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은⁄ 2025.05.26 13:56:43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현대카드 스토리지는 ‘갤러리’라는 전통적 개념을 넘어서, 동시대 예술의 실험성과 유연함을 담아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스토리지(Storage)’라는 이름 그대로, 이곳은 예술적 영감과 아이디어가 보관되고, 재구성되며, 새로운 형태로 출현하는 창의적 저장소다.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10개의 문화 공간 중 유일하게 전시에 집중된 장소인 이곳은, 물리적 구조물 그 자체로도 하나의 큐레이션 요소다. 노출 콘크리트, 철제 프레임, 원래의 산업적 질감을 고스란히 살린 구조는 '완결된 공간'이 아닌 '유동하는 캔버스'로 기능하며, 회화, 사진, 설치, 영상, 건축, 필름 등 다양한 매체의 예술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실험의 무대로 활용된다.
현대카드 스토리지는 기존의 화이트 큐브와는 차별화된 장소성 기반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회화, 영상, 디자인, 설치 등 다양한 형식의 전시를 통해 예술과 관객의 경계를 허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러한 철학은 ‘David Salle: Under One Roof’ 전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번 전시는 스토리지의 정체성과 데이비드 살레 특유의 다층적 언어가 만나는 접점으로서, 예술이 저장되고 재생산되는 새로운 창고(스토리지)의 개념을 구현해낸다.
데이비드 살레 회고전, 고전과 팝을 넘나드는 시각 실험의 현장
5월 10일부터 9월 7일까지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열리는 ‘David Salle: Under One Roof’ 전시는 현대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살레의 50년 예술 경력을 종합하는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50년 예술 세계를 총망라하는 자리로, 초기 회화부터 최신 NFT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회화·디지털·연극 등 다양한 장르를 횡단하며 동시대 예술의 실험성과 가능성을 집중 조명한다.
데이비드 살레는 1970년대 말 뉴욕 이스트빌리지 아트신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포스트모더니즘 회화의 선구자로 부상했다. 그는 이미지와 스타일, 재현 방식을 차용하고 재배열하는 방식으로 전통 회화의 경계를 해체해왔다. 광고, 일러스트, 팝문화, 미술사 이미지를 끌어와 ‘중첩된 서사’를 구성하는 그의 작업은 시각예술의 문법을 낯설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살레의 대표작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해부학 드로잉 옆에 1950년대 핀업걸이 등장하고, 무표정한 인물화 위에 만화적 요소가 덧씌워지는 식의 충돌이 발생한다. 이는 단순한 ‘콜라주’라기보다는, 시간과 문화, 장르를 가로지르는 ‘언어의 실험’이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군은 2020년대에 시작된 최신작 ‘Windows’ 시리즈다. 총 26점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화면을 창문(Window)처럼 구성하여, 각 프레임 안에 서로 다른 시각 언어와 시간대의 이미지가 병치되어 있다. 고전 회화 기법과 만화 스타일의 라인 드로잉, 상업 일러스트가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해석과 재해석을 반복하게 만든다.
살레는 이를 “하나의 지붕 아래 모인 이질적 이미지들의 대화”라고 표현한다. 이는 전시 제목인 ‘Under One Roof’와도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는 개별 이미지들의 의미보다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성과 시각적 리듬, 충돌이 주는 감각적 경험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살레는 최근 NFT 작업과 애니메이션을 통해 디지털 매체와의 접점도 넓히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 영상도 함께 상영된다. 회화와 디지털 이미지, 시간 기반 미디어를 통합하는 그의 시도는 전통 회화 작가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동시대 예술의 확장을 보여준다.
전시는 크게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작업을 조명하는 ‘Historical’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살레가 미술사, 미국 대중문화, 광고 이미지 등 다양한 시각적 자료를 차용하고 재구성해 완성한 작업들로, 고전과 현대, 고급과 저급,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시각적 충돌을 선보인다.
예를 들어, 한 작품에서는 바로크 시대의 누드 인물이 팝 아트적 색감으로 재현되고, 그 위에 만화 캐릭터나 상업 광고 도상이 얹혀져 이질적 감각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한다. 이러한 ‘시각의 혼성성’은 살레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 이미지를 큐레이션하고 무대화하는 시각 연출자이자 철학자임을 증명한다.
전시의 두 번째 축인 ‘Tree of Life’ 시리즈는 피터 아르노(Peter Arno)의 만화 캐릭터를 모티브로, 성경 속 에덴동산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연작이다. 화려한 색감과 유머러스한 상황 설정, 일상과 환상이 뒤섞인 장면들은 살레 특유의 내러티브와 회화적 기교가 극대화된 사례다.
특히 이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디지털 애니메이션 NFT 작품 ‘A Well-Leafed Tree’는 그의 첫 디지털 프로젝트로 주목받는다. 회화적 요소들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확장한 이 작품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전통 회화의 내러티브를 새롭게 재구성했다. 이 NFT는 단순한 확장이 아닌, 디지털 시대의 회화 가능성을 실험하는 실질적 성과로 평가된다. 살레는 “전통적인 매체와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서로를 보완하고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세 번째 섹션인 ‘Windows’ 시리즈는 뉴욕 아파트 창문을 연상시키는 연극적 공간 속에서 전개된다. 살레는 이 시리즈에서 창문을 하나의 무대로, 그림 속 인물을 배우로 설정하며, 관객은 살레가 연출한 ‘작은 연극(Petit Théâtre)’ 속 장면을 엿보는 듯한 몰입감을 느끼게 된다.
작품 속 내러티브는 장면마다 세밀하게 다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수많은 인간 군상의 욕망과 사생활, 일상의 파편을 관찰하게 만든다. 이러한 설정은 회화가 단순히 시각적 재현을 넘어, 하나의 공연이자 극장적 체험이 될 수 있음을 제안한다.
특히 이 섹션에 포함된 애니메이션 NFT ‘Party of Animals’는 살레의 기존 작업에서 추출한 이미지 소스를 5,000개 고유 디지털 아트워크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는 예술적 내러티브의 반복과 변주, 디지털적 확산을 하나의 시리즈 안에 담아낸 사례로, 동시대 예술이 어떻게 기술과 결합해 새로운 차원의 ‘스토리텔링’을 구현하는지를 보여준다.
‘David Salle: Under One Roof’은 단순히 작가의 작품을 나열하는 전시가 아니다. 현대카드 스토리지라는 열린 공간과 살레의 다층적 예술 언어가 만나는 이 전시는, 오늘날 ‘전시’라는 형식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관람객은 익숙한 이미지 안에서 낯선 의미를 발견하고, 회화 속 구성을 따라가며 자신만의 서사를 구성하게 된다.
현대카드 스토리지는 이를 통해 예술의 수용자와 생산자, 전통과 실험,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과 작가가 새로운 형태의 공존을 이루는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살레의 회화,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아우르는 통합적 예술 세계를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드문 기회”라며, “예술을 시각의 축으로만 접근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동시대 감각과 기술이 어떻게 창작을 확장하는지를 체감할 수 있는 전시”라고 강조했다.
기술과 사회, 예술이 교차하는 전시로 동시대 감각 탐색
현대카드 스토리지는 그동안 진행된 전시들을 통해 예술을 통해 동시대 이슈를 사유하고, 장르 간 경계를 허물며, 기술과 창작의 결합을 실험해왔다. 과거 스토리지 전시들은 이 공간이 꾸준히 축적해온 실천적 맥락의 기반이 된다.
최근 2년간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진행된 세 편의 주요 전시는 동시대 시각문화의 지형을 집약적으로 보여줬다. 신체와 노동이 자본에 포획되는 기묘한 풍경에서 시작해, 도시를 살아가는 인간의 초상으로 시선을 옮기고, 다시 예술계의 아이콘이 된 인물들의 충돌과 화해로 마무리되는 이 흐름은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감각과 구조, 기억의 층위를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가장 최근 열린 〈Mika Rottenberg: NoNoseKnows〉(2024.10.23 – 2025.3.2)는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미카 로텐버그의 국내 첫 개인전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이 신체와 감각, 노동을 어떻게 비정상적으로 구조화하는지를 시청각적 몰입을 통해 드러냈다. 대표작 〈NoNoseKnows〉(2015)는 냄새를 맡는 행위조차 생산 공정에 포함된 세계를 묘사하며, 여성성과 소비주의를 그로테스크하고 유머러스한 감성으로 조형한다. 키네틱 아트와 초현실적 영상이 결합된 이 전시는 자본이 인간의 신체를 통제하는 방식을 가장 낯선 형식으로 드러냈다.
이 괴기적 신체성과 대비되는 전시는 1970년대 미국 도시 풍경을 담은 사진전 〈Urban Chronicles: American Color Photography〉(2024.3.29 – 2024.7.28)이다. 윌리엄 이글스턴, 비비안 마이어 등 7인의 사진작가가 촬영한 70여 점의 작품은 도시의 표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흔적과 감정을 색으로 포착한다. 이글스턴은 평범한 거리와 사물에 회화적 깊이를 부여했고, 마이어는 익명의 군상을 통해 도시를 살아내는 개인의 감정과 거리를 밀도 있게 기록했다. 이 사진들은 다큐멘터리와 예술 사이를 가로지르며, 도시라는 공간이 어떻게 미학과 사회를 동시에 담는 그릇이 되는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 전 해, 단 3일간 열린 특별전 〈Heads On: Basquiat & Warhol〉(2023.9.5 – 2023.9.7)은 바스키아와 워홀이 예술계의 중심에 등장했던 1980년대 뉴욕을 회고하며, 이미지와 자본, 우정과 경쟁이라는 복잡한 감정의 층위를 탐색했다. 크리스티와 현대카드의 공동 기획으로 진행된 이번 전시에서는 바스키아의 〈Warrior〉와 워홀의 자화상 등 상징적 작품들이 공개됐고, 두 인물의 협업과 대립, 상업성과 반체제성이라는 이중적 긴장이 한 공간에 응축됐다. 이 전시는 단순한 회고가 아닌, 예술이 어떻게 아이콘이 되고 시장과 결합해 또 다른 권력을 형성하는지를 응시하게 했다.
이 세 전시는 전혀 다른 시점과 형식을 다루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시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변화하는 인간 조건을 탐색했다. 신체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이미지로의 전환 등 동시대 시각문화가 어떻게 진화하고 충돌하는지를 현대카드 스토리지는 유기적이고 도전적인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미술 전시 공간을 넘어, 감각과 구조가 만나는 실험실로서의 역할을 예고한다.
앞으로도 스토리지는 ‘저장’과 ‘생산’의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으로서 실험적 전시들을 통해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관객에게 예술의 다층적인 경험을 제시할 예정이다. 스토리지 공간은 현대카드 회원이 아니라도 누구나 입장이 가능하며, 전시 정보는 현대카드 DIVE 앱과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화경제 김예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