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구⁄ 2023.08.04 15:55:13
‘그날’ 이후 이태원 거리는 좀처럼 밝아지지 않는다. 북적북적 시끄러움도 잦아들었다. 오가는 여러 국적의 얼굴도 무표정이 많아졌다. ‘그날’의 현장 바로 건너편에는 벨기에 레스토랑 ‘프리츠 아르투아’가 있다. 이태원의 ‘핫플’ 가운데 한 곳이다. ‘그날’ 전에는 대기명단에 고객 이름과 전화번호가 가득 찼다. 특히나 벨기에 출신인 오비맥주 배하준(벤 베르하르트) 대표는 이곳에서 ‘고향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자주 찾는다. 지금, 인기는 여전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오비맥주는 지난 4월 이태원상인연합회와 함께 ‘비어 마스터 클래스’를 열겠다고 알렸다. 고객의 성원에 보답하고 맥주의 다양한 정보를 알리려는 기획이라고 소개했지만, 그 이면에는 팬데믹과 이태원 참사로 인해 몹시도 침체한 이태원 상권을 이렇게 해서라도 살려보겠다는 취지였다.
이 프로그램은 다행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태원상인연합회와 주류도매사 영업사원에 이어 MZ세대 소비자를 대상으로 총 5회 열었는데, 강의 내용에 만족한 참가자들이 많았다.
귀에 쏙쏙,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준 맥주 상식
7월 25일 오후 6시 ‘프리츠 아르투아’에서 열린 ‘비어 마스터 클래스’에 참석했다. 이날 클래스 대상은 매체별 기자 16명. 강의는 오비맥주 커머셜역량부문 맥주문화교육팀 이예승(Jason) 부장이 맡았다. 진행 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이었다. 이후에는 테이블별로 대화를 이어갔다.
클래스는 맥주와 관련한 정보를 알려준 다음, 테이블 앞에 놓인 8가지 맥주와 그에 맞는 요리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예승 부장은 “맥주, 하면 무슨 생각이 나느냐”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시원함” “탄산” “여름”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라면서, 그는 ‘쉼’ ‘즐거움’ ‘특별함’으로 정의 내릴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2021년 주류 트렌드 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인의 월평균 음주 빈도는 8.5일이었고, 여러 주종 중 맥주를(42.2%) 가장 많이 마셨다. 이 데이터를 보여주며 “이왕이면 알고 마시는 맥주가 더 맛있다”고 강조했다.
잠시 후 이예승 부장의 “맥주를 구성하는 네 가지(재료)가 무엇인지 아는 분”이라는 질문에 호기롭게 손을 들고 답했다. “물, 홉(hop), 효모…” 갑자기 한 가지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맞은 편 자리의 누군가 낸 “맥아”라는 작은 소리를 훔쳐, 마저 답했다. 덕분에 선물로 ‘호가든’ 전용 잔을 받았다.
홉을 설명할 때는 모두의 귀가 쫑긋했다. 이예승 부장은 “맥아즙을 살균하는 과정에서 이 홉을 첨가해 맥주에 쓴맛을 더한다”라고 설명했다. 흔히 맥주를 마실 때 느끼는 쌉싸래한 맛이 바로 이 홉 때문이라는 얘기다. 호프집, 특히 수제맥주 전문점을 가면 칠판처럼 생긴 메뉴판을 쉽게 본다. 대개 여기에는 맥주의 종류와 가격, 알코올도수, 그리고 ‘IBU’를 써넣는다. IBU는 ‘International Bitterness Unit’의 줄임말로, 쓴맛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14IBU’, ‘47IBU’, 이런 식이다. IBU 앞 숫자는 쓴맛의 정도다. 높을수록 쓴맛이 강하다는 뜻이다.
이어 맥주의 종류 두 가지를 설명했다. 라거(lager)와 에일(ale)이다. 우린 흔히 라거에 익숙하다. 에일은 요 몇 년 새 수제맥주가 인기를 얻으며 한껏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때 이예승 부장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맥주는 발효 방법에 따라 어떻게 나눠질까요.” 이번엔 좀 더 자신 있게 답했다. “상면발효와 하면발효!” 정답. 또 하나의 잔을 받았다. 잠깐 덧붙이자면, 상면발효(上面醱酵)는 발효 도중 맥주의 표면에 뜨는 효모로 발효시키는 방식이고, 하면발효(下面醱酵)는 발효 도중이나 끝났을 때 가라앉는 효모로 발효시키는 방식이다. 상면발효의 대표는 에일, 하면발효는 라거가 대표적이다.
이날 클래스의 핵심 강의, 푸드 페어링(Food Pairing) 시간이다. 각자의 앞에 놓인 맥주는 모두 여덟 가지. ‘레페 브룬(Leffe Brune)’ ‘트리펠 카르멜리엇(Tripel Karmeliet)’ ‘밀구름(Wheat Ale)’ ‘호가든(Hoegaarden)’ ‘구스아일랜드(Goose Island) 312’ ‘구스아일랜드(Goose Island) IPA’ ‘스텔라 아르투아(Stella Artois)’ ‘한맥(Hanmac)’이 차례로 윗줄 네 개, 아랫줄 네 개씩 놓였다.
이예승 부장은 푸드 페어링의 세 가지 방법을 설명했다. 먼저 ‘강대강’. 강한 향·맛의 음식은 강한 향의 맥주와 잘 어울린다. 그다음은 ‘반대’. 음식의 맛을 잘 잡아주는 맥주와 어울려야 한다. 마지막은 ‘상호보완’. 음식의 맛을 고조시킬 수 있는 맥주와의 매칭이다.
쉽게 접하기 힘든 수도원 맥주, 그만큼 만족도는 최상
앞서 밝힌 대로 맥주는 총 여덟 가지. 이들과 잘 어울리는 요리는 어떤 것들일까. 오비맥주 측은 이날, 레페 브룬은 쿠키, 트리펠 카르멜리엇은 ‘Scampi a l’ail(스캄피알라이)’, 밀구름과 호가든은 ‘Kimch Cheese(김치 치즈 프리츠)’, 구스아일랜드 312는 ‘Crispy Fish Strips(크리스피 피시 스트립스)’, 구스아일랜드 IPA는 ‘Basil Parmigiano(바질 파르미지아노)’, 스텔라 아르투아와 한맥은 Chicken Strips(치킨 스트립스)를 아주 잘 어울리는 요리로 준비했다.
페어링을 본격 시작하기 전, 이예승 부장은 자신이 직접 구웠다며 초코칩 쿠키를 각 테이블에 올렸다. 이름은 ‘르뱅 쿠키’라고 했다. 이와 잘 어울리는 맥주가 ‘레페 브룬’이다. 케이크와 초콜릿 같은 달콤한 음식과 잘 맞는다. ‘레페’가 나오니 1152년 설립된 레페 수도원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1240년부터 수도원 근처의 재료로 에일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다. 이후 1789년 시작된 ‘프랑스혁명’으로 벨기에가 점령당하면서 혁명군에 의해 수도원이 파괴됐다. 그 과정에서 맥주 양조 레시피마저 사라져버렸다. 마침내 1952년 수도원장과 상업 양조장 오너인 알버트 루트보엣(Albert Lootvoet)이 레페 수도원 맥주를 다시 양조하기로 협약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날 클래스 가운데 참석자들의 압도적 관심을 받은 맥주는 수도원 맥주였다. 말만으로도 신비로운 느낌의 이 맥주는 오래전 수도원에서 금식 기간에 수도사의 건강이 상하는 걸 막고자 만들기 시작했다고 이예승 부장이 설명해줬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쪽에선 사순절(四旬節)이라는 용어가 익숙하다. 부활절을 앞두고 40일간 몸과 마음을 정결하고 경건하게 하며 지내는 절기다. 이 기간 수도원에선 영양 섭취를 위한 맥주(매일 4~5ℓ)나 외부 손님 접대용 맥주의 양조는 가능했다. 더불어 당시 상수도 시스템이 열악해 위생을 고려한 음용 용도의 양조도 허락됐다.
수도원 맥주의 관리는 수도사 또는 수녀가 맡는다. 이 수도원 맥주도 두 가지로 나뉜다. 이예승 부장이 이번엔 콕 집어 “혹시,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아쉽게도 답을 하지 못했다.
트라피스트 에일(Trappist Ale)과 에비 에일(Abbey Ale)로 나눈다. 전자는 1098년 프랑스 시토(Cîteaux)에서 출범한 가톨릭 수도회인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만든 맥주다. 라벨에는 ‘ATP’(Authentic Trappist Product)라는 육각 로고 인증이 붙어있다. 에비 에일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제외한 수도원이나, 수도원과의 계약으로 상업용 양조시설에서 생산한 상업맥주다.
그다음은 밀맥주 차례다. 양조에 사용하는 곡물 중 50% 정도를 밀 맥아나 생밀을 섞어 상면발효 방식으로 만든다. 나라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독일은 1516년 빌헬름(Wilhelm) 4세가 ‘맥주순수령(麥酒純粹令·Reinheitsgebot)’을 공표한다. “맥주를 제조할 땐 맥아, 홉, 물 이외에 어떤 재료도 사용해선 안 된다”는 법령이다. 허나, 그런 와중에도 밀을 사용해 맥주를 만드는 건 예외로 했다. 독일식 밀맥주는 ‘헤페바이젠(Hefeweizen)’ 또는 ‘바이스비어(Weiβbier)’로 부른다. ‘헤페’는 효모, ‘바이젠’은 밀이라는 뜻이다. ‘바이스’는 흰색, ‘비어’는 맥주라는 의미다. 이날 소개됐던 것 중 밀구름이 독일식 밀맥주다.
벨기에 밀맥주는 ‘위트 비어(Wit Bier)’로 부른다. 밀 외에도 고수 씨앗이나 오렌지껍질을 첨가해 화사하고 복합적인 향을 내는 게 특징이다. 우리가 잘 아는 호가든이 여기에 속한다. 미국식 밀맥주도 ‘위트 비어(Wheat Beer)’다. 1978년 자가양조(自家釀造)가 허용되면서 실험적인 맥주 양조가 본격화됐고, 이후 꾸준히 다양화를 시도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구스아일랜드 312가 좋은 예다.
보통 밀맥주는 달콤한 향이 강조되기 때문에 매콤한 음식과 매칭돼 매운맛을 중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선지 ‘김치 치즈 프리츠’가 꽤 잘 어울렸다. 구스아일랜드 312의 경우 상큼하고 청량한 느낌이어서 기름진 음식이나 해산물과도 잘 어울린다. 역시 ‘크리스피 피시 스트립스’와의 매칭이 나쁘지 않았다.
구스아일랜드 IPA는 유럽 홉으로 만드는 영국식 IPA다. 일반적인 영국 IPA에서 느껴지는 꽃, 스파이시, 흙 같은 캐릭터가 은은한 쓴맛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바질 오일의 마요 소스와 진한 풍미의 파마산치즈가 듬뿍 얹어진 ‘바질 파르미지아노’는 말 그대로 최상의 조합이었다.
마지막으로 라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맥주다. 역사가 오래됐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먼 옛날에 시작됐다. 약 1300년 전 독일 바바리안(Bavarian)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면발효 효모를 사용해 저온(8~12℃)에서 일정 기간(25~30일) 발효시켜 만든다. 스텔라 아르투아 역시 역사가 깊다. 1366년 벨기에 루벤(Leuven)에 덴 호른(Den Hoorn) 양조장이 설립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1717년 세바스찬 아르투아가 인수했다. 유럽 홉 특유의 부드러운 아로마와 청량감으로 기름진 음식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아메리칸 라거(American Lager)도 있다. 우리 입맛에 딱 맞는 맥주다. 증명도 됐다. 올해 4월 리얼미터가 국산 맥주 브랜드 선호도를 조사했을 때 아메리칸 라거가 65.1%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이 맥주는 18세기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갔을 당시 시작됐다. 맥아와 함께 쌀이나 옥수수를 첨가한다. 그런 이유로 부드럽고 깔끔해 부담 없이 가볍게 마실 수 있다. 아메리칸 라이트 라거로 카스와 한맥을 들 수 있다. ‘짝궁’으로 ‘치킨 스트립스’가 테이블에 올라왔는데, 무척 익숙한 맥주여선지 새우과자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클래스 막바지에 이예승 부장은 이런 말을 했다. “한국 맥주를 얘기할 때 싱겁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이건 좀 억울하다”는 것이다. 흔히 ‘한국 맥주=맛없다’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오르는 제품 중 하나가 호가든이다. 이 맥주는 벨기에산이지만 한국에서 제조한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오가든’이다. ‘오비맥주가 만드는 호가든’이라는 뜻이다.
“이 얘기가 나오면 할 말이 무척 많아요. 왜냐면 벨기에 호가든이 그렇게 만만한 회사는 아니거든요. 호가든은 우리나라만 그렇게 만드는 게 아녜요. 전 세계 곳곳에서 생산해요. 그래서 1년에 한 번씩 전 세계 호가든을 모아 평가해요. 당연하잖아요. 그러면 그 많은 호가든 가운데 항상 1위를 차지하는 게 벨기에 양조장의 호가든과 한국의 호가든이에요. 원산지에서도 인정하는 맥주란 말이죠.”
한국 소비자의 호가든 선호도는 꽤 높은 편이다.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조금은 박한 평가가 따르는 건 아닐까 생각해봤다. “마구 친해지고 싶은 친구에게 조금은 못살게 굴고 싶은 심리 같은 걸지도 몰라.” 이런 생각도 떠올려봤다.
예정대로 클래스는 한 시간 반쯤 진행됐다. 이후에는 테이블별로 서로를 소개하고 맥주를 얘기했다. 모두 듣는 쪽에 가까운 직업이지만 이날 만큼은 청자(聽者)보다 화자(話者)에 더 집중했다. 그러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갈 생각이 없는 듯도 보였다. 마침내, 먼저 일어나보겠다고 말하곤 그곳을 나왔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10시 반에 가까웠다. 참 많이도 얘기하고 들었다. ‘비어 마스터 클래스’는 그런 자리다. 듣고 배우고 얘기하는.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