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2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1.01.29 13:57:34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전명은의 사진은 조용히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적인 동시에 동적이다. 한순간의 포착 같지만 가늠하기 어려운 긴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편안한 긴장감이라는 매력적인 모순의 상황을 경험하게 하는 사진이다. 더 갤러리 이번 회는 작가 전명은과의 대화를 싣는다.
-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하겠다.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사진 작업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어렸을 때부터 소설과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영화 제작과 관련된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영화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런데 나는 성격상 혼자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진은 침착하게 나 혼자 빠져들 수 있으면서도 영화처럼 실재하는 것을 촬영하는 작업이어서 재미있었다. 나는 대학생 때에도 추상적인 무언가를 조형적으로 응축해서 표현하는 것보다 모델을 재현하거나 현실을 기록하는 작업에 더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인지 사진이 쉽고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프랑스에서 사진으로 대학원 과정을 밟으면서 사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사진 찍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사진을 잘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 몇 년 안 된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 같다.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게 된 이유는 부모님이 모두 조각가셨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매체 제한 없이 다양한 것을 시도해봤고, 어떤 매체를 다루는 것 못지않게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가가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 상황에 따라 사진의 프레임이 한계로 느껴질 수도 있고, 반대로 가능성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궁금하다.
프레임의 한계, 그것이 내가 느끼는 사진의 매력 중 하나이다. 어찌 보면 사진은 한계가 많은 매체이다. 소리도, 냄새도, 물질적인 무언가도 없다. 만져지는 것도 없다.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 보이는 것 역시 선택적이다. 그런 한계가 나에게는 가능성으로 느껴졌다. 프레임의 바깥을 무한히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나에게 참 매력적이었다. 어떤 한계도 없는 상황에서는 나의 이야기를 깊이 파고들 수 없을 것 같다.
- 전명은의 작업을 설명할 때 ‘사진을 통해 이야기를 전한다’는 표현을 한다. 사진뿐 아니라 많은 시각 예술의 영역이 이야기를 전하는 매체가 될 수 있는데 특히 사진을 선택했다.
나의 인터뷰에서 나온 설명인 것 같다. 내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이야기(내러티브)는 줄거리가 아니라 상상력을 뜻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소설가를 좋아할 때는 그들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쳤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들이 건설해놓은 단단한 상상력의 세계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그들의 작품을 좋아한다. 나는 소설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상상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나에게 사진은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가장 적절한 매체이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생각하며 의도적으로 사진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사진을 찍다가 내가 그런 점 때문에 사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2011년부터 약 3년간 ‘우리들의 눈’이라는 시각장애예술협회를 통해 맹학교에 나가 시각장애 학생들을 만나기도 하고 시각장애인들과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 프레임이 상징하는 한정된 매체의 가능성과 상상력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 관련해 ‘어떤 사람의 사진’(2015), ‘금곡의 기억’(2016)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어떤 사람의 사진’은 청주맹학교의 쌍둥이 자매와 한 작업이다. 현실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이동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활동의 반경이 좁고 경험도 한정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상상력의 세계를 건설하는 소설가들이 글로 한 사람씩 소개하고 그 글을 읽은 쌍둥이 자매가 글에 담긴 사람을 상상하면서 그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내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고민해 온 본다는 것, 그리고 이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담고 있는 작업이다.
한편 ‘금곡의 기억’은 금곡에 있는 시각장애인센터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남양주시지회’의 어르신들과 함께 했던 프로젝트이다. 대부분 중도 실명하신 분들이었는데, 시각장애인센터는 시력을 잃고 나면 배워야 하는 것들이 많아 함께 모여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서로를 위로해주는 공간이었다. 11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한 분씩 만나 예전에 봤던 것들에 대한 기억을 듣고 텍스트로 정리한 뒤 점자책으로 만들었다. 이분들은 마치 꿈을 그리듯이 상상하며 이미지를 설명해주셨다. 이미지는 결국 머릿속에 있는 거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인식한다는 것은 눈이 아닌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작용이다. 그분들이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상상한 이미지를 나누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며 내가 상상하는 시간 모두가 이후의 작업에 영향을 주었다. 나에게 큰 의미를 갖는 작업이다.
- 전명은의 사진은 보이는 것 혹은 이미지 밖의 영역까지 담아내는 것 같다. 이는 본다는 것에 관한 근본적인 탐구일 뿐 아니라 시각 예술이라는 미술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간의 내면, 정신의 영역을 포착하려는 시도 같기도 하다. 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듣고 싶다.
그렇게 봐주면 나는 감사하다. 나의 사진이 다룬 인물들은 모두 지금 여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창밖을 바라보며 저기 멀리에 있는 세계를 꿈꾸는 것과 같다. 그들은 그렇게 꿈꾸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 자신들이 꿈꾸는 세계에 도달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저편의 세계에 도달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삶의 태도라 생각한다. 실현의 유무보다 계속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 의미 있다. 꿈꾸는 사람들을 사진에 담고, 나는 그 사람들을 통해 꿈을 꾼다. 그게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이다.
- 이미지만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무언가, 예를 들어 인물의 감정이나 심리, 그 인물이 존재하는 시공간의 분위기 등이 전달되는 것 같다.
나는 인물, 사물, 풍경, 무엇을 찍든 항상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사진에 담겨서인 것 같다. 나에게 내 사진의 주인공들은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 나의 마음이 작업에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 다양한 감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매우 간결하게 은유적으로,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명은의 사진을 보며 시적이란 인상을 받았다.
나는 스스로 부끄럽다고 느낄 정도로 감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이 많은 것을 작품에 모두 드러내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그것을 다 표현하면 너무 장황해질 것 같다. 그래서 최대한 걸러낸다. 정제된 것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정수를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 작품을 전시장에 설치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모든 작가가 그렇겠지만 나에게 공간은 정말 중요하고, 많은 영감을 주는 부분이다. 전시 공간과 관련된 나의 기준은 전시 공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나는 전시 공간의 어떤 부분(조건)을 고치려 하지 않고 공간이 주는 영감을 작업이나 전시 설치에 녹여내는 편이다. 공간의 채광을 그대로 활용하거나 습도에 따라서 프린트가 구부러지거나 펴지는 변화를 실험해본 적도 있다. 나는 공간의 조건이 내 작업에 영향을 주고, 그 공간에 반응하며 작품이 변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다. 특히 개인전은 나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절의 영향도 담기는 편이다. 그동안 내가 개인전을 가졌던 공간 중 화이트 큐브는 거의 없었다. 작년에 개인전 ‘글라이더’(2020)가 열렸던 갤러리2가 잘 짜인 아름다운 화이트 큐브였는데 빈 공간이 갖고 있는 가능성이 너무 커서 전시를 준비하며 힘들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다. 당시 하얀 공간을 나의 흑백 사진이 가로지르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구상하고 설치했다.
- ‘누워있는 조각가의 시간’(2016-2017)은 조각가가 남긴 작품을 촬영했다. 어떤 조각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 남긴 작품인지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이전의 작업은 ‘이런 것을 찍어봐야겠다, 이런 이야기를 담아야겠다’처럼 주제를 크게 잡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누워있는 조각가의 시간’은 정말 사진이 찍고 싶어서 시작한,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 자체에 집중한 작업이다. 그저 내가 찍고 싶은 피사체를 찍었다. 내가 느끼기엔 처음으로 순수하게 사진 작가의 태도로 작업한 것 같다. 집에 아버지가 만드신 석고 모형이 굉장히 많고, 나는 어려서부터 그것들을 매일 봐왔다. 나에겐 그것이 가장 익숙한 오브제이고, 아버지의 작업이 보여주는 조형성이 가장 익숙하다. 2016년부터 시작해 2017년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했고, 이 사진들로 아마도예술공간에서 개인전 ‘안내인’(2017)을 진행했다. 아버지의 작품이 정말 많아 아직 다 못 찍었다. 끝난 작업은 아니고 진행 중이다. 앞으로는 아버지의 작품뿐 아니라 아버지의 물건들도 찍고 싶다.
- 전명은의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 관객에게 감상과 관련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기보다 그냥 보이는 대로 봐주면 된다. 내가 항상 프레임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관객들도 내 사진 앞에서 사진의 밖을 상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관객과의 소통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