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에 고가 상품이 더 잘 팔린다”는 속설이 있다. 단지 속설만은 아니다. 예컨대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전체적으로 소비시장이 침체된 가운데 명품 시장은 오히려 활성화를 띠고 있다. 롯데쇼핑이 발표한 올해 2분기 실적에 따르면 다중이용시설 기피 및 긴급재원지원금 사용처 제한 등으로 할인점과 컬처웍스 매출 부진은 심화됐지만, 백화점은 해외 명품이 소비 회복 흐름을 타고 매출 6665억 원, 영업이익 439억 원의 실적을 기록해 지난 1분기(매출 6063억, 영업이익 285억) 대비 소폭 개선된 양상을 보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급 자동차가 더욱 주목받고, 쓸 때는 팍팍 쓰자는 ‘플렉스(flex, 자신의 부와 능력을 과시하거나 라이프 스타일을 자랑한다는 의미)’ 소비 트렌드가 번지며, 이를 주요 콘셉트로 한 상품도 속속 출시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속 빛을 발하는 플렉스 트렌드를 살펴본다.
백화점 다른 층은 한산…명품 매장 앞은 북적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시행 첫날인 8월 30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일부 층은 한산했으나 2층 명품관 입구는 줄을 서는 풍경이 이어졌다. 특히 샤넬 매장과 관련해서는 “매장 방문 고객은 10시부터 2층 불가리 매장 앞 대기 순서대로 대기 등록을 도와드리겠다”는 안내 고지가 붙었을 정도였다. 평일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다소 한산한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층 명품관은 다른 층에 비해서는 활발한 모양새였다.
경기 침체기 속 플렉스 열풍이 명품 시장을 중심으로 불고 있다. 길었던 장마와 장기화되는 코로나19 영향으로 7월 백화점 전체 매출은 줄었지만, 해외 명품 매출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통상자원부가 8월 30일 발표한 ‘7월 주요 유통업체 매출 동향’에 따르면 7월 롯데, 현대, 신세계 등 3개 백화점 전체 매출은 전년 동월대비 2.1% 감소한 가운데, 해외 명품 매출은 32.5% 급증했다. 이는 최근 1년간 가장 높은 매출 증가율이기도 하다. 8월 27일까지 해외 명품 매출 성장률은 롯데백화점이 38%, 현대백화점은 17.8% 신세계백화점은 35%로 각각 집계됐다.
코로나19 피해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20%대 증가율을 유지하던 해외 명품 매출은 코로나19 여파로 올해 2월 4.2%로 떨어지고, 3월엔 -19.4%로 큰 폭의 감소세로 돌아서기도 했다. 하지만 한 달 만인 4월 8.2% 증가로 전환했고, 이후 5월 19.1%, 6월 22.1% 등으로 점차 증가 폭이 커졌다.
이에 유통업계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개선책으로 명품 시장 마케팅에 활발히 나서고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행사 및 매장 재단장이 눈에 띈다. 롯데백화점은 6월 말부터 시작한 면세 명품 대전 효과를 톡톡히 봤다. 첫 행사에서 점 평균 10억 원의 해외 명품 물량을 판매했고, 점포별로 입고 된 상품의 85%가 소진됐다.
100억 원 물량으로 전국 주요 8개 곳에서 행사가 열렸지만, 행사 이후 추가 진행에 대한 고객들의 문의가 계속됐고, 롯데백화점은 7월 2차 행사를 기획, 추가로 7개점을 선정해 또 면세 명품 대전을 진행했다. 2차 행사를 위해 롯데백화점은 추가로 50억 원의 면세점 상품을 직매입했으며, 총 상품 물량은 70억 원에 달했다. 행사가 진행된 6월 26일~7월 10일 시기 명품 상품군 매출은 전년 동기간 대비 50% 이상 신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면세 명품 대전의 성과에 힘입어 7월 총 100여 개 브랜드가 참여하는 해외 명품 대전도 연이어 열렸다. 면세 명품 대전에서 보기 힘들었던 명품 의류, 프리미엄 패딩을 비롯해 명품 주얼리까지 품목을 늘렸다. 롯데백화점 측은 “코로나 불황에도 해외 명품 상품군은 계속해서 신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대백화점은 8월 21~30일 무역센터점에서 열린 ‘럭셔리 워치·주얼리 페어’를 통해 국내에서 단 한 점만이 판매되는 6억 원 대의 한정판 시계 ‘마스터 그랑 트래디션 자이로투르비옹 3 주빌리’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8월 28일 현대시티아울렛 가든파이브점 몰관 1층에 오프 프라이스 스토어 ‘오프웍스’ 2호점을 오픈하며 명품 모시기에 나섰다. 매장은 발렌티노·생로랑 등 명품 브랜드를 직매입해 판매하는 ‘프리미엄 럭셔리관’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또 현대백화점은 압구정 본점 남성복이 있던 4층에 구찌 멘즈, 발렌시아가 멘즈 등 명품 매장을 입점시키고, 영국 산업 디자이너 톰딕슨이 운영하는 카페 ‘톰딕슨, 카페 더 마티니’ 1호점을 8월 여는 등 백화점을 젊은 명품 브랜드로 새단장했다. 현대백화점 측은 “‘톰딕슨, 카페 더 마티니’가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에 국내 1호 매장을 열기로 한 것은 명품 백화점으로서의 압구정 본점 위상과 무관치 않다”며 “새로운 트렌드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고객층을 보유한 점도 입점에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코로나 블루와 공포를 극복하려는 플렉스 트렌드
코로나19 불황기 속 명품의 강세를 업계 측은 코로나 블루(코로나19로 인한 우울감과 무기력증)를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집콕이 일상화되고 쇼핑도 마음껏 할 수 없는 일상이 지속되면서 소비자들의 소비 욕구가 오랜 시간 억눌렸다”며 “이에 대한 보상소비(보복소비) 및 휴가철 해외여행을 못 가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경향이 명품 구매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공포 심리가 소비로 움직였다는 분석도 있다. 인류 문명을 움직여 온 죽음의 사회심리학을 다룬 저서 ‘슬픈 불멸주의자’는 “인간 행동의 근원적인 동기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데 있다”며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종 문화 활동에 전념하고 자존감에 목숨을 걸며, 이를 위해 때로는 명품 소비에 열을 내는 등 자기 신념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 모습이 발견돼 왔다”고 짚었다.
실제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2001년 9.11테러 당시에도 전체적으로 소비 경제가 침체된 가운데 스포츠카, 보석 등 고가 상품의 매출은 오히려 반등했던 바 있다.
특히 올해엔 코로나19라는 특이 상황을 맞으면서 발생한 코로나 블루 및 공포 심리가, 소비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려는 플렉스 트렌드와 맞물려 더욱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게 업계의 목소리다. 본래는 힙합 문화에서 ‘부나 귀중품을 과시하는 현상’을 뜻한 이 단어는, 이제 스스로를 위한 선물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용어로도 확대돼 사용되고 있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한 올해 초 이베이코리아가 진행한 ‘2020년 소비심리 및 소비계획’ 설문 조사 결과, 식품과 생필품엔 가성비를 따지는 대신, 명품 등 고가 제품에는 오히려 과감하게 지갑을 열겠다는 소비자의 양극화된 ‘자린고비 플렉스’ 현상이 확산될 것으로 전망했다. 즉 아낄 땐 아끼더라고 쓸 때는 더 과감하게 팍팍 쓰겠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인기에 명품 브랜드들은 가격 인상까지 했다. 디올은 7월 2일부터 레이디디올백 등 주요 상품 가격을 10~12% 인상했고, 루이비통은 5월 핸드백 등 일부 제품의 가격을 5~6% 인상했으며, 이밖에 구찌, 프라다, 티파니앤코 등이 줄줄이 가격을 인상했다. 이에 유통업계도 명품 시장과의 손잡기에 더욱 바쁜 모양새다. 업계 관계자는 “명품에 대한 수요는 꾸준하다”며 “과거 신종플루, 메르스 때도 처음엔 명품 시장이 위축되는 듯 했으나, 결국엔 회복세를 보이고 오히려 수요가 급증하는 현상이 있어 왔다. 명품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잘 팔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