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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와 발효가 만나면...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다섯 음악가, 영상, 사진, 조각, 퍼포먼스 그리고 발효... 국제갤러리 부산점의 특별한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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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안용호⁄ 2025.04.28 15:10:49

부산 F1963에 위치한 국제갤러리 부산점. 사진=문화경제 안용호 기자

국제갤러리는 4월 25일부터 7월 20일까지 부산 수영구 복합문화공간 'F1963'에 위치한 부산점에서 정연두 작가의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을 개최한다.

 

영상, 사진, 조각,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정연두는 그동안 이질적인 대상들을 횡단하고 접합하며, 시대의 틈을 드러내고 새로운 감각의 짜임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전시 전경. 사진=국제갤러리 

이번 전시는 국제갤러리에서 2008년 이후 처음 열리는 개인전이라 더욱 반갑다. 작가 정연두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해 역사적인 사실을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직조하는 그런 작업을 한다. 거대 서사와 개별 서사,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를 면밀히 살핀다. 그래서 정 작가의 작품에는 다큐멘터리적 특성과 함께 시적인 면모, 음악적인 시도, 그리고 연극의 언어가 공존한다.


특히 이번에는 블루스 음악과 발효의 이미지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작가는 삶의 애환을 바탕으로 하는 블루스, 미생물의 신비로운 작용 발효를 작가의 독특한 예술적 화법으로 엮어내어 다층적 목적과 태도를 담아낸 신작 27편을 관람객에게 선보인다.

 

전시 공간 구성도 작가가 직접 했다. 시작적 이미지와 청각적 요소를 절묘하게 병치하고 블루스 음악과 발효의 리듬을 교차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살아내는 유머와 염원의 태도를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풀어낸다. 이번 전시에서 국제갤러리 부산점의 전시장은 블루스 음악의 각 파트를 연주하는 다섯 음악가를 중심으로 꾸려지는데, 이들은 각각의 사연을 품은 느슨한 합주를 이어간다. 연주자들은 다채로운 색상의 다각형 구조체로 구획된 공간의 곳곳에 자리하며 마주 보고 있는 영상, 사진, 조각에 상호 응답한다.

전시 전경. 사진=문화경제 안용호 기자

시각 이미지와 음악, 목소리, 억양, 소음 등 청각적 요소의 병치에 관심을 가져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가시화되지 않지만, 귀로 듣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삶의 역동과 생기를 음악, 특히 블루스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19세기 중엽 미국 남부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힘겨운 현실을 특유의 리듬과 가사로 풀어낸 이 장르에서 그는 설명되지 않는 상황과 피치 못할 난관을 통과하는 자조적이면서도 유쾌한 상상의 방식을 발견한다. 

 

음악의 울림을 통해 표현되는 삶의 태도에 공감하며, 작가는 작곡가 레이 설(Ray Soul)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블루스의 12마디 구조와 악기 편성을 차용한 〈피치 못할 블루스〉(2025)를 만든다. 그는 다른 장소, 다른 배경의 연주자들에게 별도의 작곡 없이 67 BPM의 느린 속도와 코드만을 제공하여 거듭된 연주를 요청한 뒤, 개별 곡조의 가닥을 자르고 쌓아 이를 하나의 협연으로 조율한다. 그리하여 생을 살아내는 개개인의 리드미컬한 몸짓은 전시장에서 콘트라베이스, 보컬, 색소폰, 오르간, 드럼 소리로 변환되어 한 편의 비동시적인 협주로 공명한다. 

'피치 못할 블루스-콘트라베이스'. 레이 설, 4K 디지털 비디오. 사진=문화경제 안용호 기자 
아픈 손가락(2025). 사진=문화경제 안용호 기자

각 연주자가 주변과 리듬을 이어받으며 나누는 다섯 개의 개별적인 대화로 구성된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의 손가락에 맞추어 빛을 발하는 항아리를 만나볼 수 있다. 유희적인 블루스 음악이 그 내면에 난처한 사연들을 품고 있고, 아름다운 악기 소리가 현과 마찰하는 손가락 끝의 아릿한 감각을 거쳐 생겨나는 것처럼, 만화경 효과를 통해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는 항아리인 〈아픈 손가락〉(2025)은 음악의 이면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실제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레이 설은 자신이 타고난 음악적 천재성을 갖지는 못했다고 생각해 연습벌레라 불릴 정도로 반복적인 연습을 해왔다고 한다.

 

한편, 푸근한 목소리의 보컬리스트 하헌진은 러시아어로 적힌 자신의 사연을 들고 있는 고려인들의 몸짓에 응답하며 이들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이주민들의 탈구된 시공간 경험에 오랜 관심을 가져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한국에 정착한 고려인 청년들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이 겪어온 삶의 단편을 들려준다. 정현두 작가는 고려인 청년들의 사연을 가사로 만들어 12마디마다 하나의 사연을 담고, 이어 기타를 연주하는 방식으로 이어나갔다.

 

가사와 연주에는 개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구소련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살아온 고려인 후세대들의 이야기가 블루스 멜로디 속에서 반복적으로 불린다. "쉬는 시간 10분, 안되는 게 많은 화장품 공장, 물 마셔도 안돼, 화장실도 안 돼, 그리고 난 한국어도 안돼...” 이들의 사연은 인도네시아에서 유래하는 바틱(batik) 천 위에 새겨져 뒤편 벽에 걸리는데, 녹인 벌꿀집으로 기록된 이야기는 치자, 강황, 자초 등 약초로도 쓰이는 국내 천연 염색제를 통해 천 위에 물들여진다. 

정연두_《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전경. 사진=국제갤러리

고려인 학생들에 대한 정연두 작가의 관심은 고려인 학생들의 한국 생활, 문화 적응을 돕기 위한 '다문화청소년문화클럽 방주'를 알게 된 이후였다. 여기서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를 작가는 하나씩 작품의 소재로 만들었다. 한국말을 전혀 못 하는데 일반 학교에 보내져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블루스 음악과 더불어 전시장에는 다채로운 발효의 이미지들이 펼쳐진다. 몇 해 전부터 막걸리를 손수 담아 온 작가는 쌀이 누룩의 균과 만나 이루어지는 발효의 섭리가 요리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는 신의 영역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그 신비한 세계의 리듬을 블루스 음악과 연결했다. 막걸리 기포가 터지는 박자에 맞춰 드럼이 연주되고, 사워도우가 되기 위해 부풀어 오르는 밀가루 반죽은 연주자의 숨처럼 색소폰 소리와 함께 흐른다. 발효와 블루스 음악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발효가 제게 가장 매력적인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죽어버리고 소멸되고 썩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삭막하겠어요. 썩지 않고 발효를 통해 상큼한 향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술이 되어 다시 살아난다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블루스 음악도 어찌보면 그냥 흥겨운 노래라기보다는 사소한 일이라도 고맙고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죠.”

 

바실러스 초상, 2025, color inkjet pigment print, framed, 62*50*4cm. 사진=국제갤러리 

나란히 전시되는 〈바실러스 초상〉(2025)은 메주를 만들 때 콩이 이국적인 바실러스균과 만나 발효되어 피어오른 하얀 거품에서 도깨비 같이 삐뚤삐뚤한 얼굴들을 포착한 사진 연작이다. 이렇듯 작가는 발효의 흔적에서 우리와 닮은 모습을 찾아내며 다름과 닮음이 공존하는 경이로운 자연의 섭리를 친근하고 익살스럽게 전환시킨다.

 

청송에서 된장 만드는 일을 하는 친척 어르신의 집에 머물며 촬영한 사진 속 바실러스균은 때로는 식중독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제각기 재밌는 얼굴을 내밀며 관객을 맞이한다. 미생물의 신비로운 작용은 또한 우주의 창조로도 확장된다. 오르간과 피아노가 연주되는 동안 퍼커셔니스트는 음악에 맞춰 밀가루를 흩뿌리며 우주를 연상시키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정연두(b. 1969) 〈은하수〉 2025 Color inkjet pigment print, framed 94 x 141 x 5 cm (framed)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정연두_《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전경. 사진=국제갤러리

작품 앞에서 정연두 작가는 밀가루를 사랑하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작가가 한 독일 부부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특별한 '사무엘'을 만난다. 고향의 맛, 호밀빵의 맛이 그리웠던 부부는 사워도우(빵을 부풀리는 데 사용하는 유산균과 공생 배양물로 특히 호밀빵을 만들 때 사용한다)를 만들 수 있는 효모들을 냉장고에 넣고 키웠는데 그 효모 이름이 사무엘이었다.

 

“부부가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가면, 사무엘이 죽을까 봐 물을 좀 주라고 이웃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그랬데요. 저도 '사무엘 자손'을 분양 받았는데, 5개월 동안 키워 빵 도우를 만들기 위해 인도산 검정 대리석 위에 밀가루를 뿌려 얻어낸 사진들이 '은하수'와 '안드로메다'와 같은 작품들입니다.”

 정연두_〈피치 못할 블루스 - 오르간〉 스틸 이미지. 사진=국제갤러리 

소망하고 축하하듯 두 손을 비비고 박수를 치며 광활한 우주를 만들었건만 이를 이룬 물질은 알고 보면 밀가루라는, 가벼움과 무거움, 장난기와 엄숙함을 뒤섞는 작가 특유의 역설적 화법은 전시 전체를 밀고 당기며 균형을 이룬다.

 

이처럼 정연두는 세계의 불가해한 작동 앞에서 익숙한 범주들을 벗어나 지나치게 큰 세계와 지나치게 작은 세계를 병치하고 유머와 염원을 뒤섞으며 삶의 신비를 향한 애정을 잊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우연과 운명, 불가항력적인 삶의 희비극을 살아내는 마음의 리듬은 전시라는 무대 위, 서로 응답하는 음악과 이미지의 관계 속에서 한 편의 다성적 하모니로 펼쳐진다.

정연두 작가. 사진=국제갤러리 

정연두(b.1969)는...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골드 스미스 칼리지 미술 석사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이다. 작가는 퍼포먼스가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사진, 영상, 설치 등 미디어 작업에 주력해 왔다. 주로 현대인의 일상에서 작업의 소재를 발견하고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에 주목하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 과정에서 타인과 만나 대화하고 협업하는 관계적 방법론을 수행하면서 예술과 삶, 예술의 주체와 객체 사이를 넘나드는 문지방을 만든다.

 

국립현대미술관의 ‘2007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바 있으며, 주요 개인전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2023), 울산시립미술관(2022), 미국 웨스트 팜 비치 노턴 미술관(2017), 아트선재센터(2017), 프랑스 비트리 쉬르 센 맥발 미술관(MAC VAL)(2015), 일본 아트 타워 미토(2014), 플라토 미술관(2014), 중국 상하이 K11 아트 스페이스(2013), 미국 뉴욕 PERFORMA 09(2009) 등이 있다. 2025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2024년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기념전, 2021년 광주비엔날레, 2016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등에 참여하였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도쿄도현대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시애틀 미술관, 맥발미술관 등에 작가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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