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5호 김금영⁄ 2024.12.03 09:34:21
화면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선들이 추운 겨울, 전시장에 따뜻한 봄을 불러온 듯 그 아름다움이 다채롭게 빛난다.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하태임, 강박적 아름다움에 관하여’전 현장을 찾았다.
‘하태임, 강박적 아름다움에 관하여’전 현장
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이한 포스코미술관이 하태임 작가의 특별한 예술 세계를 다룬 전시를 마련했다.
하태임 작가는 파리 국립미술학교 출신으로, 형형색색의 선이 교차하는 특유의 화풍인 ‘컬러밴드(colorband, 색띠)’로 유명하다. 롯데백화점, 벤틀리모터스코리아 등 다양한 기업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한 작가다. 그의 작업은 강렬하고 다채로운 색의 띠를 역동적이고 조화롭게 배치해 보는 이에게 활력과 리듬감을 전하는 점이 특징이다.
포스코미술관 강정하 선임 큐레이터는 “하태임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작가로, 미술관 30주년 초대전 작가로 소개하기에 손색없었다”고 부연했다.
이번 전시에선 작가의 대표작인 다양한 컬러밴드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지 컬러밴드에만 집중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작가의 예술 세계의 형성 과정, 변천사를 모두 조명한다.
전시가 시작되는 첫 지점엔 컬러밴드 이전 1990년대 작가의 초기 작업이 설치됐다. 강정하 큐레이터는 “컬러밴드 작업에 익숙한 일부 관람객은 이 작업들을 보고 놀라움과 동시에 호기심을 표한다. 이번 전시는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기까지, 작가의 작업 변천사를 아우른다”며 “초기 작업들은 작가가 프랑스 유학 시절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맞닥뜨렸던 소통의 어려움, 외로움 등 내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소통을 할 때 쓰이는 문자와 기호를 화면에서 해체했는데, 대신 형태와 색이 강조된 걸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작가 인터뷰에서도 드러난다. 전시장에 발췌된 문구에서 작가는 “문자나 언어는 지식 전달의 가장 큰 도구지만, 진정한 소통의 단계에서 볼 때 아무 의미가 없다. 파리에서 작업할 때 한글이나 알파벳을 화면에 투영시킨 작업을 한 다음 그것들을 지웠던 것 그 때문”이라고 짚었다.
이렇듯 문자를 그리고 지우는 행위를 연속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붓 터치는 점점 정돈됐고, 소통의 전달보다 내면의 풍경에 집중하면서 컬러밴드 작업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공간에서는 작가의 2000년대 중반부터의 작업을 소개한다. 과거 작업에 비해 색의 적층과 소거의 반복적 표현이 더욱 강조되는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점차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리기 시작한 추상 작업들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작가노트를 통해 “내 작업의 주인공은 컬러밴드다. 컬러밴드는 각각의 캔버스 위에서 마치 옥색 대양을 유영하는 돌고래처럼 혹은 넘실대는 파고가 춤을 추는 펼쳐진다”고 작업을 소개했다.
이어 “반곡면의 컬러밴드들은 방향성과 수많은 차이를 수반하고 각각의 색들로 물들여져 삭막한 공간에 파동과 리듬감을 부여한다”며 “컬러밴드와 같은 제한적, 단순 명시적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회화적 역동성과 리듬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컬러밴드가 갖는 만곡 패턴의 비선형적 구성을 통해서다. 컬러밴드란 임의의 크기를 갖는 시각적 매스로 색면을 쪼갬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끄는 공간은 작가의 작업과 향기가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커튼을 열고 들어가면 작가의 ‘통로(Un Passage) No. 17300’(2017)이 설치됐는데, 이 공간은 작품뿐 아니라 향기로도 채워져 있다. 미국의 영향력 있는 향기 디자이너 레이몬드 매츠가 작가의 작업을 보고 영감을 얻어 탄생시킨 향기다. 레이몬드 매츠는 할리우드 여배우 엘리지베스 테일러의 시그니쳐 향수 등을 디자인한 바 있다.
강정하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에선 작가의 작품과 레이몬드 매츠의 향기가 어우러지는 공간이 두 군데 구성돼 있는데, 작가는 각각의 작품에 더불어 ‘확장, 파격, 결실’, ‘자유로움과 확장’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고, 이를 바탕으로 레이몬드가 향을 만들었다”며 “단지 눈으로 작품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오감을 활용해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전시는 작가의 2014년부터 최근의 신작까지 다양하게 아우른다. 근작에서는 굵은 선에서 또 뻗어가는 얇은 선들의 변주, 확장성이 눈길을 끈다.
강정하 큐레이터는 “크기, 공간의 제약으로 선보일 기회가 적었던 작가의 대형 작업을 이번 전시에서 대거 선보인다”며 “강렬한 색채와 리드미컬한 형태로 공간을 압도하는 작가의 작업을 통해 감각적 영역을 너머 숨겨진 정서적 긴장과 수행적 행위로서 작가의 예술세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포스코미술관에서 12월 15일까지 열린다.
포스코미술관 비롯해 스퀘어가든 등 문화 향유의 장 확대
이번 하태임 작가 전시를 비롯해 다양한 전시를 선보여 온 포스코미술관은 포스코홀딩스가 추구하는 배려와 공존, 공생의 가치를 예술을 매개로 나누고 실천하는 포스코그룹의 아트플랫폼이다. 1995년 포스코갤러리로 개관, 1998년 문화체육관광부에 제1종 미술관으로 정식 등록한 이래 포스코그룹의 기업 미술관으로서 꾸준하게 활동을 펼쳐왔다.
포스코미술관은 전시실, 수장고, 자료실을 갖췄고, 매년 연간 4~5회 기획전, 초대전을 열며 다양한 전시활동으로 직원과 시민에게 문화 경험을 선물하고 있다. 실제로 전시장을 찾은 날도 다양한 관람객 층이 방문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강정하 큐레이터는 “미술관이 위치한 특성상 직장인 관람객이 많은데, 이뿐 아니라 주변의 학교에서 학생 관람객도 많이 찾아온다. 전시에 관심 있는 단체를 비롯해 국내를 찾은 외국인 관람객의 방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포스코미술관은 지역 예술가들에게는 전시 공간을 제공하는 장이 되고 있다. 강정하 큐레이터는 “재능 넘치는 신진 작가 발굴부터 한국 미술을 이끌어온 중진 작가의 재발견까지 아티스트들의 창작 활동을 다방면으로 돕고 있다”며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휴지기를 가졌으나, 추후 공모전 등도 다시금 검토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포스코미술관은 미술계 등용문인 ‘포스코미술관 신진작가 공모전’을 진행해온 바 있다.
다루는 예술 분야도 회화, 서예, 조각, 미디어 아트 등 다양하다. 올해엔 하태임 작가 전시 이전 아이들도 즐길 수 있는 ‘파핑(Popping), 살아있는 책들’전을 선보이기도 했다.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팝업북 대표 장인들의 작품 250여 권을 전시했고, 전시 마지막 코너에서는 직접 펼쳐서 만져보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기법의 현대 팝업북 약 100권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미술관뿐 아니라 포스코 서울 본사 포스코센터 건물 곳곳엔 예술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포스코센터 앞에 설치된 거대한 조형물은 프랭크 스텔라의 ‘꽃이 피는 구조물-아마벨’로, 테헤란로를 상징하는 존재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포스코센터 건물 안에선 여러 TV모니터가 불을 밝히고 있는 백남준의 ‘TV깔대기’와 ‘TV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또한 지난해 8월엔 복합문화공간 ‘포스코 스퀘어가든’을 조성하며 문화 향유 공간을 확대했다. 포스코 스퀘어가든은 2개의 산책로와 3개의 가든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구성됐다. 포스코센터 주변에 조성된 문화예술산책로와 공공산책로는 총연장 990m에 달하며 산책로의 좌우에는 다양한 수종을 식재했으며, 산책로 중간에는 총 13개소에 이르는 휴게 공간을 마련했다.
상시 공연 및 시민 쉼터가 가능한 ‘버스킹가든’, 다양한 전시 및 공연이 이뤄지는 ‘썬큰가든’, 자연과 함께하는 야외 미술관 ‘갤러리가든’을 조성했다. 당시 포스코홀딩스 측은 “일반 시민을 비롯해 아마추어 공연가들에게도 포스코 스퀘어가든을 상시 개방한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포스코그룹이 문화 향유 공간을 점차 늘려가는 건 ‘소통’을 위해서다. 강정하 큐레이터는 “기업이 미술관을 비롯해 문화예술 공간을 운영하는 건 생각보다 결코 당연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포스코는 인간 삶에 있어 진정으로 소중하고 의미 있는 건 문화예술의 힘에 있음을 믿으며, 예술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회 간 자유로운 소통을 이어가고자 한다”며 “내년에도 다양한 전시를 선보일 계획이다. 예술을 모든 이들과 나누고 소통하는 ‘나눔의 미술관’으로 포스코미술관이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