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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76) 임진적벽 ②] 겸재가 임진적벽 그린 뜻은? 소동파에게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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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99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05.13 14:20:30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임진적벽을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고랑포, 한 고을이 단 한 채의 집도 없이 사라진 아픔을 뒤로 하고 호로고루성(瓠蘆古壘城)으로 향한다. 돌아볼수록 밟히는 고랑포에는 잊힌 피난민들의 애환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기억 밖의 노래 ‘고랑포 아낙네’라는 애절한 노래가 남아 전한다. 한국전쟁이 휴전에 접어들던 1953년 노래로, ‘찔레꽃’의 백난아 님이 부른 노래인데 유튜브나 포털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다. 노랫말도 곡조도, 부르는 가수의 목소리도 애절하다.

눈오는 고랑포 산마루에서
저 하늘 남쪽 길로 먼저 가거라
가슴을 떠다 밀고 소리를 칠 적에
당신도 오시겠오 울던 벌판아

찢어진 옷소매 눈을 털면서
숨이 찬 발걸음을 다시 멈추고
임자를 기다리는 오리길 십리길
총소리 날 적마다 길이 안 뵀소

피난민 보따리 실은 마차에
바퀴를 끌어잡고 목이 메어서
보채는 우리 아기 아버지 오거든
한 해를 가십니다 울던 그 밤아

남편은 남기고 아기만 데리고 먼저 피난길에 오른 아낙의 가슴 졸임이 절절히 전해진다. 애기 아빠는 무사히 내려왔을까?

 

호로고루성.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호로고루성은 고랑포 인접거리에 있다. 대중교통은 적성에서 09-2, 09-3을 이용할 수 있고, 전곡에서 80-3(주말 따복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시간 맞추기가 어려우니 승용차나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는 파주, 연천의 임진강 유역은 수도권 최고의 관광 보고인데 교통편이 불편하여 아쉽게도 다니는 이들만 다니고 있다. 아차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불암산, 수락산, 도락산, 의정부, 포천, 동두천, 연천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물줄기는 한 반도 남쪽에 남아 있는 고구려 관방유적(關防遺蹟)의 보고로, 고구려의 고토 만주 벌판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고구려의 흔적이다. 필자는 안시성(安市城)을 비롯한 요동반도의 고구려 성 몇몇을 찾아가 본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만나는 고구려보다 출토품이나 유구(遺構)로 보아도 한반도 남쪽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흔적이 훨씬 생생하다.

 

지도에 표시한 오늘의 답사길. 

아차산 보루들과 임진강변 고구려 성, 즉 은대리성(隱垈里城), 당포성(堂浦城), 호로고루성(瓠蘆古壘城)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고구려로 다가오는 유적들인데 그중에서도 호로고루는 규모나 출토품의 내용으로 보아 이 지역 사령부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이 정립했던 초-중기에는 백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보니 남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는데, 신라 진흥왕 이후 신라와 국경을 맞대다 보니 이들 보루와 성(城)들은 주로 신라와 국경을 맞댔던 고구려의 관방 유적이다.

동북공정과 육자회담의 참담함

서기 668년에 멸망한 멀고도 먼 고구려가 우리 시대에 왜 중요한 것일까? 중국인들은 동북삼성(東北三省: 길림. 요녕, 흑룡강)이라 하면서 사용하기를 꺼리는 만주 지방(滿洲地方)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자리 잡았던 우리의 고토(古土)다. 중국인들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 하여 만주 지역은 자신들의 지방 정부가 자리했던 땅이니 마땅히 자기들의 고토(古土)일 뿐 아니라 줄곧 자신들의 땅임을 확인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심지어 시진핑(習近平)은 외교무대에서 2017년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었다라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야기했다지 않은가?

일찍이 1950년대에 중국은 서남공정을 전개하여 달라이라마의 티벳(Tibet)을 합병하였다. 왜 저들은 고구려는 자기들의 지방 정부라고 1500년 전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먹이는 것일까? 한반도에 무슨 변동이라도 생기면 저들은 어떻게 나올까? 상상하기도 싫지만 저들은 끼어들 것이다. 우리의 역사 교육은 조선사(朝鮮史)와 신라사(新羅史) 중심으로 너무 흐르고 있다. 이제는 만주에 터전을 두었던 조상들의 역사도 균형 있게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고조선이, 부여가, 고구려가, 발해가 활동한 ‘만주는 우리 땅’이었음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심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육자회담(六者會談)이라는 말을 들으면 참담한 생각이 든다. 육자회담의 논의 대상은 무엇인가? 한반도 즉 남북의 문제이다. 남북의 문제라면 남북이 다루면 되는데 어이하여 미-중-러-일이 오히려 주인공이 되어 회담을 진행하는지? 어느 집에서 부부사이 일을 논의 하는데 이웃집들이 대신, 또는 함께 회의를 한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당장 방법은 없을지라도 우리 후배들에게 우리나라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갖게 했으면 좋겠다. 비록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더라도 큰 나라 옆에 있는 작은 나라는 언제나 고달프다.

우리가 주변국(미-중-러-일)과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려면 국력은 물론 그에 걸맞는 규모도 있어야 한다. 우선 한반도는 통일해야 하고 이어서 만주 고토회복(古土回復)을 이루어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일된 형태의 규모가 된다면 주변국에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더 바람직하기는 이어서 몽골, 중앙아시아, 헝가리, 핀란드까지 이어지는 알타이(Altai) 문화권 외교 벨트가 굳건해지면 특히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심리적 왜소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호로고루에서 바라본 임진강 호로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호로고루성 무너진 성벽을 보면서 만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발굴을 완료한 결과 남한 지역에 가장 큰 부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비정될 만큼 많은 유구와 출토품들이 발굴되었다. 홍보관도 건립하였고 광개토대왕비도 규모 있게 모형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이곳에서는 통일바라기 축제도 열린다. 성터에서 내려다 보는 임진강은 한없이 아름답게 흐른다. 삼국시대부터 이 강을 호로하(瓠蘆河)라 불렀고 그 여울을 호로탄(瓠蘆灘)이라 불렀다.
 

재현해 놓은 광개토대왕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중심 나루였던 임진나루에 지금은 들고양이만…

고랑포는 수심이 깊어 배를 띄웠지만 이곳 여울은 수심이 얕아 갈수기에는 걸어서 건너다닐 수 있었다. 마침 봄볕 속에서 어떤 이가 여울 속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강 건너 적성에는 이곳과 세(勢)를 마주하는 칠중성, 이진맥성이 있었다. 고기를 낚는 이는 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와 고구려가 668년 멸망할 때까지 120여 년을 치열하게 부딪쳤던 역사를 알고 있을까?

겸재의 임진적벽(臨津赤壁)을 찾아다닌 길인 동이리 주상절리, 두지리 황포돗대 지역을 거쳐 이번에는 하류 임진나루를 찾아가 보자. 고려 숙종이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에 별궁을 지으면서 고랑포 나루에 이어 왕래가 많아졌다고 하는데, 한양을 수도로 삼은 조선에 와서는 의주대로를 잇는 나루가 되면서 임진강 중심 나루로 자리 잡은 곳이다.

 

임진나루의 정겹던 시절. 자료사진

그러나 800여 년간 임진강 중심 나루로 자리했던 임진나루도 남북분단 이후 그대로 적막 속으로 빠져들어 한 사람의 선객도 찾지 않은 지 70년이 지났다. 그곳에는 적벽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규모의 주상절리가 있는데, 평소에는 군부대 지역이라 철문이 가로막아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찾아간 임진나루에는 적막만 흐른다. 그나마 자리하던 주변 몇몇 음식점도 코로나로 폐업을 했는지 들고양이들만 스산하다.

 

겸재 작 임진적벽도. 

이곳 임진나루를 과연 겸재가 임진적벽도에 담은 것일까? 겸재의 임진적벽도를 보면 그림 우측 하단에 나루가 있다. 나루에는 가파른 길 아래로 세 사람이 보이는데 뒤쪽 사람은 나귀(말)를 끌고 있다. 그 뒤로는 갓 쓴 양반이 나귀를 타고 내려온다. 우측 산등성이에는 버들이 우거져 길 위로 자랐고 뒤쪽으로는 축대 위에 한 집, 저 뒤 산 아래로 몇몇 집이 자리 잡고 있다. 분명 초가였을 집들을 왜 저리 각(角)지게 중국인 집들처럼 그렸는지 모르겠다. 1950년대까지 남아 있던 이 지역 집들은 둥근 지붕 초가들인데….

겸재 임진적벽도 무대는 임진나루 주상절리인 듯

좌측(동쪽, 강 상류 쪽)으로는 주상절리(적벽)가 우뚝한데 그 위로 길게 이어지는 길에는 어느 양반네가 탄 나귀를 어린 동자(童子) 애가 끌고 가고 있다. 강에는 선객을 태운 나룻배를 사공이 상앗대로 밀면서 강을 건너고 있고, 강 건너 동파(東坡)에는 선객 두 사람이 배를 부르고 있다.

 

김양기 그림 속의 진서문.
임진나루 진서문 터의 현재 모습.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참고로 단원의 아들 천리(千里) 김양기(金良驥)가 그린 그림 한 점을 보자. 산 사이에 나루가 있고 나루 안쪽으로는 성벽 위에 루(樓)가 우뚝하다. 강가 좌우 산은 강을 면(面)하고 선 바위들이 우뚝한데 색깔로 보아 적벽이라 불러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강에는 역시나 나룻배가 승객과 말(나귀)을 실어 나르는데 상앗대로 밀어 강을 건넌다. 그림 우측 상단에는 臨津(임진)이라 쓰고 그림제목은 鎭西門(진서문)이라 했으며 낙관(落款)에는 아마도 千里之寫(천리지사: 천리가 그림)라 했으니 천리 김양기의 그림이라 한다.

 

진서문이 그려진 임진진 지도. 
옛 지도의 임진나루. 

또 하나 옛 지도를 보자. 파주의 지방 지도인데 임진진(臨津鎭)이라 쓰고 성문 위 루(樓)는 김양기의 그림과 거의 동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른 지도를 하나 더 보면 임진나루 옆 바위 절벽을 臨津赤壁(임진적벽)으로 부르고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우리가 지금 ‘임진강 주상절리’라고 부르는 말을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부르면 ‘임진강 적벽’인데, 조선 시대 임진적벽은 임진나루 옆 주상절리를 부르는 통칭이었던 것 같다. 이는 다른 문집들에서도 확인되니 겸재의 임진적벽도는 임진나루 주상절리를 그린 것이리라.
 

임진적벽이 표시된 지도.

임진진 설치 전에 그려진 겸재의 ‘임진적벽’

그렇다면 겸재는 왜 임진진의 성벽과 문루(門樓)를 그리지 않은 것일까?

임진나루에 본격적인 방어 시설이 설치된 것은 영조 때이다. 1755년 임진나루에 ‘임진진’이라는 군진을 설치하였다. 그 주둔지로 나루 안쪽 협곡을 가로지르는 성벽을 쌓았다. 그 성벽 출입문을 세웠는데 이를 진서문(鎭西門)이라 하고 성문 위에는 누각을 세워 임벽루(臨壁樓)라 불렀다.

 

임진진 터의 발굴 모습. 자료사진

왕조실록 영조 30년 갑술(1754년) 11월 18일 기록에 따르면

총융사 홍봉한(洪鳳漢)이 명을 받고 가서 임진(臨津)의 형편을 살폈는데, 이때에 이르러 돌아와 아뢰기를,

“임진부터 위로 3, 40리는 다 4, 5장(丈)의 적벽(赤壁)이고, 아래도 또한 사방이 막혀서 염려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마는, 내소정(來蘇亭) 근처에 얕은 여울이 있어 옛 장릉(長陵)으로 통하는 길에 막힌 데가 없으므로 이곳이 허술합니다. 내소정의 얕은 여울부터 장산(長山)까지 모두 7리가 되는 곳에 토성(土城)을 쌓아 막고, 인하여 방수 별장(防戍別將)을 두거나 파주(坡州)의 읍치(邑治)를 옮겨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임진 좌우의 석벽(石壁) 사이에 홍예 석문(虹霓石門)을 설치하는 것도 국위(國威)를 견고하게 하는 방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임진나루 사진 좌우의 적벽. 자료사진

하니, 임금이 금위 대장 구선행(具善行)에게 명하여 다시 가서 살피게 하였다.

(摠戎使洪鳳漢, 承命往審臨津形便, 至是還奏曰: “臨津以上三四十里, 皆四五丈赤壁, 以下亦四塞, 無可慮, 而來蘇亭近處有淺灘, 通舊長陵路無所遮隔, 此爲踈虞。 若自來蘇亭淺灘, 至長山合七里之地, 築土城以塞之, 仍置防戌別將, 或移設坡州邑治爲宜. 臨津左右石壁之間, 設虹霓石門, 亦可爲壯國威之道.” 上命禁將具善行, 更爲往審)

이렇게 하여 그다음 해인 영조 31년 1755년에 임진진이 설치되고 진서문(鎭西門)과 임벽루(臨壁樓)가 설치된 것이다. 그때는 겸재 나이 80이었는데 겸재의 임진적벽은 임진진 설치 이전에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겸재는 이 그림을 언제 그린 것일까? 신묘년 풍악도첩을 그릴 때처럼 30대 젊은 날에 그린 것일까?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림을 모르는 필자의 눈에는 임진적벽도는 갑갑한 느낌을 준다. 임진강은 오늘날도 언제나 눈과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강이다. 나루로 다가오는 길은 평탄한 평지 길인데 임진적벽도에는 가파른 내리막길처럼 보인다. 의도가 있는지, 감상하는 자의 미숙인지 곰곰 살펴도 모르겠다.
 

임진마을을 알리는 표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임진나루가 가장 뜨거웠던 400년 전 그날

임진나루는 산 사이 열린 통로와 같은 길이라서 삼국시대 이전부터도 열려 있는 길이었을 것인데, 이 길이 가장 뜨거웠던 날은 1592년 4월 30일 밤이었다. 이때가 선조 25년이었는데 이날의 선조실록을 읽어 보자.

새벽에 상(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 관찰사 권징(權徵)은 쪼그리고 앉아 바라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曉, 上已出御仁政殿, 百官人馬闐咽於殿庭. 是日, 大雨終日, 上及東宮御馬, 中殿御屋轎, 淑儀以下到洪濟院, 雨甚, 舍轎乘馬, 宮人皆痛哭步從. 宗親, 文武扈從者, 數不滿百. 晝點于碧蹄館, 僅備御廚, 東宮則闕膳. 兵曹判書金應南, 親自奔走於泥濘中, 猶不能制, 京畿觀察使權徵, 抱膝瞪目, 罔知所措.)
 

임진나루 건너로 바라보이는 동파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상이 시신(侍臣)들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燈燭)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강 건너 東坡)까지 닿았다. 상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人家)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 이는 적병이 그것을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村家)에 흩어져 잤는데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반이 넘었다.

(夕次臨津登舟, 上對侍臣, 俯伏痛哭良久, 左右皆流涕, 不能仰視. 天陰夜黑, 無一條燈燭. 夜深得達東坡. 上命沈舟斷渡, 撤近水邊人家. 蓋慮賊兵取以爲筏也. 百官飢疲, 散宿於村家, 阻水不得渡者, 亦過半矣.)

이날의 또 다른 기록이 수정실록에 실려 있다.

행차가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러 상이 홀로 이산해, 이항복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넜다. 날은 어두워지고 비는 쏟아져 앞뒤로 길을 분간할 수 없었는데, 임진강 남쪽 언덕의 승정(丞亭)에 재목(材木)을 쌓아 두었으므로 그것을 태우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불빛이 원근(遠近)을 환하게 비춰 마침내 길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밤이 깊어서야 동파역(東坡驛)에 도착하였다. 파주 목사(坡州牧使)와 장단 부사(長湍府使)가 어주(御厨)를 미리 설치하여 수라를 준비하여 올리려고 할 때에 호위(扈衛)하던 하인들이 난입하여 음식을 빼앗아 먹었으므로 상이 들 것이 없게 되자, 장단 부사가 두려워하여 도망하였다. 국조(國朝)가 태평을 누린 이래로 내병(內兵: 내란)을 없애기를 힘써 숙위(宿衛)하는 장수와 군졸에 있어서까지 기율로 단속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위태로운 시기에 임하여 흩어지는 것이 적을 본 군사들보다 심했다. 이는 은덕과 형벌이 고루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行至臨津, 上獨與李山海, 李恒福同舟以濟. 日昏雨注, 前後迷路, 臨津南岸有丞亭, 積材木, 命焚之. 火光通燭遠近, 遂尋路而行, 夜深次東坡驛. 坡州牧使, 長湍府使預設御廚, 將進供, 扈衛下人亂入搶食, 上供遂闕, 長湍府使懼而逃. 國朝治平以來, 務銷內兵, 至於宿衛將卒, 亦無紀律鈐轄, 故臨危渙散, 甚於見敵之兵, 玆非德刑俱否故耶?)

긴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지경을 당하고 돌아온 선조의 그 뒤 행위를 보면서 통치자를 잘못 만난 조선을 애도한다.
 

율곡 가문의 화석정은 임진강 최고의 지점에 자리 잡았다고 할 만하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임진강 최대 섬 초평도를 바라보는 장산전망대

이제 발걸음을 옆 언덕에 자리 잡은 화석정(花石亭)으로 옮긴다. 임진강 최고의 정자 자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500년 넘은 괴목들이 자리잡은 곳인데 율곡 선생의 5대조가 정자를 지었다 한다. 율곡 선생이 8살에 지었다는 시비(詩碑)도 설치해 놓았고, 선조의 몽진을 미리 예견한 선생이 평소 정자에 기름을 발라 두었는데 이곳에 불을 질러 선조의 도강 길을 밝혔다는 일화도 적어 놓았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율곡을 사랑하는 후세 사람들이 만든 일화일 것이다. 떨어진 거리로 보나 위치로 보나 사실은 아닐 것이고 선조 수정실록이나 징비록의 기록처럼 나루터 승정(丞亭: 나루 관리하던 곳)에 쌓아 놓은 재목을 태워 빗길을 밝혔다. 이런 임진나루에 한국전쟁 때에는 미군들이 부교를 놓고 한국전쟁을 치뤘다. 이때까지도 임진강 제일의 도강 길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진서문을 지나가는 미군. 자료사진

이제 임진강 최대의 섬 초평도를 바라볼 수 있는 장산전망대로 자리를 옮긴다.

임진나루 근처 언덕에는 정자도 많았다. 내소정(來蘇亭), 화석정(花石亭), 수월정(水月亭), 조금 떨어진 곳의 반구정(伴鷗亭)…. 그러다 보니 자연히 시문(詩文)도 꽃을 피웠다. 그중에 임진팔경은 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파주시 임진나룻길 걷기 코스 지도에 화석정, 임진나루, 장산전망대가 표시돼 있다. 

조선 숙종 때 문신인 호곡 남용익(壺谷 南龍翼)의 내소정어(來蘇亭於: 내소정에서)에서 비롯했는데 1. 화석정의 봄(花石亭春) 2. 장암의 낚시(長岩垂釣) 3. 송암의 맑은 구름(松巖淡雲) 4. 장포의 가랑비(長浦細雨) 5. 동파역의 달(東坡驛月) 6. 적벽의 신선 같은 뱃놀이(赤壁仙遊) 7. 동원의 눈(桐園雪) 8. 진사의 새벽 종(津寺曉鍾)이다.

 

율곡 가문의 화석정은 임진강 최고의 지점에 자리 잡았다고 할 만하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제6경 적벽(赤壁)에서 신선 같은 뱃놀이 한 번 읽고 가자.

적벽 돌머리에서 다시 배 띄웠네 赤壁磯頭更泛舟
소동파 떠난 후도 풍류는 남아 있지 蘇仙去後尙風流
지는 달에 물결 희어 더욱 좋은 밤 波殘月白皆良夜
*황강(黃岡)도 필요 없다 임술년 가을 不必黃岡壬戌秋

이쯤 되면 겸재가 왜 임진적벽을 그렸는지 짐작이 간다. 언젠가도 이야기했듯이 산수화를 그리는 목적은 직접 산수를 찾아가지 못하고 집에서 그림으로 즐기는 애호가, 즉 와유(臥遊)를 즐기는 고객을 위한 차원이었음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소동파와 적벽부, 그리고 임진적벽이 그들에게는 신선과 시부(詩賦), 그림, 뱃놀이가 있는 매력적인 화제(畵題)였을 것이다.

*황강(黃岡): 중국 호북성 황강현의 소동파가 배 타고 적벽부를 지은 곳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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