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곡 김육(潛谷 金堉·1580~1658)은 이 나라의 가장 어려운 격동기에 살다가 간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장년에는 왕이 뒤바뀌는 인조반정을 목격했으며 늙은 나이에는 병자호란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역경 가운데서도 벼슬아치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인물로 꼽힌다. 그는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민중의 비참한 생활에 항상 눈길을 돌리고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에 늘 고심했다. 그가 발의한 정책이 효종의 인정을 받아 일부 실시되면서 영의정까지 지내게 되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옛 역사를 읽고 싶지 않다네 / 그것을 읽으면 눈물이 흐른다네 / 군자는 늘 곤욕을 당하고 / 소인은 흔히 득지(得志) 하거든… / 저 요순(堯舜)시대 이래에는 / 하루도 정치가 잘된적이 없네 … / 생민(生民)이 무슨 죄가 있소? / 창천(蒼天)의 뜻이 아득하구려.』 혼미한 정계에 몸담아 있으면서 고민하던 김육의 일념이 어디에 있었나를 여실히 보여주는 단장의 시 한수로 보인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경찰 대공분실에서 운동권이던 서울대 3학년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당하다가 숨졌다. 이 죽음은 5공 독재에 대한 국민의 분노에 불을 질렀으며 이 분노는 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폭발했으며 한국민주화 20년의 기폭점이 된 것이다. 20년 세월동안 우리는 박종철이 원했던 민주화를 제대로 실천해 왔는가. 제도는 제대로 갖추어 놓고 내실면에서는 여전히 홍역을 앓고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현재의 민주화 세력은 정도(正道)의 민주화를 민족자주나 반미친북이라고 변색된 세력으로 남한의 이념무장 체계를 들쑤셔 놓고있다. 87년 민주화 투쟁으로 개화한 노조운동은 20년이된 지금도 현대자동차 파업에서 보듯 산업현장을 들쑤셔 놓고있다. 미국 앨리배마의 현대차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은 “지금이 어느때인데 … 우리는 품질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 파업까지는 안하겠지요”라며 고국의 파업을 우려하고 있다. 법과 타협은 뒷전으로 돌리고 우직하게 나서 행패를 부리며 국가 기간 산업에 막대한 손실을 주는 것이 박종철이 목숨을 다해 이룩한 민주화의 열매란 말인가. 서울 남영동.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이름이 바뀐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열린 고(故)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식에서 낭송된 이해인 수녀의 추모시가 20년동안 박종철 열사의 민주화 뜻에 거역한 우리들의 뼈저린 통한을 대변하고 있다. 『… 박종철님 / 20년간 잊혀지지 않는 슬픔의 가시로 /우리 가슴속에 박혀있던 그 이름 / 이름 한번 부르기만 하는데도 / 어찌 이리 아픈지요 / 어찌 이리 마음이 무거운지요 …』 ― 이조 인조때의 명재상 김육이 지은 시 『역사를 읽고싶지 않다네 / 그것을 읽으면 눈물이 흐른다네 …』가 전하는 시엣말처럼 우리 모두 20년 장구한 세월동안 멋 모르고 살아온 지난일을 회상하며 하나같이 애국의 뜻이 담긴 낙루(落淚)를 해야한다. 386들은 박종철이 생존해 있다면 같은 세대, 같은 동지들이라는 사실에 유념해 주기 바란다. 추모식에서 추모곡을 부른 가수 안치환씨가 “같은 65년생인 박종철 열사가 세상을 뜬뒤 20년동안 부끄럽게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점점 추락하는 386의 삶을 다시 끌어 올리는게 우리들의 남은 의무” 라는 다짐의 말을 하였다. 제발 그래야 한다. 386은 지금 노무현 대통령의 처량한 모습에도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박충식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