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 초기 정책으로 전기차 보조금 지원 축소, 배터리 소재 관세 부과 등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국내 전기차·배터리 업계의 시름이 커지고 있다. 특히 최근 수년간 전기차 트렌드에 발빠르게 부응하며 성장세를 이어온 현대차그룹(현대차·기아·제네시스)이 타격을 받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과연 현대차그룹은 ‘트럼프 2기’ 리스크(Risk)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을까?
지난달 1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정권 인수팀은 무역확장법 232조를 활용해 배터리와 핵심 광물, 충전부품 등 ‘전기차 공급망’에 관세를 부과해 미국 내 생산을 장려하고, 이후 동맹국들과는 개별적인 협상을 통해 관세를 면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또,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에 근거해 집행되어온 최대 7500달러 규모의 전기차 보조금(소비자 세액 공제)을 폐지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IRA 전기차 보조금은 지급 요건이 까다로워 현대차그룹의 전기차는 그간 이 혜택을 받지 못해왔지만, 그간 이를 위해 미국에 공장을 세우는 등 적극적 투자를 진행했기 때문에, 보조금이 폐지되면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 IRA 세액공제가 폐지될 경우 미국 내 연간 전기차 등록 대수가 이전보다 약 31만7000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역시 현대차의 미국 시장 전략에 악영향을 주는 요소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영향력이 트럼프 2기 정부에서 날로 커지고 있는 것도 우려 요소로 꼽힌다.
머스크는 이미 새 정부의 ‘정부효율부(DOGE)’의 수장으로 발탁된 상태다. DOGE는 과도한 규제와 예산 낭비를 줄이고 연방 기관을 재정비하기 위한 부서로, 벌써부터 ‘서머타임 폐지’ ‘공무원 재택근무’ 등 다양한 개혁 조치를 제안하고 있다.
머스크는 자신 외에도 다양한 IT업계 전문가들을 정부 내에 포진시키고 있어서, 향후 그가 추진 중인 ‘자율주행 기술규제 완화’ 등 친 테슬라 정책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에 이어 2위를 유지하고 있는 경쟁사 현대차로서는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美 전문가 배치·HMGMA 가동·기술력 확보
이에 맞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트럼프 2기’ 대응 전략은 크게 3가지로 압축된다. 첫번째는 미국과 트럼프를 잘 아는 전문 인력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미국 현지 생산 전략을 강화하는 것이며, 세번째는 전기차, 로봇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력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먼저, 인사 전략과 관련해 현대차그룹은 지난 11월 15일 사장단 인사를 실시했는데, 호세 무뇨스 현대차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가 현대차 창사 57년 만에 첫 외국인 CEO로 선임됐고, 대외협력·정세분석·PR 등을 관할하는 그룹 싱크탱크 수장에 성 김 현대차 고문역이 사장으로 임명됐다.
무뇨스 신임 현대차 대표는 도요타 유럽법인과 닛산 미국법인 등을 거쳐 2019년 현대차에 합류한 인사로, 글로벌 COO 겸 북미·중남미법인장을 맡은 뒤 북미 지역에서 최대 실적을 잇달아 경신하는 성과를 냈다.
성 김 사장은 동아시아·한반도를 비롯한 국제 정세에 정통한 미국 외교 관료 출신 전문가로, 부시 행정부부터 오바마·트럼프·바이든 정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핵심 요직을 맡아왔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 그의 역할은 한층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두번째로, 현대차는 미국 현지 생산 능력 증대를 위해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된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를 내년 상반기부터 본격 가동할 계획이다. 지난 10월 3일부터 생산을 시작한 이 공장에서는 향후 아이오닉 시리즈를 비롯한 전기차들이 연간 30만대 이상 생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기존 앨라배마 공장과 기아 조지아 공장 등을 합하면, 연간 100만대를 미국 현지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현재는 약 30% 수준인 현지 생산 비중이 약 60%까지 늘어날 수 있다. 현대차는 이를 2028년까지 70%대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마지막으로, 기술력과 관련해 현대차는 전고체 배터리, 로봇 등의 분야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전고체 배터리는 폭발 위험이 낮고, 성능도 뛰어나 ‘꿈의 차세대 배터리 기술’로 주목받고 있지만, 현재까지 상용화되지 못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경기도 의왕 연구소에 전고체 배터리 연구동을 짓고 올해 1월 중 파일럿 라인 가동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5년 전고체 배터리 탑재 전기차를 시범 양산하고, 2030년에 본격 양산하는 것이 목표다. 올해 파일럿 라인 가동에 성공할 경우 현대차는 이 분야에서 한 발 앞서나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현대차그룹의 자회사인 보스턴다이내믹스의 4족 보행 로봇 ‘스팟’이 현재 트럼프 당선인의 경호에 투입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요소다. 스팟은 배터리로 작동하는 로봇개로 국내외에서 위험지역 순찰이나 시설물 관리에 활용되고 있다.
스팟 이외에도 보스턴다이내믹스는 2족 직립 보행 인간형 로봇 ‘아틀라스’와 물류형 로봇 ‘스트레치’ 등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아틀라스는 최근 테슬라가 발표한 인간형 로봇 ‘옵티머스’와 라이벌로 간주되며 주목을 모으고 있다.
3년 연속 최대 실적…고환율 수혜주 될 수도
이같은 노력 때문인지 투자금융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2025년에도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30일 에프앤가이드 컨센서스(실적 전망치 평균)에 따르면, 현대차·기아의 2024년 매출과 영업이익 예상치는 각각 279조 9141억원, 28조 1926억원이다. 각각 전년 대비 6.6%, 5.4% 늘어난 수치다. 2022년부터 이어진 역대 최대 실적 경신 추세가 2024년에도 이어질 것이 확실시된다.
이같은 실적 흐름은 지난 수년간 현대차·기아가 미국과 유럽 등에서 전기차와 SUV, 하이브리드차, 제네시스 브랜드 등 고부가가치 차량의 판매 비중을 지속적으로 높여온 결과다.
심지어 2024년 1월부터 11월까지 현대차·기아는 미국 시장에서 154만 8333대를 판매해 사상최대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전기차 보조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만든 기록이다. 올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해 전기차 보조금 삭감과 관세 인상을 추진한다해도 현대차가 심각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크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같은 추세는 증권가에서도 포착할 수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2024년 한 해 동안 외국인 투자가들이 유가증권시장에서 가장 많이 순매수한 기업은 현대차다. 순매수액은 총 2조 7419억원으로, 순매수 2위 SK하이닉스(1조 6862억원)의 2배 가까운 규모다.
지난해 6월 29만원대까지 올랐던 현대차 주가는 트럼프 리스크가 현실화되면서 10월 이후 하락세를 보여 현재는 21만원대에 머무르고 있지만, 여전히 외국인들은 현대차에 높은 선호도를 보이고 있다. 최근의 주가 흐름은 현대차 본연의 경쟁력보다는 트럼프나 계엄·탄핵사태 등 외부 요인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심지어 현대차·기아가 트럼프 시대에 오히려 수혜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시각도 있다. 수출 비중이 높은 특성 때문에 최근같은 원·달러 고환율 흐름이 유지될 경우 현대차가 최대 수혜주가 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김용구 상상인증권 연구원은 “미국 관세에 대한 우려가 일부 있다”면서도 “우호적인 환율 효과 지속 및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HMGMA) 가동을 통한 효과적 대응을 예상한다”고 분석했다.
<문화경제 정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