다 쓰레기를 안 만들려고 노력하고 최대한 재활용하려 한다. 특별할 것 없어 보여도 소소한 노력이 쌓이면 의미가 있다. 또한 평상시에 도시건설이나 환경과 관련된 뉴스를 많이 보는 편이다. 개인적 의견으로, 우리나라는 건축물조차 일회용품처럼 대하는 것 같다. 건물을 너무 쉽게 짓고 너무 쉽게 허문다. 아파트를 지은 지 20년 정도만 지나면 재개발 이야기를 한다. 근대화와 자본주의가 만나서 더욱 소비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매우 복합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비판만 해서는 안 되지만 문제를 인식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대안을 마련하고 조절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정원, <한 개의 플라스틱컵>, 76.2 x 71.1cm, 디지털 컬러 프린트, 2009, 사진=성정원 제공

Q. 흙으로 컵을 만드는 작업도 이러한 문제 인식이나 지향과 관련된 것인가?

A. 연관성은 있지만 선후 관계가 조금 다르다. 원래 흙을 만지고 그 물성을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종이컵을 수집하고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것보다 흙으로 종이컵을 만든 것이 먼저다. 2004년경 흙으로 일회용 컵을 만들었다. 수집은 2007년부터 시작했는데, 내가 사용했던 컵 중에 –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에서 - 마음에 드는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때 흙으로 만든 컵이 깨지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 작업 ‘커피컵’(2007)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8년부터는 내가 사용한 모든 컵을 다 수집하게 되었다. 종이컵이 생산되는 과정은 기계적이다. 그러나 종이컵을 사용하는 상황은 조금 다르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촉각적 경험이 달라진다. 뜨거운 물을 담아 마실 때 점점 식어가는 느낌이라든가, 물을 오래 담아두었을 때 종이컵에 습기가 스며든다든가, 아니면 구겨진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성정원, <일회용 하루>, 가변설치, 컬러 레이저 프린트, 실, 테이프, 2019, 사진=서근원 ⓒ청주시립미술관

Q. 손으로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흙 말고 좋아하는 재료가 있는가?

A. 종이를 좋아한다. 예전에 종이를 이용한 작업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하지 않지만 목조도 좋아했다. 차가운 느낌이 나는 스테인리스 스틸은 좋아하지 않는다. 금속 중에서도 구리처럼 따뜻한 빛깔을 가진 것을 좋아한다. 촉각적으로 온기가 느껴지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Q. 일회용 컵이 작업의 주인공이다 보니 소비사회나 환경 오염 등에 대한 비판을 전하는 작업으로 단정 지어 해석될 위험이 있어 보인다. 그와 같은 해석을 하는 관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명확한 메시지가 읽힌다고 생각되면 그 밖의 다양한 해석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A. 나의 작업을 그렇게 보는 것도 틀린 해석은 아니다. 실제로 그런 의미도 어느 정도 담겨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종이컵을 수집하면 시간과 공간이 누적된다. 내가 각각의 컵을 사용했던 시간과 장소에서의 기억이 쌓이는 거다. 그런데 특정한 장소에서는 특정한 컵만 사용하게 된다. 오늘, 일주일 전, 한 달 전 모두 마찬가지다. 한 장소이지만 시간대는 다른 종이컵들, 같은 형태인데 사용한 흔적이 조금씩 다른 종이컵들을 쌓아놓고 보면 시간의 지층을 느낄 수도 있고, 반대로 여러 시간이 같은 장소에 공존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나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갖게 되는 경험이 누적되는 것을 좋아한다. 같은 장소라도 시간에 따라서 느끼는 감정이 달라질 때가 있다. 반대로 같은 장소에서 매번 같은 감정이 만들어질 때도 있다. 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유사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때로 사건은 잘 기억 안 나는데 당시에 느꼈던 감정만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나의 작업 전반에는 이런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그런 기억과 감정의 미묘한 작용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뽑아냈던 전시가 ‘끼워 맞춘 달’(2018)이다.
 

성정원, <끼워 맞춘 달>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전시 전경, 2018, ⓒ대전문화재단

Q. ‘Can you hear me’(2013)의 경우 종이컵을 이용해서 전화기를 만들었다. 일회용품의 시대는 단절, 소통 부재와 짝을 이룬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특정한 물건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사람들 사이에 함께 하는 시간도 줄어든 것 같다. 모스부호를 사용한 것도 대화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A. 그렇다. 당시 관계의 일회성과 연속성, 지속성 등을 고민했었다. ‘오늘날 과연 연속적인 관계가 가능할까?’라는 궁금증이 있었다. 더해서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작품에 담고 싶었다. 종이컵으로 만든 전화기를 통해 같은 공간에 없어도 텔레파시처럼 무언가를 계속 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은유하고 싶었다. 모스부호의 경우 언어의 추상성이나 모호성에 관한 의미도 담겨 있다. 나의 작업을 보면 관계를 다룰 때 선(line)이나 언어가 표면에 드러난다. 사람들은 대화를 할 때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100%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신만의 의미로 해석한다. 과연 완벽하게 전달되는 의미란 존재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담긴 작품이다.

Q. 종이컵 하나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종이컵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현대인과 연결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전보다 그 사용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일회용품은 여전히 패스트푸드, 배달음식 등을 포장할 때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이런 음식은 평범한 사람(우리)들이 즐겨 먹는 것이다. 이 경우 일회용 종이컵은 대중의 상징이 될 수 있다.

A. 일회용 종이컵은 생수 자동판매기를 위해 발명되었고, 이후 위생적인 이유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런데 100%는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날에는 주로 삶의 질에 관심이 많거나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일회용품을 피한다. 상대적으로 하루하루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는, 말 그대로 삶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음식을 만드는 데 드는 노동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패스트푸드나 배달음식을 많이 먹게 되고, 이 경우 자연히 일회용품을 많이 쓰게 된다. 그런데 일회용품에 담기는 음식도 일회용품처럼 생산된다. 균일한 맛을 가진 대량생산된 음식이다. 이것은 환경을 생각하는 것과는 또 다른, 사회 계층이나 삶의 질과 연결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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