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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와 그 정치적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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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호 ⁄ 2007.07.03 14:07:50

옛날부터 老子를 비롯한 많은 현인들이「道」를 가리켜 「하늘의 이치」니 「궁극적인 이상」이니 하며, 하나인 도를 여러 모습으로 파악 하였다. 내게 도를 정의하라하면 「인간정신의 최고, 또는 가치의 절정」쯤 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루쉰(魯迅)은 「많은 사람이 다니면 곧 그것이 길이고, 없던 길도 생겨 난다」고 하여 인간의 도에 대한 상상력을 극대화시켰는데, 도의 형식과 내용을 적절하게 포착했다고 볼 수 있다. 도란 산 이편의 진리가 산 저편에서는 이단으로 배척되는 그런 것은 아니여야 하고, 인류 역사와 똑같아 없었던 것을 새로 만들기도 하는 작용을 하면서 그 동안 감춰졌던 것을 하나하나 밝히는 기능도 한다고 본다. 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자기 성씨를 잊어버리지 않고자 허리춤에 찬 배는 떨어져 꼭지만 남았다는 우화에서처럼, 정신도 빈약하고 영혼도 사그라지는 오늘의 사람들이나 장차가 없고 영원을 모르고 오늘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도란 어렵고 무거우며 회피하고 싶은 화두일 수 도 있다. 도는 편애하지 않고, 한 쪽에 가담하지 않으며,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이다. 여기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지 않고, 우리 보통사람들의 특징인 경향성과 차별성을 철저하게 무시를 한다. 도는 가짜 도와는 달리, 끊어진 것을 이어주고 갈라진 것을 합하게 하고 깨어진 것을 붙여주니 교화하고 덕화한다. 탈무드에 만장일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쁘다」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어느 한 쪽에 경도되고 어느 한쪽이 우세한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억강부약(抑强扶弱)은 한국 도의 하나라면 Noblesse Oblige는 서양 도의 하나인 것이다. 도가 경색된다는 것은 생각의 동맥경화나 생각의 협심증과 같아 나라에 대입하면 지도층이 제 역할을 못하고 사회제도가 그 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생기가 돌고, 사회가 발랄하기 위해서는 도의 더 좋고 더 나은 생각의 펌프운동을 쉬지 말아야 한다. 도가 어느 한 순간 형상이 되고 형체를 띠면, 그때부터 도는 어느 한쪽의 모습이지 천 가지 모습을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최고의 선은 물과 같아야 한다고 했던가? 진리나 정의나 자비심이 물과 같이 유려하고 자유로워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모양을 이루면 그때부터 침노를 당하고 시비 거리가 되고 타파해야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도가 고정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고정은 움직일 수 없는 완성 즉 고착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 수정하고 개선할 수 없는 기성품으로 남는다는 것은 곧 골동품이라 할 수도 있고 화석이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정보다는 유동이 좋고, 완성보다는 미완성이 좋은 이유도 완성을 향한 여지가 있으며, 인간의 가장 큰 만족감인 성취동기도 충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중용이라 하여 이상으로 여긴 것은 그 숱한 전란과 흥망 속에서 특정한 것의 가벼움과 허망함을 알았으며 고집은 패망과 불화임을 경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불교 선종에서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을 운위하고 가섭존자의 염화미소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도가 어느 날 우리 눈에 나타나면 그때부터 뜻이 옹졸해지고 ,뜻이 왜곡되어 뜻을 올바로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글로서 나타나면, 아주 뛰어난 사람 정도나 행간을 읽기도 하고 뜻을 미루어 알뿐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에 얽매여 본래의 정신이나 본뜻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심지어는 문자까지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도는 남녀사이의 사랑과 같아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부터 사랑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처럼, 도라고 말을 하는 순간부터 도는 훼절되고 의미가 반감된다는 말도 틀린 논리는 아닐 것이다. 도란 생활에서도 보이는데, 아이들이나 배우자에게 연연하는 것도 도가 아니며, 돈이나 명예에 대한 집착도 도로서 환영 받지 못한다. 이 시대의 명제인 「선택과 집중」도 도의 앞에서는 선(善)이 아니라 한다. 도는 정치에서는 당파성 정파적인 것의 초월을 요구한다. 어느 누구는 코드를 찾는데 그것은 정실을 하겠다는 것이며 사사로움을 쫓겠다는 것으로서 그런 것은 주먹 패나 협잡꾼들이 찾는 「소인배의 논리」이지 지도자가 상고(尙考) 할 도는 아닌 것이다. 종교도 특정교리를 내세우면 그때부터 보편성과 세계성을 잃어 몇 사람만의 종교로 전락할 수 있고, 도란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요 특정국가나 특정이념에만 고정되고 나타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우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재앙으로 몰아넣는 히틀러의 나치나 문화대혁명일 것이다. 언론 분야에 있어 방송이나 신문도 예외가 아니니 특정 사상, 특정 정파를 대변하는듯한 논조는 국민의 지탄을 받는다. 국민을 이념의 고정화로 묶어 두기 때문이다. 일전에는 소위 좌파나 진보파의 신진인사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비난했는데, 그래도 아직까지 김 추기경이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그가 어느 당, 어느 단체의 이익을 취하거나 봉사하지 않고 전국가적 전국민적인 일에 헌신하고, 좌나 우로 쏠리지 않고 중심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도란 거듭 말하거니와 고정된 것도 아니고 특정한 곳에 있지도 않고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이것은 공기·물과 같이 사용가치는 높으나 교환 가치는 적을 수도 있으며, 생활에서 도를 찾아야지 구태여 히말라야의 설산으로, 갠지스 강으로 또는 사막으로 가서 수행이나 고행을 하며 찾을 필요가 없다. 사실 인류역사에서 이것보다 더 높고 이것보다 더 순수한 것은 없었다. 권력이나 황금이 지식이나 미인이 한때 명성을 얻고 한 때 풍운을 몰고 오기는 하나 다 생명력이 짧았고, 이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간다. 한 국가에 있어 입법 행정 사법의 견제와 균형의 논리도 도의 정신에서 발원하다고 볼 것이다. 어느 한 기관이 우월하면 독재가 되고 파행이 되고 비정상이 되어 국정은 파열음이 나고 민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노자에게 있어 도란 부드러운 것이고 가변적인 것이고 치우치지 않으며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고정된 것은 딱딱한 것이고 이것은 나무 등걸과 같아 생명이 다했음을 뜻한다. 쏠린다는 것은 극단으로서 또 다른 극단을 불러옴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추구한 것들이 고정되어서 사유의 사통팔달을 방해하고 움직이지 않아서 시대정신을 못 닮거나 못 쫓아 간다면 그것은 도(정치)가 없다고 말 할 수 있고, 도(정치)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千里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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