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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림의 현대사진산책+] 더 이상 미치지 않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박영숙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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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천수림(사진비평)⁄ 2026.03.03 17:18:21

박영숙 개인전 현장. ©Estate of PARK Youngsook. Courtesy of the Estate and Arario Gallery. ©박영숙 에스테이트. 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는 한국 현대사진사와 페미니즘 미술 발전에 큰 자취를 남긴 박영숙(1941~2025)의 개인전 ‘보라, 저 여자가 노래하고 춤춘다’(2월 25일~4월 18일)를 개최 중이다.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사진으로 남성중심주의적 관습 및 부조리한 권력 구조에 문제를 제기해 온 작가의 별세 이후 선보이는 첫 전시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부를만한 ‘미친년 프로젝트(Mad Women Project, 1999~2019)’의 발아가 시작된 20대 때 촬영했던 사진을 포함한 전 생애의 궤적을 추적해간다.

* 칼럼명 ‘더 이상 미치지 않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네!’는 김영 목사의 축시 ‘나의 친구 박영숙 작가’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김영은 박영숙의 오랜 벗이자 1994년의 전시 ‘여성, 그 다름의 힘’에서 박영숙, 윤석남,한영애가 함께 한 공동 프로젝트에서 창세기의 ‘하나님 아버지’를 ‘어머니’로 바꿔 쓴 시를 발표한 여성 목사다.

‘보라, 저 여자가 노래하고 춤춘다’

박영숙, '미친년들(Mad Women) #5'. C-프린트, 150x120cm. 1999. ©Estate of PARK Youngsook. Courtesy of the Estate and Arario Gallery. ©박영숙 에스테이트. 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전시 제목 ‘보라, 저 여자가 노래하고 춤춘다’는 시인 김혜순이 작가에게 선물한 시 ‘꽃이 그녀를 흔들다’의 시 구절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땅이 미치지 않고 어찌, 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여자의 몸에서 올라오는 광기는 여자의 몸에서 올라온 꽃과 같다.…(중략)…여자가 미치지 않고 어찌, 노래를 하고, 춤을 추겠는가”라는 시다. 꽃을 피우는 땅의 기운을 여자의 몸에서 피어나는 광기에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역사 속 모든 대상화된 여성들을 지시한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의 1층과 지하1층에서는 1998년부터 2005년 사이 발표한 ‘육체 그리고 성’(1998), ‘미친년들’(1999), ‘상실된 성’(2001),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2002), ‘내 안의 마녀’(2005), ‘꽃이 그녀를 흔들다’(2005) 연작을 만나볼 수 있다.

 

3층에서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광기 어린 여자의 원형을 목격할 수 있는 ‘장면’(1963~67) 연작과 ‘마녀’(1988), ‘장미’(1988) 등 1960~80년대 흑백 사진 연작을 살펴볼 수 있다. 아날로그 슬라이드 필름 영사 방식으로 제작된 영상 작품 ‘자궁의 노래: 이제 크신 어머니 자고 깨니’(1994, 2026 디지털 판본 제작)를 디지털 방식으로 복원해 새롭게 선보인다.

‘미친년 프로젝트(Mad Women Project)’의 언표

박영숙, '꽃이 그녀를 흔들다(A Flower Shakes Her) #14'. C-프린트, 120x120 cm. 2005. ©Estate of PARK Youngsook. Courtesy of the Estate and Arario Gallery. ©박영숙 에스테이트. 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박영숙 작가의 미친년 프로젝트는 한국 현대 사진사와 페미니즘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가 조명하는 ‘미친년’이라는 언표(言表)는 한국의 군부독재 시절과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 안에서 독특한 사회적 맥락을 지닌다.

미친년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 연작 ‘미친년들’(1999)을 살펴보자. 총 7점의 미친년들 연작은 1999년 6월 18일 박영숙의 작업실 ‘제3공간’에 모인 7인의 여성 예술인이 모여 진행된 퍼포먼스 기록이다. 이 퍼포먼스는 박영숙이 여성 정신과 의사와 ‘미친 상태’에 관한 논의를 진행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당시 류준화, 이수경 작가 등 여러 명의 문화예술계 인물들이 참여했다.

박영숙 개인전 현장. ©Estate of PARK Youngsook. Courtesy of the Estate and Arario Gallery. ©박영숙 에스테이트. 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작가는 “자신을 미치게 하는 고통이 무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모른 채,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의 고통들을 겪어 내며 참고 또 참았던”, “미친년이 되고 처녀 귀신이 될 수밖에”(박영숙, ‘미친년 프로젝트에 대하여’(1999), 박영숙·김영옥 편저, ‘미친년 프로젝트’(서울: 상경커뮤니케이션, 2009), pp. 65~67.) 없었던 과거의 여자들을 위한 기록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 속 여인들은 마치 베개를 안고 있으면서 잃어버린 아기를 안은 것과 같은 표정을 짓거나, 저고리는 벗어던진 채 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을 취하거나, 아이와 쓰레받기, 식품 들이 널브려져 있는 방안에 마치 전문직 여성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사진에 담긴 여성들은 스스로의 정체성과 서사를 되찾으려는 몸짓을 통해 박영숙의 카메라에 화답하고 있다.

박영숙, '내 안의 마녀(Witch Within Me) #5'. C-프린트, 170x127cm. 2005. ©Estate of PARK Youngsook. Courtesy of the Estate and Arario Gallery. ©박영숙 에스테이트. 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군부독재 시절 ‘미친년’은 체제가 설정한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난 여성을 낙인찍고 사회적으로 격리하기 위한 강력한 통제 도구로, 단순히 정신질환을 앓는 여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었다. 가부장적 질서와 국가주의에 순응하지 않는 여성을 통제 불가능한 존재로 타자화해 여성의 발언권을 박탈했다.

작가는 사회가 부여한 ‘미친년’이라는 이름을 통해 오히려 “그래, 내가 바로 그 미친년이다”라고 선언하며 피해자 위치에서 주체적 행위자로 변모시킨다. 그녀의 사진이 이런 퍼포먼스적 성격을 띠는 데는 마치 굿이나 살풀이처럼 사회적 치유과정으로 활용한 데 있다.

 

‘꽃이 그녀를 흔들다#4’에는 마치 김혜순 시구에 화답하듯 꽃과 여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군집 속에 서 있는 보랏빛 여인을 촬영한 기록 영상은 전시장 복도 끝에 놓여 있다. 생전에 촬영했던 방식을 고스란히 볼 수도 있지만, 그녀가 카메라를 통해 끌어내려고 했던 그 시대의 에너지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세, ‘마녀사냥’에 충격받아 페미니스트 되다

박영숙, '장면(Scene) 46'. 젤라스틴 실버 프린트, 50.8x40.6cm. 1967. ©Estate of PARK Youngsook. Courtesy of the Estate and Arario Gallery. ©박영숙 에스테이트. 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흑백 사진 여섯 장을 나란히 이어붙인 포토콜라주 ‘마녀’(1988)의 좌측 하단부에 작가는 직접 손글씨로 “중세, ‘마녀사냥’에 충격받아 페미니스트 되다”라고 써놓았다. 드디어 박영숙의 1960~80년대 사진들은 ‘미친년’과 ‘마녀’의 이미지로 정립된 여자의 원형에 관한 출발점이라 는 사실을 목도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김혜순의 시 ‘그곳 2—마녀 화형식’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시는 1979년경에 썼는데 훗날 1988년에 발간한 시집 ‘어느 별의 지옥’에 수록됐다. 계엄 시절 대학 졸업 후 출판사에 다니던 시인은 어느 날 교정을 맡은 번역자의 연락처를 추궁당하며 경찰에 불려가 뺨을 맞게 됐다. 이 에피소드는 훗날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2014)에 등장하는 ‘은숙’의 실존인물로 재소환된다.

 

마녀는 박영숙이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 시기 제작된 대표작 중 하나로 마녀를 연상시키는 여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인화과정에서 버려진 사진들도 배제하지 않았다. 마녀는 또 다른 포토콜라주 ‘장미’(1988)와 함께 1988년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여성해방 시와 그림의 만남: 우리 봇물을 트자’에서 처음 선보였다.

박영숙 개인전 현장. ©Estate of PARK Youngsook. Courtesy of the Estate and Arario Gallery. ©박영숙 에스테이트. 유족 및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영상작품 ‘자궁의 노래: 이제 크신 어머니 자고 깨니’(1994, 2026 디지털 판본 제작)는 1994년 전시 ‘여성, 그 다름과 힘’(김홍희 기획)에서 4인의 공동 프로젝트 일환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자궁의 노래: 이제 크신 어머니 자고 깨니는 박영숙의 사진 슬라이드 위에 한영애의 구음을 음향 요소로 덧입힌 형태로 제작됐고, 윤석남이 설치를 김영이 글을 담당했다. 아날로그 슬라이드 필름 영사 방식으로 제작된 영상을 디지털 판본으로 복원한 결과물로 이번 전시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태양이 뜨는 프롤로그를 지나 대자연으로 막을 내리는 영상은 평소 작가가 생각했던 생명과 순환에 대한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자궁이 그들을 부르고 있다. 자궁으로 돌아와 좀 쉬어 보라고. 자궁이 너희를 품어 거듭 태어나게 하려 하니, 들어와 새로운 양분들을 섭취해 보라고…. 자궁에서 촉각, 청각, 후각, 미각, 시각으로 전해주는 경험, 그 자궁에서의 경험으로 아마 당신을 거듭나게 해 줄 것입니다. 여기는 ‘크신 어머니의 자궁 속’입니다. 어서 오세요.” – 작가 노트, ‘자궁의 노래: 이제 크신 어머니 자고 깨니’ 중에서

이번 전시에는 평생 여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했던 작가의 생각과 작업과정, 생전에 교류하고 연대했던 다양한 문화계 인물 등을 유추해볼 수 있는 다양한 아카이브도 마련됐다. 평생 걸친 이 프로젝트에는 다양한 세대와 직업군의 여성들을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연대기적 기록이 됐다.

 

<작가소개>

박영숙(1941-2025)은 1963년 숙명여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1986년 숙명여자대학교 사진디자인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부 재학 시절인 1961년 ‘현대사진연구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62년 교내 사진 동아리 ‘숙미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을 맡았다. 1966년 중앙공보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1975년 유엔(UN) 제정 세계여성의 해를 기념해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의 초청으로 개최한 개인전 ‘평등, 발전, 평화’에서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담은 사진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페미니스트 단체 ‘또 하나의 문화’(1984년 설립)에 참여했고 1992년부터 민중미술 계열의 페미니스트 단체 ‘여성미술연구회’(1986~1995)에 가입해 페미니즘 운동에 앞장섰다. 2002년 광주비엔날레 ‘멈춤, 止, PAUSE’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2006년부터 한국 사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진 갤러리인 트렁크갤러리(2007~2018)를 설립 및 운영했다. 박영숙은 2020년 이중섭미술상, 2025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영국), 국립현대미술관(한국), 서울시립미술관(한국), 등 주요 미술관 및 기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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