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옥션 럭셔리&파인아트 스페셜리스트 류지민⁄ 2025.09.11 09:33:19
럭셔리와 예술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매년 아트바젤과 UBS 은행이 공동 발행하는 아트마켓 리포트인 ‘디 아트 바젤 앤 UBS 서베이 오브 글로벌 컬렉팅(The Art Basel & UBS Survey of Global Collecting)’의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이후 고액자산가(HNWI) 고객의 부의 상승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미술 시장과 럭셔리 시장은 각각 약 10%, 약 22%로 상승했다. 이는 같은 기간 동안 럭셔리 부문이 미술 시장보다 가파르게 확대됐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미술시장 전문 조사처 아트태틱(ArtTatic)은 글로벌 경매 시장에서 럭셔리 카테고리의 출품 비중이 2012년 12.7%에서 2023년 상반기 약 20%까지 상승했다고 분석한다. 두 수치 모두 럭셔리가 이제 단순한 소비재를 넘어, 경매 시장 내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술 컬렉터들의 행태 역시 변화를 보인다. 앞서 언급한 아트바젤-UBS 보고서는 고자산 컬렉터들의 주요 컬렉팅 항목에 미술품 외에도 보석, 시계, 럭셔리 아이템을 꾸준히 포함시키며 컬렉터들의 수집 항목의 추이를 세부 분석한다. 이는 컬렉터들이 예술과 럭셔리를 별개의 영역으로 보지 않고, 상호 보완적인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번 서울옥션 186회 경매(9월 23일)에 출품되는 두 점의 디올 레이디 아트(Dior Lady Art)백은 럭셔리와 아트의 교차점이 어떻게 작품으로서 컬렉터 시장에 등장하는지 잘 보여준다.
디올은 2016년부터 ‘디올 레이디 아트’ 프로젝트를 통해 자사의 아이코닉 백인 ‘레이디 디올’을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에게 하나의 캔버스로 제시해왔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백의 상징적인 실루엣을 유지하면서도 아티스트의 해석을 온전히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디올은 브랜드의 정체성인 우아함과 장인정신을 지키고, 동시에 예술의 상상력을 결합해 ‘패션을 넘어선 예술’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술과의 교차를 통해 브랜드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전략적 시도로 해석되는 이 프로젝트는 올해로 9년째 전개되고 있다.
2017년 디올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불과 함께 두 번째 레이디 아트 프로젝트로 새로운 레이디 아트백을 선보였다. 해당 컬렉션은 전 세계 단 150개 한정으로, 10개 매장에서만 공개됐다고 알려진다. 이불은 기계와 신체, 존재의 유한성과 소멸을 탐구해온 작가다.
당시 컬렉션은 그녀의 대표적인 시리즈인 ‘태양의 도시(Civitas Solis)’를 모티프로 작업에서 엿볼 수 있는 ‘거울을 통한 반영’이라는 주제를 구현했다. 표면을 장식한 수십 개의 플렉시글라스 미러 조각은 디올 공방의 장인들이 작가의 요구에 따라 무려 60번의 시도 끝에 완성한 결과물이다.
디올이 가진 집요한 완벽주의와 장인정신의 결합은 이불의 실험적 조형 언어와 만나 극대화된다. 이불 작가는 한 인터뷰를 통해 협업작은 단순히 디자인적인 반영이 아닌, 가방 소지자와 가방에 비춰지는 타인 그리고 주위 환경이라는 3요소가 만난 세계를 구현했음을 밝혔다. 소장자가 가방과 함께 만나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른 퍼포먼스가 탄생하는 것이다. 현재 리움 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가 개최된 이후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불의 작품 세계를 보면, 당시 이 협업이 보여줬던 선구적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디올의 ‘레이디 아트 프로젝트’
럭셔리와 아트의 경계를 허물다
또 다른 레이디 아트백은 디올의 아홉 번째 프로젝트로 전개된 우국원과의 협업작이다. 우국원의 작품은 언제나 따뜻한 유머와 표현의 날카로움이 공존한다. 친근한 캐릭터 속에 사회적 시선이 교차하면서 보는 이를 웃게 하면서도 관람객 스스로 사유하게 만든다.
특히 올해 컬렉션은 작가의 원화에서 볼 수 있는 시그니처 표현을 그대로 담고 있다. 가방 정면에 배치된 캐릭터들은 각각 작가의 아내, 어린 딸, 그리고 반려견을 상징한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담긴 따뜻한 세계관이 구현된 이 컬렉션은 패션 오브제를 넘어 작가의 시선까지 함께 소유할 수 있는 특별함이 엿보인다.
작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색감의 층위 표현, 그리고 비즈와 자수로 구현된 섬세한 디테일은 원화의 질감을 그대로 전달한다. 마치 일상에서 회화를 소지하는 듯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현재 그의 작품은 국내외 경매와 전시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데, 이번 협업은 럭셔리라는 언어로 그의 세계를 더 가까이 체험할 수 있게 만든 순간이다.
이 같은 협업 컬렉션은 디올만의 시도가 아니다. 에르메스, 불가리, 루이비통 등 럭셔리 브랜드 전반은 미래 세대 소비자층을 겨냥한 전략적 협업을 통해 신선함과 브랜드 정체성 강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이 중 특히 루이비통과 다카시 무라카미의 협업은 해외 주요 경매 시장에서 높은 경합을 불러일으킬 만큼 수집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실제로 2004년 루이비통이 다카시 무라카미와 이뤘던 협업 컬렉션 중 하나인 ‘화이트 멀티컬러 알제르’ 모델은 2023년 크리스티 뉴욕 핸드백 경매에서 추정가 1만~1만 5000달러를 웃도는 2만 1420달러(경매 수수료 포함가)에 최종 낙찰됐다. 이는 협업 컬렉션이 단순한 패션 아이템을 넘어 해외 유명 경매사의 아이템으로 선보일 만큼 컬렉터블 아트 오브제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이러한 협업 컬렉션의 지속적인 등장과 시장의 흐름은 컬렉터 마켓의 지형을 분명히 바꿔놓고 있다. 무엇보다 수집가들이 예술을 훨씬 더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하고, 동시에 소장 욕구를 강하게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상에서 익숙한 오브제 위에 아티스트의 영감이 더해지면 작품은 감상에서 머무르지 않고 손끝으로 느낄 수 있는 실재로 다가온다. 디올의 레이디 아트 프로젝트의 전개는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 럭셔리와 아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장인정신과 영감이 어우러진 협업 컬렉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풍경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시장의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