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다. 징그럽다. 간교하다.
뱀은 억울하다. 잘못한 것도 없다. 하소연하고 싶다. 누가 나를 악화(惡化)한 건지 따져 묻고 싶다. 심지어 구약성서(舊約聖書)에선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들어 교활함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그뿐이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머리카락은 온통 뱀으로 돼 있어 두렵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뱀 같은 인간”이라고 말하면 기분 좋을 사람 거의 없다.
허나, 우리 선조들은 뱀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도 봤던 듯싶다. 사람의 곡식을 축내는 쥐를 잡아먹는 이로운 동물로 여겨, 담 넘어 들어온 구렁이를 일부러 쫓아내지 않았다. 한 번에 10개 안팎의 알을 낳아 끈질긴 생명력과 풍요로움의 상징으로 대하기도 했다.
그리스신화 속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는 치유의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데, 이는 뱀이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이다. 세계보건기구(WHO)나 군 의무대 등의 마크에 뱀 문양을 넣은 이유다. 뱀이 생명을 치유하거나 갱생시키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만나게 해준 푸른 구렁이
부산 해운대구엔 ‘청사포’가 있다. 그 마을에는 높이 15m, 수령 500여 년 된 소나무가 수호신처럼 서 있다. 이 마을에는, 그리고 이 소나무엔 내려오는 설이 있다.
아주 오래전, 청사포마을엔 정씨와 임씨 부부가 살았다. 정씨뿐만 아니라 이 마을 남자들 대부분은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했다. 배 타고 고기 잡으러 나가면 부인들은 마을 어귀의 바위에 앉아 남편을 기다렸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정씨 부부는 혼인 후에도 금실이 좋아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샀다. 정씨가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 임씨는 바위에 앉아 기다렸다가, 정씨가 무사히 돌아오면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클리셰는 이 전설이라고 비껴가지 않는다. 맞다. 어느 날인가 고기 잡으러 나갔던 정씨가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리다 지친 정씨는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한 해, 두 해, 몇 해가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는 바닷물을 가르고 푸른 구렁이가 임씨 앞에 나타났다. 그러곤 물길을 인도해 정씨와 상면(相面)하게 됐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현세로 돌아온 임씨는 그래도 잊지 못해 바위에 앉아 밤낮을 기다렸고, 소나무가 커서는 그 위에 올라가 먼바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도 소원했던 남편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임씨는 끝내 세상과 이별했다.
당시 임씨가 앉아 기다리던 바위는 ‘망부석(望夫石)’으로, 임씨가 올라갔던 소나무는 ‘망부송(松)’으로 부른다.
이 설에 의하면 푸른 구렁이는 용왕(龍王)이다. 그래서 청사포의 원래 이름은 푸른 뱀이 나타난 바닷가라 해서 ‘靑蛇浦’였다. 이후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맑은 모래’라는 뜻의 ‘淸沙’로 바뀌었다가, ‘청’만 다시 ‘푸를 청’으로 돌아와 지금의 ‘靑沙浦’로 굳어졌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뱀과 관련된 지명(地名)이 가장 많은 지역은 전남이다.
1일 전라남도에 따르면 을사년(乙巳年)을 맞아 전국 30만여 개 지명을 분석한 결과, 뱀 관련 지명은 210여 개며, 이 중 전남이 42곳으로 가장 많았다.
전남지역 뱀 지명은 종류별로 마을이 27개, 계곡과 섬이 각각 5개, 산 3개, 골짜기 2개다. 시·군별로는 고흥이 6개, 광양이 5개, 여수·보성·장흥·해남·완도가 각각 3개며, 나주·구례·진도·신안이 각각 2개다.
뱀 지명 중에선 뱀 모양과 관련한 것이 가장 많았다. 대표적으로 뱀처럼 긴 모양의 섬인 ‘장사도’, 구불구불한 모양의 ‘뱀골’ 등이 있다.
뱀 모양을 묘사한 지명 중 뱀이 개구리를 쫓는 지형인 ‘장사추와형(長蛇追蛙形)’은 먹을 것이 풍부한 좋은 터로, 풍수지리가들이 일컫는 명당의 하나다. 고흥 영남면 금사리의 ‘사도’가 이에 해당한다. 지형이 뱀형이며, 마을 앞에 ‘와도’라는 섬이 있는데 뱀이 개구리를 잡기 위해 건너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광양 골약동 금골마을은 지형이 금뱀이 엎드려 숨어 있는 ‘금사복지혈(金巳伏池穴)’로 ‘금곡’이라고 부른다. 풍수지리학자들은 이곳 역시 명당으로 친다. 순천 서면 지본리 구룡마을은 마을 뒷산의 산맥이 뱀과 같고 아홉 개의 산맥이 있어 ‘사구실’로 부르다가 이후 ‘구룡’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호기심 혹은 그 이상, ‘뱀술’
군 시절, 행군(行軍)할 때마다 꼭 지나치는 가게가 있었다. 대충 잘라낸 나무판자에 큼지막한 글씨로 써 붙인 ‘뱀탕’은 그 집 상호이자 단일 메뉴 그 자체였다. 대충 들어보니 칠점사(까치살무사), 능사 등 다른 종의 뱀 여섯 마리를 푹 고아서 한 사발에 담아 내놓는다고 했다. 행군을 오가며 그 가게에 주차된 차량을 유심히 본 기억도 있다. 번호판에 지역명이 표기돼있던 시절이라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대개 서울이었고 부산도 간혹 보였다. 얼마나 유명한 집이면 부산에서 경기도까지 올까, 신기해하던 기억도 새롭다.
인간은 뱀탕만으론 만족하지 않았다. 산 채로 술에 담가 1년 정도 놔둔 후 마시는 ‘뱀술’도 즐겼다. 이쯤 되니 한 번쯤은 봤거나 혹은 맛보았을 법한 뱀술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뱀술은 알코올도수 45도 이상의 독주(毒酒)에 뱀을 넣어 만든다. 그래야 뱀이 상하지 않고, 그 기운이 서서히 술 속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우리도 즐기고 동남아에서도 볼 수도 있지만, 뱀술은 뭐니 뭐니해도 북한과 일본이 유명하다. 북한은 들쭉술이나 진달래술이 유명한데, 이 못지않게 뱀술도 많이 알려져 있다. 뱀술이 허용되기도 한다. 일본에선 오키나와의 ‘하브슈(ハブ酒)’라고 부르는 살무사술이 유명하다.
일본 릿쿄(立教)대학교 출신의 명욱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는 하브슈 만드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일러줬다. 일단 얼음물에 살무사를 넣어 기절시킨다. 그다음 내장을 제거한 후 다시 꿰맨다. 이어 알코올도수 45도가 넘는 오키나와 전통 소주를 넣고 1년 정도 숙성시킨다. 그럼, 살무사의 독은 어떻게 됐을까. 독성인 알코올과 만나서 그 독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명욱 교수는 “사람들은 뱀의 남다른 특징인 ‘생명력’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뱀은 일단 굶고도 오래 살죠. 대가리가 잘려도 눈깔을 움직이거나 입을 벌리기도 하고요. 독사 대가리를 쳐냈는데도 물려서 사망한 일이 중국에서 있기도 했죠. 뱀은 혈압이 아주 낮아서 포유류처럼 혈액순환이 빠르지 않다 보니 과다출혈이 일어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어설프게 죽이면 복수하러 온다는 동물이기도 해요.”
명욱 교수는 “무엇보다 뱀은 교미시간이 5시간에서 24시간 정도로 정말 긴 데다, 외형이 남성의 생식기와 닮았는데, 특히 독사가 더욱 그렇다”며 “그래서 독사를 넣은 뱀술이 더 인기가 많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따져 볼 것도 없다. 인간이 나빴으면 나빴지 뱀은 나쁘지 않다.
지금은 뱀을 잡거나 뱀으로 술을 만드는 일은 모두 위법이다. 그게 아니라도 무척 비위생적이어서 만들거나 마시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명욱 교수에 따르면 뱀 양식을 하는 곳이 극히 적어 야생 뱀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문제는 기생충이다. 알코올 성분에도 죽지 않는 기생충이 많다고 한다.
뱀술을 마시면 될까요, 안 될까요
그럼에도 뱀술에 대한 호기심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들을 위해 ‘나쁜 사례’를 들어본다.
지난 2021년 5월 중국 자유시보 등에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사는 한 남성이 직접 담근 뱀술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보도했다.
사연은 이렇다. 이 남성에겐 만성질환을 앓는 아들이 있었는데 온갖 방법으로 치료해도 병이 낫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살아있는 뱀으로 술을 담가 마시면 좋다는 얘기를 들었고, 친구에게 소개받아 독사 세 마리를 얻었다. 술을 담그고 1년 후, 술병을 열었는데 순간 독사들이 튀어 올랐고, 그중 한 마리가 남성을 물었다.
바로 병원에 실려 간 남성은 제시간에 혈청을 주입하고 상처를 치료해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왜 뱀들이 병 속에서 오랫동안 살 수 있었을까. 당시 전문가들은 병이 제대로 밀봉되지 않아 알코올이 날아간 것으로 추측했다. 그 사이로 공기가 유입돼 뱀들이 살아남았다는 얘기다. 덧붙여 뱀은 산소나 물이 부족하면 수면 상태에 들어가는데, 이때 먹이가 없어도 소량의 공기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좀 오래되긴 했어도 우리나라에도 뱀술 사망사고가 있었다. 2006년 6월 29일 오후 7시 30분쯤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 살던 60대 이모 씨가 집에서 뱀술을 마시다 숨져 있는 걸 부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숨진 이 씨가 뱀술이 허리디스크에 좋다는 말을 듣고 혼자 뱀술을 마시다 갑자기 손발이 마비되고 호흡곤란 증상을 보였다는 유족의 말에 따라 이 술에 독성이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좋은 술 넘쳐나는 세상에 혹여라도 뱀술에 대한 환상이 있거든 그때마다 이 일들을 떠올려야 한다. 적어도 괜한 일에 목숨 걸 일은 아예 생기지 않는다.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