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가 넘었지만 동대문 풍물 벼룩시장은 한가했다. 수북한 먼지가 쌓인 ‘개시’도 못한 가게들이 수두룩했다. 왁자지껄하게 흥정을 하는 시장 풍경도 찾기 힘들었다. 입동 추위에도 아침부터 나온 상인들만이 삼삼오오 모여 커피 한 잔으로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동대문 풍물 벼룩시장의 노점상은 총 894개로 상인들 숫자만 950명에 달한다. 이들은 지난 2003년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 공사로 이 곳에 삶터를 옮겼지만, 내년 가을에는 오세훈 시장의 동대문운동장 공원 조성 계획으로 또 다시 쫓겨날 처지에 놓여 있다. 청계천 복원 공사를 하면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상인들에게 동대문운동장에 새터 마련과 세계적인 풍물시장 건립을 약속했다. 이 전 시장의 호언을 믿은 상인들은 평생 지켜온 청계천의 삶터를 내줬지만 결국 동대문운동장에 갇힌 처지가 됐다. 결국 상인들은 서울시 지원 없이 전기공사를 새로 하고 햇볕을 피하기 위한 차양막을 쳤다. 이 전 시장이 지원을 약속했지만 화장실과 소화기 설치, 전기공사 허가를 내준 것이 고작이었다. ■ 상인들, “우리가 동네북인가” 7일 오전 매서운 추위에도 몇몇 상인들이 보따리를 풀어놓고 장사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한 상인은 “개시도 못하고 가는 날도 많다”라며 공원 조성 계획에 대해서는“대책도 없이 시에서 나가라고 하면 이 곳에 머리를 묻고 싸울 수 밖에 없다”라며 비장하게 말했다. 가전제품들을 늘어놓던 한 상인은 “미국이나 일본은 풍물 시장을 키우려고 난리던데 어떻게 우리는 거꾸로 가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붕어빵을 파는 상인은 “힘 없는 사람들한테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죠”라며 끝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시 균형발전추진본부는 지난 달 “노후되고 기능이 저하된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역사와 첨단, 물과 숲, 문화와 영상이 어우러지는 다목적 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시는 공원화와 함께 8백억원을 들여 2천 5백평 규모의 ‘디자인 콤플렉스’도 건립할 계획이다.
도심 속 휴식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이 전 시장의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가 오세훈 시장의 동대문운동장 공원화로 이어지는 꼴이다. 시 계획대로라면 오세훈 시장이 만들 공원은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과 연결된다. 서울시 건설기획과 담당자는 “현재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용역을 수립중이고 지난 2일 시민아이디어를 받기 위한 공모를 했다”며 “내년 11월 착공을 예정으로 올 연말까지 시민아이디어를 반영해 기본계획을 설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 상인들 대책없이 공원화 계획 ‘일사천리’ 서울시는 최근 시민아이디어 공모 등을 통해 공원 조성을 예정대로 추진하고 있지만 삶터를 잃을 처지에 놓인 상인들에 대한 뚜렷한 대책은 아직 세우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 건설기획과 담당자는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 결정된 사항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사업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 “사업에 지장이 없도록 하면서 그 사람들 입장도 고민하는 중이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최인기 전국빈민연합 사무처장은 “서울시가 950명의 생존권 문제를 가지고 장난하면 안 된다”며 “따지고보면 상인들의 희생이 있어 청계천 복원 사업도 성공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사무처장은 “상인들에 대한 여론이 나쁘지 않다고 보고 있지만 서울시에서 역사나 환경복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노점상의 역기능을 들춰내면 상황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다”며 우려했다. ■ 상인들, “여기서 나가라면 결국 죽으라는 이야기” 상인들은 어렵게 터전을 잡은 이 곳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기주 동대문풍물벼룩시장 자치위원회 위원장은 “여기서 물러나라면 죽으라는 이야기 아니냐”라고 말했다. 한 위원장은 “하반기 연구용역이 끝나기 전에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협의체를 만들어야한다”면서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처럼 일방적인 강제철거를 또 다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의 행정대집행에 따른 강제철거에 눈물을 흘려야했던 이들은 다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상인들은 8일 서울역에서 열리는 전국빈민대회에 나설 예정이다. 한 상인은 “시민을 위한 공원을 만들기 위해 시민을 내쫓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며 울분을 토했다. 서울시가 이 전 시장의 업적을 따라가기 바쁜 와중에 도시빈민의 생존권은 결국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오재현 기자