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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복서 출신 작가 오스틴 리, 전시라는 새 링 위에 서다

롯데뮤지엄서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 ‘패싱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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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58호 김금영⁄ 2023.10.12 09:57:00

오스틴 리가 '파운틴' 작품 옆에 설치된 의자에서 전시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본 적 없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마치 처음 듣는 노래와 비슷하다. 나는 항상 그 낯설면서도 신나는 느낌을 찾고 있다.”

본래 아마추어 복서였던 오스틴 리. 고등학교 재학 시절 체육관에서 일을 하며 아마추어 경기에도 참여했던 그는 링에 올라갈 때마다 가슴이 뛰며 여러 생각과 감정이 오갔다고 한다. 분명 두렵기도 했겠지만, 설레는 감정도 있었을 터. 그리고 이 들뜬 감정들은 그림을 그릴 때도 이어졌다. 오스틴 리는 이제 복서가 아닌 작가로서 ‘전시’라는 새로운 그만의 링 위에 올라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회화와 디지털 기술 넘나드는 작업들

전시장의 한 공간엔 컴퓨터를 하고 있는 한 캐릭터의 조각상과 그 컴퓨터 화면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애니메이션 영상이 함께 설치됐다. 사진=김금영 기자

롯데뮤지엄이 오스틴 리의 국내 첫 개인전 ‘패싱 타임(Passing Time)’을 12월 31일까지 연다. 그는 복서 출신이라는 독특한 경력 그리고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가 “아티스트가 되기 전 권투선수였던 것처럼 어떤 신비로움을 갖고 있다”고 평하며 관심을 보인 작가로 알려지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이 느껴온,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 여행을 기획했다. 특히 회화와 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시각예술의 장르를 개척해 온 그가 디지털과 아날로그도 자유롭게 패싱(넘나드는)하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작품들의 색은 대체로 주황, 노랑, 파랑 등 화려한데, 컴퓨터나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 주로 볼 수 있는 RGB 컬러를 활용한 것이다. 사진=김금영 기자

예컨대 전시장의 한 공간엔 컴퓨터를 하고 있는 한 캐릭터의 조각상과 그 컴퓨터 화면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애니메이션 영상이 함께 설치됐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한 드로잉, 3D 프린트로 완성된 조각 작품으로, 가상 현실이나 증강 현실 등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작가의 경험이 반영됐다.

인터넷이 발명된 때와 같은 해인 1983년에 태어나 디지털의 발전을 몸소 보고 자란 작가는 이미지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데 익숙하고, 아이패드를 통해서도 일상을 드로잉으로 포착하며 이를 다양한 방법으로 구현한다. 그래서 작품들을 보다 보면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작품들의 색은 대체로 주황, 노랑, 파랑 등 화려한데, 컴퓨터나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 주로 볼 수 있는 RGB 컬러를 활용한 것이다.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색감은 관람객의 도파민을 자극해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작업한 '파운틴'은 '정반사' 시리즈를 조각으로 한 단계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디지털 작업은 무한한 실험을 가능케 하는, 내 예술의 핵심이다. 디지털상 1000개의 그림 돌아봤을 때 약 2개 정도라도 유의미하게 다가올 수 있고, 거기서 또 새로운 것을 창조, 탐구할 수도 있다”며 “항상 한계를 두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실험을 거듭하며 새로운 의미를 찾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작업한 ‘파운틴(Fountain, 분수)’이 설치된 공간은 이번 전시의 백미이자, 작가가 지향하는 아이디어의 생성, 파생 과정을 잘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고개가 돌아간 듯한 샛노란 얼굴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한 조형물이 입에서 물을 분수처럼 내뿜고 있다. 붓과 팔레트를 양손에 들고 있는 모습에서 이 인물을 작가라 추측할 수 있다.

오스틴 리는 앙리 마티스가 1910년도에 발표한 대표작 '댄스'를 재해석한 '조이'를 제작했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 파운틴 조형물을 가운데 두고 양쪽엔 눈에서 물을 쏟아내는 인물의 모습을 그림과 영상으로 표현한 ‘정반사’ 시리즈 작품들이 설치됐다. 파운틴은 정반사 시리즈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을 조각으로 한 단계 발전시키며 새로운 맥락을 형성한 결과물이다. 한 공간에 설치된 세 작품은 그림, 조각, 영상으로 표현 매체는 다르지만,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공유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 작품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교차되는 시간을 함축적으로 담아 보여준다.

거장들의 명화를 차용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한 파생 방식도 눈길을 끈다. 대표적인 예로 작가는 앙리 마티스가 1910년도에 발표한 대표작 ‘댄스’를 재해석한 ‘조이’를 제작했는데 이 또한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원작과 달리 핑크와 파랑, 초록의 강렬한 색감들과 함께 간결하게 처리된 춤추는 인물들의 형상을 통해 디지털 매체를 통해 그린 작품의 스케치를 상상해볼 수 있다. 또한 공기압을 붓으로 사용하는 에어브러시 기법을 사용하는 작가의 독특한 회화 기법까지 살펴볼 수 있다.

다채로운 감정과 시간의 흐름 오가는 공간

오스틴 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마음속에 늘 특별하게 자리하는 주제인 복싱도 작품으로 등장한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마음속에 늘 특별하게 자리하는 주제인 복싱도 작품으로 등장한다. ‘크라이 베이비(Cry Baby)’ 작품엔 빨간 복싱 글러브를 낀 채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복서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경기의 승리를 외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패배로 인해 눈물로 가득 채워진 물웅덩이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인간이 한 사건을 통해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들을 조화롭게 다룬다.

격렬하고 역동적인 복싱의 현장을 담은 작품들이 설치된 공간 한켠엔 반대로 양 다리를 쭉 펴고 편안하게 앉아있는 거대한 푸른 조각 ‘블루릴렉스(Bluerelllaaaax)’를 설치해 상반된 감정 상태를 공존하게 하기도 했다. 회화와 조각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매체의 관계성 또한 지속적으로 주목한다.

'미스터 오스틴'은 오스틴 리가 필라델피아에 살던 당시, 동네 한 이웃의 아이가 선물한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감명받아 제작한 작품이다. 사진=김금영 기자

또 작가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은 ‘미스터 오스틴(Mr. Austin)’이다. 마치 어린이가 그린 듯한 낙서를 현실로 소환한 듯 보이는 이 작품은 작가가 필라델피아에 살던 당시, 동네 한 이웃의 아이가 선물한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감명받아 제작한 작품이다. 밝게 미소 짓고 있는 인물의 표정과 알록달록한 색 표현은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작가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디지털 드로잉과 회화,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는 선물 받은 초상화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형태로 재탄생시켰다.

전시장의 대미는 ‘플라워 힐(Flower Hill)’이 장식한다. 파운틴과 더불어 이번 전시를 기념해 작가가 새롭게 제작한 작품으로, 전시장 한 공간을 세 개의 화면이 가득 채웠다. 눈, 코, 입이 있는 꽃들이 수줍게 등장해 익살스럽게 춤을 추는 영상에서 태양이 뜨고 지며 흘러가는 시간을 표현한다. 그 흘러가는 시간 속 춤을 추는 꽃들은 이 시간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대변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색, 그림자 속에서도 꽃들은 찬란히 빛을 발하며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

'플라워 힐'이 설치된 공간에서 오스틴 리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처럼 이번 전시는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다채로운 감정과 시간의 흐름을 지향하는데 전시장 구성 자체도 틀에서 벗어났다. 일반적으로 전시는 입구부터 시작해 끝까지 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순차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기 마련이지만 이번 전시는 그 방식을 탈피했다.

위에서 내려다 봤을 때 전시장 자체를 하나의 큰 시계로 형상화한 뒤 여러 갈래로 쭉 뻗은 복도를 시침과 분침이 움직이듯 혼란을 주는 공간으로 구현했다. 그래서 전시장에서 길을 잃은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낯섦이 불편하기보다는 흥미롭다. 관람객은 시간 순서로 전시를 볼 수도, 방처럼 구성된 전시 공간을 볼 수도 있다. 즉 시간뿐 아니라 공간도 패싱한다.

오스틴 리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전시를 기획한 롯데뮤지엄 구혜진 수석큐레이터는 “작가는 추상적인 디지털 데이터가 사람과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되는 세계관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결합한 예술로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타인의 감정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보여준다”며 “그의 작품은 자신의 내면을 깊게 성찰한 뒤 타인을 이해하고 상실의 경험을 나눠 서로가 연결될 수 있게 유도한다. 관람객은 이번 전시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마음의 이정표를 찾는 시간 여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는 나 스스로를 관객과 공유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며 “관람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반응을 기대하기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서로 나누고 싶다.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도, 안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두 환영”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위에서 내려다 봤을 때 전시장 자체를 하나의 큰 시계로 형상화한 뒤 여러 갈래로 쭉 뻗은 복도를 시침과 분침이 움직이듯 혼란을 주는 공간으로 구현됐다. 사진=김금영 기자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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