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0호 윤지원⁄ 2020.07.23 16:24:31
서울에서 캐나다산 활 랍스터를 먹을 수 있는 이유
운송 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식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마차는 오전에 농가에서 출하한 제품이 도시 가정의 저녁 식탁에 올라갈 수 있게 했다. 몇 톤의 화물을 싣고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가 개발되고, 냉동까지 할 수 있는 기술이 더해지면서 내륙에서 신선한 바다 생물을 날로 먹는 일도 흔해질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뒤면 스마트 채소 재배기가 장착된 자율주행 차량이 대도시 이곳저곳을 누비며 최종 소비자에게 ‘밭에서 갓 수확한’ 채소를 맛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언급한 예들은 주로 유통 분야 발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운송 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식사 문화도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다. 특히 자동차는 외식 산업, 나아가 관광 산업을 본격적으로 확대하고, 20세기 전 세계 미식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우며 요리를 예술의 영역으로 승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동차 타이어 회사가 만든 맛집 가이드 북, ‘미쉐린 가이드’ 얘기다.
120여 년 전 최첨단 기술의 총아였던 자동차의 가장 큰 라이벌은 대략 2천 년 동안 ‘가장 유용한 육상 운송 수단’ 인기 순위 1위를 놓친 적 없는 ‘마차’였다.
벤츠나 BMW가 항공기 엔진을 만들던 기술로 아무리 빠른 속도를 과시하고, 아무리 멋드러진 리무진을 소개해도 대중의 호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도시에 하는 부자들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마차를 더 선호했다. 자동차를 사고도 마차를 타는 사람들도 많았다.
미쉐린, 타이어 매출 늘리려 맛집 소개하다
당시엔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자동차가 달리기 좋은 포장도로가 많지 않았고, 주유소의 개념도 없었기 때문에 자동차로 장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생소하고, 불편하며 골치 아픈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 갈 일이 있으면 느려도 마차로 다니는 게 속 편했다.
사람들이 차를 많이 몰고 다니지 않으면 타이어 회사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 미쉐린 타이어는 그래서 사람들의 자동차 여행을 독려하기 위한 가이드북을 만들었다. 설립자 에두아르 미쉐린의 친형이 프랑스 내무부 산하 지도국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수월했던 일이기도 하다.
처음엔 전국의 자동차 도로와 주유소 위치, 도로법규, 자동차 정비 요령 등이 담긴 책자를 무료로 나눠줬고, 당시 장거리 여행객은 숙박을 하는 일이 많았기에 지역별 숙소 리스트와 위치, 숙소의 장단점, 숙소에서 제공하는 식사 메뉴 등을 함께 수록했다.
이처럼 처음에 미쉐린 가이드는 여행자가 초행길에서 헤매지 않고, 따뜻한 잠자리와 끼니를 무사히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인 실용적인 안내서였다. 그리고 책자를 만들고, 나눠주는 속뜻은 이랬다. 이 책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차 몰고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니시라. 그래서 타이어를 빨리빨리 소모하고, 새 타이어를 구매하시라.
이후 갈수록 자동차 도로도 늘어나고, 자동차 성능도 개선되면서 소위 ‘전국 1일 생활권’이 되니 숙소 안내의 소용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미쉐린 가이드는 점점 진화했다. 필요해서 운행하는 여행객들을 위한 안내서를 넘어서, 집에서 쉬어도 되는 사람까지 굳이 일부러 차를 운전하고 싶게 만드는, 유혹의 책자로 변모한 것이다.
일요일에 자동차 시동 걸게 하는 맛집의 유혹
식당마다 별점을 매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전국, 전 유럽의 숙소와 식당을 돌아다니며 각 업소의 장단점과 개성을 평가해 온 노하우를 더욱 섬세하고 철저하게 발전시켜 기준을 만든 것. “우리가 전국 식당에 다 가봤는데, 이 집은 평범한 수준이다.” “우리가 다 가봤는데, 이 집은 정말 맛있다.” 미쉐린 가이드 제작진보다 많은 식당에 가서 많은 음식을 골고루 먹어본 사람들은 전 세계를 통틀어 극히 일부였기 때문에 미쉐린 가이드의 신뢰도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쉐린 가이드의 별점의 의미는 독특하다.
별 1개는 요리가 훌륭한 식당을 말한다. 어쩌다 여행하는 동네에 그 식당이 있다면 맛있게 먹을 집이라는 뜻이다.
별 2개는 요리가 훌륭해서 멀리 찾아갈 만한(우회할만한) 식당을 말한다. ‘우회’를 언급한 순간 타이어 마모가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별 3개는 요리가 탁월하게 훌륭해서 일부러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식당을 말한다. 쉬는 날에도 운전대를 잡게 만드는 유혹이다.
별점의 힘은 대단하다. 어떤 식당이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별 1개만 받아도 식당 매출이 평생 보장받을 정도고, 미쉐린 별이 달린 식당에서 일한 경력만 있어도 자기 식당을 낼 때 크나큰 메리트가 된다. 별 2개나 별 3개는 세계적인 장인으로 인정받는 수준으로, 전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손님은 물론 제자와 추종자가 줄을 잇는 유명인사가 된다.
120년 전 프랑스의 운전자 지침서에서 시작된 미쉐린 가이드가 2020년 대한민국 사람들의 미식 문화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2016년 아시아에서 네 번째로 미쉐린 가이드 ‘한국 서울’ 편이 공개되었을 때, 마침 당시 한국 대중매체를 휩쓸던 쿡방·먹방 열풍과 시너지를 내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 무렵부터일까, 서울 사는 사람이 오로지 짬뽕을 먹기 위해 군산 여행을 계획하고, 사누끼 우동을 먹기 위해 오사카행 비행기를 예약하는 것이 더이상 ‘미친 짓’으로만 치부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았다. ‘맛기행’은 미쉐린 3스타의 기준을 궁극적인 실천 강령으로 삼은 보편적인 여행의 한 양식이라는 것이 인정받은 것이다.
T맵 미식로드: ‘빅데이터’ 기반의 맛집 가이드 탄생
한편, 2020년 7월, SK텔레콤의 무료 내비게이션 T맵은 ‘T맵 미식로드’라는 맛집 소개 서비스를 론칭했다.
‘T맵 미식로드’는 미쉐린 가이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맛집을 평가한다. 소수 평가 전문가들의 주관적인 판단을 철저히 배제하고, 일반 고객들이 최종적으로 방문한 장소 데이터만을 계량하여 순위를 매기는 방식이다.
연간 1800만 명의 T맵 내비게이션 사용자들이 5년간 검색하고, 방문했던 약 18억 개의 데이터가 그 근거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수치의 빅데이터다. 어쩌면 이는 미쉐린 가이드의 역대 모든 평가 전문가들이 전 세계 식당을 방문한 횟수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일 수 있다.
미쉐린 가이드는 한 세기 넘게 쌓아 올린 신뢰도를 유지하기 위해 까다로운 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이제는 전 세계 미식 문화의 바이블로 여겨지게 됐고, 요식업계 및 관광업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풍선처럼 부풀려진 신화도, 숨겨진 비화도, 불명예스러운 의혹도 많다. 특히, 미쉐린 가이드 평가원들의 주관적인 입맛에 의존하는 평가 방식을 믿을 수 없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
2020 미쉐린 가이드 서울 판이 공개되던 무렵에도 미쉐린 별이 거액이 오가는 로비와 친분에 좌지우지되더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쉐린은 당연히 강하게 부정하고 있고.
빅데이터는 100% 공정한가?
또, 이러한 불공정에 관한 의혹과 논란은 지금은 종영한 tvN ‘수요미식회’를 비롯해 SBS TV ‘생활의 달인’ 같은 맛집 소개 프로그램들과 관련해서도 쉬지 않고 제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맛집 선정의 절대 객관적인 기준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요구도 커졌다. 내비게이션 사용자의 이동 데이터만을 이용해 맛집 선정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T맵 미식로드’가 미식 애호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빅데이터는 무한한 부가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 보고다. T맵의 맛집 선정 이전부터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OTT 플랫폼의 영화 평점 시스템에 빅데이터가 활용되고 있다. 쿠팡 로켓배송이나 마켓컬리의 새벽배송 시스템이 빅데이터를 근거로 인기 판매 품목과 판매 수량을 미리 예측하는 정확도에 기대고 있다는 점도 유통계 전반의 지각변동을 이끌고 있다.
따라서 T맵 미식로드가 빅데이터를 근간으로 맛집 선정 방식의 공정성 논란을 잠재우고, 신뢰도와 함께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된다면, 요식업 시장 및 관광 시장 권력의 축이 미쉐린에서 T맵과 같은 ICT 업체로 옮겨가는 것도 기대해볼 수 있다.
어차피 맛은 각자 알아서 느끼는 것
한편, 객관적 데이터의 힘에 밀려 ‘비평’ 문화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든다. 음식 비평은 정말로 비평가의 ‘주관’에 의해 생산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요즘은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인터넷상에서 집단 린치를 당하는 일도 많다. 이래저래 비평가들이 위축되고 있는 시대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평은 창작의 원천이기도 하다. 만약 미식 문화에서 비평이 사라진다면, 주성치의 걸작 코미디 영화 ‘식신’에서 시장 건달패 두목이 신상 완자를 한 입 먹고 꿈속의 낙원으로 빠져드는 장면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비유와 상징이 빠진 쿡방과 먹방이 대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칼로리가 맛의 척도라는 농담이 있긴 하지만, 맛은 객관적 계량이 불가능한 주관의 영역이다. 보편성은 주장할 수 있어도, 누구에게나 100% 맛있는 절대적 맛집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떡볶이와 치킨을 싫어하는 한국인은 없을 거라는 주장은 객관적 데이터로 결코 입증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야권 대선후보로까지 농담처럼 거론됐던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운영하는 식당 중 과연 몇 개나 'T맵 미식로드' 순위권에 있을까?
그만큼 미식의 세계는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영역이고, 따라서 주관적 평가 시스템이나 비평가의 역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존재할 가치가 있다.
사실, T맵 미식로드나 미쉐린 가이드가 맛집을 평가하고, 소개하는 기준의 차이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불공정 행위가 발생하고, 그에 따라 부당 이익을 취하는 이들과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 큰 문제다.
다만 그 정도로 선을 넘지 않고 공정성을 기한다는 전제 하에, 맛집 선정 기준과 무관하게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간다’는 미식 문화를 유지, 계승, 발전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요식업의 세계, 타이어 시장, 쿡방과 먹방의 세계, ‘식신’ 같은 음식 관련 창작물의 세계 등등 수많은 관련 분야를 아우른 인류의 ‘먹거리 문화’에 지속적으로 활기를 더해 줄 자양분이 된다면, 맛집 가이드의 존재 의의는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