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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69) 사인암 ①] 사인암 수직절벽에 서린 大학자 우탁의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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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91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01.15 09:30:01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그림 따라가는 단양팔경, 이번 차는 사인암(舍人岩)이다. 명승 47호로 지정된 멋진 풍광을 지닌 곳이다. 그런데 글자를 보아 바위임은 알겠는데 사인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단양군 홈페이지를 찾아간다. 사인(舍人)을 알기에는 부족하여 다시 문화원 자료실로 들어간다.

사인암: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대강면 사인암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맑은 운계천을 따라 명명된 운선구곡(雲仙九曲) 중 제7곡에 해당되는 사인암은 우리 고장 출신인 고려말 대학자 역동 우탁(易東 禹卓) 선생이 사인(舍人) 벼슬로 재직할 당시 이곳에서 청유하였다 하여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로 재임한 임재광 선생이 명명하였다.

수직으로 치솟은 석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절로 자아내고 있으며 조선 시대 화원인 단원 김홍도를 비롯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남기거나 석벽에 각자(刻字)하기도 하였다.

 

사인암 전경.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아, 그러니까 고려말 대학자 역동 우탁 선생이 이 바위에서 청유(淸遊: 신선처럼 맑게 놂)하였기에 사인암이라 했구나. 사인(舍人)이라는 직책이 우리에게는 낯선 직책인데 자료를 찾아보면 시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우탁 선생 시절(1263~1343)에는 4품(四品)의 품계에 관청 사무와 상부의 명령을 시행 부처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직책으로 보인다.

 

사인암 일대의 옛 지도. 

그런데 우리에게 낯익지 않은 이 양반이 호(號)도 거창한 역동(易東: 동쪽, 즉 우리나라 易..周易)을 대표하는 듯한 호(號)에다가, 이런 명승에 이름을 얹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고려사를 찾아보니 열전에 이름이 올라 있는 만만치 않은 분이다.

 

고려사 열전의 우탁 부분. 

우탁열전(禹倬列傳)에,

우탁(禹倬)은 단산(丹山: 지금의 단양) 사람으로 부친 우천규(禹天珪)는 향공진사(鄕貢進士)를 지냈다. 우탁은 과거에 급제2해 처음에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선임되었다. 그 고을에 팔령(八鈴)이라고 하는 요망한 귀신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백성들은 그것이 영험하다고 떠들며 독실히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우탁이 부임하자 바로 그것을 부숴 바다에 던져버리니 부정한 제사가 근절되었다. 여러 번 승진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다.

당시 충선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와 사통하자(蒸) 우탁이 흰 옷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멘 채 대궐로 나아가 거리낌 없이 간언하는 소를 올렸다(지부상소: 持斧上疏라 함). 근신(近臣)이 상소문을 감히 읽지 못하니, 우탁이 매서운 소리로,

“경은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 주상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이렇게까지 그른 일을 맞게 했으니 자신의 죄를 아는가?”라고 꾸짖었다. 이에 주변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었고 왕도 부끄러운 기색을 나타내었다.

뒤에 예안현(禮安縣: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으로 은퇴하자 충숙왕이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재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우탁은 경서와 사서에 정통하였고 더욱이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 점을 치면 틀림이 없었다. 정호(程顥)·정이(程頤)의 학문이 처음 들어 왔으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자 우탁이 문을 닫아걸고 한 달 남짓 깊이 연구해 이내 해득한 후 학생들을 가르치니 비로소 이학(理學:성리학)이 행해졌다. 성균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충혜왕 3년(1342)에 죽으니 나이 81세였다.(기존 역문을 모본으로 함)

 

사인암 야경.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정몽주 이전에 성리학 깨우쳐

이 분을 배향한 예안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는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모시고 있다. 두세 대 뒤 등장한 포은 정몽주를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종조(宗祖)로 모시지만 그보다 앞서 성리학과 역(易)에 정통한 이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분 관향이 단산(丹山: 단양)이었고 사인암에 청유하였다니 성리학을 하늘로 모시던 조선 시대 성종조 때 단양군수 임재광(林齋光)이 이 바위를 사인암이라 명명한 것도 납득이 된다.

이런 기본지식을 가지고 사인암으로 간다. 차로 가는 방법이 편리하지만 배낭 하나 메고 바람처럼 다니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대중교통도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다. 김삿갓은 아니더라도 인터넷 망이 발달한 요즈음에는 잠자리와 먹거리 걱정도 없고 시간을 다투는 이들은 안 되지만, 한 템포 쉼표만 찍으면 마음도 바쁠 일이 없다. 특히 단양은 합리적인 휴양림들이 있어 잠자리가 편하다. 시외버스터미날(043-421-8801)에서 사인암 방면(방곡행 버스) 버스를 이용해서 올 수 있는 곳이다. 사인암에 이르면 남조천(운계천) 건너로 수직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색이 붉지 않아 적벽이라 부르지는 않지만 많이 보아온 어느 적벽의 위용보다도 뛰어나다. 예부터 단양을 다녀간 시인묵객들은 글 한 편 남겼고 화인(畵人)들은 그림 한 점 남겼다.

겸재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인암을 그렸다. 그런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겸재의 사인암은 두 점이 있다. 한 점은 남조천에서 비스듬히 상류 방향을 바라보며 사인암을 그렸다. 사인암을 바라보며 개울 건너편에는 한 아낙이 사인암 쪽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빨래를 하는가 보다. 칼 선 듯 결기가 느껴지는 수직 절벽과 바위에서 꿋꿋이 자라는, 아마도 솔인 듯한 나무들, 그 앞을 유장히 흐르고 있는 물은 군더더기가 없다.

 

겸재 ‘사인암’(1) 그림의 거북선 머리 모양. 
사인암의 거북선 머리 모양 바위. 

그런데 이 그림에서 필자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요즈음 자료를 보면 수직 절벽 제일 높은 곳은 70m가 된다고 한다. 그 좌측 절벽 위에는 마치 거북선의 머리처럼 생긴 ㄱ 자(字) 바위를 강조하여 그려 넣었다. 그 시대 다른 화인들의 그림은 물론 우리 시대 사진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아마도 겸재의 밑그림 사생첩을 본다면 남들과 차별화되는 특징을 잡아 디테일하게 그렸을 것 같다.

언젠가 언급한 바 있는데 인왕제색도나 인왕유거에 보면 기차바위로 넘어가는 백련봉 입구에 해골 모양 바위를 슬쩍 그려 넣었다. 디테일의 극치다. 사인암 위에 저렇게 강조해서 그려 넣은 거북선 머리 모양 바위는 또 한 번 겸재 사생의 디테일을 엿보게 한다. 그 사생 위에 겸재는 죽이고 살리고 버리고 취하고를 택하여 자신의 의도를 살렸을 것 같다.

사인암을 그린 여러 손길들

겸재의 또 하나 사인암(舍人岩) 그림은 필자에게는 미스터리다. 흔히 제목이 사인암이니까 의심 없이 이곳 사인암에 끼어 넘어간다. 그런데 사인암 주변을 살펴도 이런 정경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수직 절벽과는 달리 둥그스름한 암봉이 늘어서고 그 사이로는 폭포수가 흘러내린다. 우측 암봉 중턱에는 잔도(棧道)처럼 보이는 아슬아슬한 길이 절벽을 감아 돌아간다. 암봉에는 푸른 솔이 운치 넘치게 자리를 잡았다. 과연 이 그림이 대강면 사인암리 어느 곳을 그린 것이 맞는 것일까? 이곳 말고도 사인암은 우리 땅 여러 곳에 있다. 함경도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불리는 삼수의 사인암, 황해도 황주의 작은 경승 사인암, 강진에도 사인암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심지어는 요즈음 등산인들이 말하는 의왕 모락산에도 임영대군 이야기가 깃든 사인암이 있다. 이런 곳 어디를 그린 것일까? 짚어 보아도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실경이 아니라 사의산수(思意山水)에 사인암이라고 제호(題號)한 것은 아닐까?

 

단원 작 사인암. 

사인암을 그린 또 다른 화인은 단원(檀園)이다. 리움 소장 보물 782호 병진년화첩(丙辰年 畵帖, 1796년) 속 그림이다. 단양 옆 고을 연풍(괴산군 연풍) 현감을 지낸 김홍도가 그린 군더더기 없이 멋진 그림이다. 이 그림을 단번에 완성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가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단원이 연풍현감을 지낸 시기가 1791년 12월~1795년 1월이니 재임 기간인 을묘화첩(1795)에 들어가지 않고 그다음 해 병진화첩에 들어간 것을 보면 그만큼 심혈을 기울인 작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방운이 그린 사인암. 

또 한 사람 사인암 그림을 남긴 이는 이방운(李昉運: 1761~1815?)이다. 그는 한천한 양반집 출신으로 직업 화가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림으로는 일가를 이루었으니 요즈음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예술가였던 셈이다. 사인암은 국민대가 소장한 사군강산삼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첩 속 그림이다.

 

사인암 단풍 자료사진. 사진 = 단양군

이 그림을 뜯어보면 사인암이 자리한 위치와 그림은 맞지 않는다. 사인암은 덕절산(780m) 한 자락이 동으로 흘러내려 남조천(운계천) 자락과 만나는 곳에 깎은 듯 선 수직 절벽으로 산에 가까이 붙은 수직 기둥인데, 산에서 거리를 둔 별개의 수직 기둥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산과 사인암 사이에 집들이 있고 심지어 마을도 보인다. 실제 이 마을은 그림의 뒤쪽 개울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사인암과 산은 이어져 있는 산의 일부이다. 일찍이 피카소처럼 공간이동하여 그린 것인지 후에 기억으로 그리다 보니 산과 물과 집과 원경(遠景)이 제 마음대로 자리했는지 알 수가 없구나.

등장인물들도 재미가 있다. 바위 앞 두 양반은 동자 하나 거느리고 저 멀리를 가리키며 대담 중이고, 옥로(玉鷺) 갓으로 보이는 갓을 쓰고 남녀(藍輿)에 앉아 아랫것들 뒤세우고 오는 지체 높은 나리님 뒤로는 나귀 탄 선비 하나가 노복(奴僕)과 함께 오고 있다. 겸재의 그림에서 보듯 이곳은 빨래하는 아낙네부터 그렇고 그런 양반님네, 지체 높은 나으리님까지 모두 가는 곳이었으리라. 우리 시대에 모두가 즐기러 가는 것과 다름없이.
 

사인암 옆에 자리 잡은 청련암.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청련암 통해 내려가야 각자 볼 수 있어

이제 남조천에 새로 이어놓은 줄다리를 건너 사인암 방향으로 간다. 사인암 옆으로는 조그만 암자가 있는데 청련암(靑蓮庵)이다. 고려 공민왕 때인 1373년 나옹화상이 원통암과 함께 창건하였다 한다. 황정산 대흥사 말사로 본래 황정산 기슭에 있었다는데 한국전쟁 후인 1954년 공비 잔당들이 황정산에 준동하니 황정리 일대가 소개(마을을 비움)되었다 한다. 이때 암자의 기둥과 들보를 뜯어 이곳 사인암 옆으로 이전했다 한다. 법당 안에는 목조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충북유형문화재 309호). 관세음보살과 짝을 이루는 대세지보살이라 한다.

 

스님과 흰둥이.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청련암에는 넉넉하신 스님 한 분과 흰둥이 상좌가 살고 계신다. 사인암 물가로 내려가 절벽에 새긴 많은 각자(刻字)를 보려면 청련암을 통과하여 닫힌 문을 열고 내려가야 한다. 문제는 사인암 절벽에서 낙석(落石)이 생겨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2019년 두 번을 찾아갔는데 출타 중인 스님을 기다려 무엇 하는 사람인지, 왜 내려가려는지 설명 드리고 스님 안내를 받아 물가로 내려갔다. 흰둥이 상좌도 착하게 따라 다니며 꼬리를 친다. 미물(微物)도 기르는 이 스타일을 닮아 가는가 보다.

 

바위에 새겨진 바둑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장기판도 새겨져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명승지 바위가 그렇듯이 물가 절벽에는 많은 각자(刻字)가 생생하다. 나름대로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이다. 편편한 너럭바위에는 바둑판도 새겨져 있고 장기판도 새겨져 있다. 바둑판은 19줄이다. 잘 아는 분들 말로는 새긴 지 250여 년쯤 될 것이라 한다. 그 당시 화점(花點)이 없었는지 아니면 안 그렸는지 화점을 찾기가 어렵다. 바둑을 두는 방식은 요즈음의 룰이 아니고 우리 고유의 순장(順丈) 바둑을 두었다 한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박물관이나 유물관에서 옛 바둑 자료도 만나는데 분황사 주변에서 나온 전돌 바둑판은 15줄이라 하고, 신안 유물선에서 나온 나무 바둑판 조각에도 15줄을 가늠할 수 있다 한다.

17줄 바둑판도 있었다 하는데 유물을 본 적은 없고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백제 의자왕의 선물은 그 재현품을 보아도 최고의 바둑판이다. 줄도 19줄이니 백제는 일찍이 바둑의 나라였을 것이다.

‘난가상’이라 새겨진 글자. 자료사진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는 경지의 ‘난가상’

각설하고, 너럭바위에 새긴 바둑판 곁에는 난가상(爛柯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난가상(爛柯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옛이야기에 난가지락(爛柯之樂)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양(梁)나라 임방(任昉)이라는 이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오는 술이기(述異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중국) 신안군 석실로, 진(晉)나라 때 나무꾼 왕질(王質)이라는 이가 들어가니 두 동자가 바둑을 두면서 무엇을 하나 주는데 대추 씨 같았다. 먹은즉 배고픈 줄도 모르고 도끼를 놓고 구경하였다. 동자가 말하기를,

“그대 도끼자루가 문드러졌구려.”

왕질이 마을로 돌아왔는데 같이 살던 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信安郡石室中
晉時樵者王質
二童子棊 與質一物
如棗核 食之不飢
置斧子坐而觀
童子曰:
‘汝斧柯爛矣’
質歸鄕閭, 無復時人.

우리 속담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한다. 나무꾼 왕질은 석실에 가서 동자처럼 보이는 신선들 바둑 구경하다가 도낏자루 썩는 줄 몰랐던 것이다. 문득 정신 차려 돌아와 보니 본인 시대 사람들은 다 저세상에 가고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지가 난가지락(爛柯之樂)이다. 이 너럭바위에 바둑판을 새긴 이는 이 너럭바위를 난가의 평상(爛柯牀)이라 새겨 놓았다. 사인암과 운계천은 옛사람들에게 선계(仙界)였다. 옆에는 장기판도 그려져 있다. 또 다른 신선들의 놀이터인 셈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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