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3일 열린 서울옥션 제186회 미술품 경매에 유독 많은 문의가 있던 작품들이 있었다. 바로 김창열 작가의 작품이다.
1929년 태어나 2021년 세상을 떠난 그의 작품이 근래 다시 주목을 받는 모양인지, 경매 작품을 전시하는 프리뷰 기간 동안 미술품 애호가들 문의가 심심찮게 있었다. 그 중 상당수는 낮은 추정가를 훌쩍 넘어 치열한 경합 끝에 낙찰됐다.
돌이켜 보면 국내 미술시장이 2~3년 전보다 호황이 아님에도 김창열의 작품은 올해도 꾸준히 상승세의 낙찰 결과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근래 관심도의 상승은 지난 8월 22일 성대하게 막을 올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김창열 회고전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통상 주요 국내외 미술관에서 열리는 유명 작가의 전시 소식은 미술시장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필자도 전시 개막 이후 경매 결과에 주목하고 있었다.
한국 추상미술을 논할 때 빠져서 안 될 김창열의 회고전이 작고 이후 다소 시간을 두고 열렸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었으나, 공식 전시 일정 하루 전 열린 오프닝 행사를 통해 미리 감상한 김창열의 작품 세계는 평단뿐 아니라 시장에서 다시금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기에 충분한 기회라고 생각이 들었다.
‘물방울 작가’ 김창열의 삶
‘물방울 작가’로 널리 알려진 김창열은 1929년 겨울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웠고, 광성보고 시절에는 데생을 익히며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길 결심했다. 해방 이후에는 이쾌대가 운영하던 성북동 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우며 화업을 발전시켰다.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했으나 얼마 있지 않아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겪은 전쟁의 상흔은 그의 평생 작품세계에 영향을 준 사건이었으며 상징과도 같은 물방울 형상으로 발전하는 주된 계기가 됐다.
전쟁의 아픔과 상처 속에서도 미술에 대한 열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 1957년 ‘현대 미술가 협회’ 그룹에 창립 멤버로 참여해 한국에 앵포르멜 회화를 선보였고, 이후 눈을 돌려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하며 세계 미술계를 경험했다. 김창열은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 League)에서 수학하며 백남준의 도움을 받아 1969년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이후 파리로 이주하게 된다.
뉴욕에서의 작업이 다양한 형태적 실험을 기반으로 추상의 길을 발전시키던 시기였다면, 도불 이후에는 본격적인 물방울 회화의 구현을 통해 그의 작업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약 15km 떨어진 마구간에 아틀리에와 숙소를 마련했는데, 마땅히 재료 살 형편이 되지 않아 캔버스 뒷면을 물에 적셔 묵힌 후 물감을 떼어 다시 그리는 식의 작업을 이어가던 중 캔버스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마침내 영원한 생명이 담긴 물방울 회화를 완성했다.
특히 그는 1972년 프랑스의 권위 있는 초대전 살롱 드 메(Salon de Mai) 전시에서 검은 바탕에 오롯한 물방울 하나와 그 그림자를 그린 ‘밤에 일어난 일(Event of Night)’을 출품해 당시 파리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김창열의 독창적 예술 세계
투명한 물방울은 마치 전쟁의 아픔과 상흔마저 모두 맑게 비워낸 듯한 무(無)의 세계를 보여주는데, 작가는 때론 흘러내려 스며든 흔적이 남아 있는 존재의 영역도 표현했다. 흘러내리고 있는 듯한 물방울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눈앞에 멈춰 있는 물질로 느껴진다. 이렇게 멈춘 순간은 강한 환영(Illusion)을 느끼게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물방울은 어떠한 실체도 아닌 물감으로 이루어진 그저 이미지라는 점이다.
또한 초기 작품에 주로 사용된 거친 마포(리넨)는 표면 위에 영롱하게 흐르는 물방울을 더욱 촉각적으로 느끼게 했다. 통상 김창열 회화의 바탕은 마치 세월의 흔적이 베어진 것과 누런빛을 띠는데 이는 마포 소재의 캔버스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경 위에 영롱하게 그려진 물방울은 영원할 것 같으면서도 평면을 타고 흘러내려 곧 사라지거나 혹은 증발해 날아갈 듯하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회화에서 영원히 멈춰 존재하고 있어 감동을 선사한다.
앞서 언급한 9월 경매에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작품이 출품돼 눈길을 끌었다. 그중 한 점은 바탕이 독특한데 캔버스 평면에 모래를 바탕에 깔고 그 위에 물방울을 그린 1970년대 김창열 작품이었다. 작가의 재료에 대한 실험과 물방울 이미지와 평면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의 과정을 엿볼 수 있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더불어 종이 신문지 작품도 주목할 만했다.
김창열은 프랑스 작업실 다락방에서 신문 더미를 발견하고 ‘르 피가로’ 1면에 수채 물감으로 물방울을 그리기도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문자와 물방울의 조합이 등장했고, 1990년대 주로 등장하는 ‘회귀’ 연작에서는 천자문을 배경으로 한 물방울이 표현된다. 화면에 문자가 도입되며 글씨 배경과 사실적 물방울이 혼재해 놓인 평면 공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만들었다. 천자문은 작가가 어린 시절 처음 배운 글자이며 무한한 우주의 체계를 보여주는 개념으로 물방울과 함께 그의 회화에 말년까지 표현됐다.
올해 12월 말까지 회고전이 열려 더 주목받고 있는 그의 작품과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김창열은 평생 물방울에 주목해 그의 삶을 투영했고 그 형상은 이제, 우리에게 울림이 돼 영원한 물방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